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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02 / 2부 · 박정희와 팔라비

수교와 건설 현장,
테헤란로로 이어진
한·이란 관계

PARK × PAHLAVI · 1962 — 1979

1962~1979년 외교 기록과 기업 사사로 살펴본 교류의 확대

외교 기록·기업 사사로 읽는 1962~1979년 — 1972~1976년 경제지표 + 교류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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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정정 · 2026년 9월 7일
외교 기록과 기업 사사를 대조해 인원·날짜의 범위를 보완했습니다. 확인하지 못한 직접 대화와 인물의 생각, 경제적 인과 단정은 제외했습니다. 자료가 서로 다른 부분은 아래 정정 주석에 밝혔습니다.

한국과 이란은 1962년 수교한 뒤 대사관을 열고 사절을 주고받았다. 1970년대에는 한국 기업과 사람들이 이란의 건설시장 등에 진출했다. 서울의 테헤란로는 그 시기에 붙은 이름이다. 두 나라 관계를 원유나 두 지도자의 친분 하나로 설명하기보다, 외교와 경제 교류가 어떻게 이어졌는지 기록을 따라 살펴본다.

— 01 —
Autumn 1973
1973~1976년 경제지표와 오일쇼크

경제지표의 계열과 원유 가격·금수 조치를 구분해 읽는다. 이 절은 2026년 9월 7일 자료를 대조해 정정했다.

경제통계 정정 · 2026년 9월 7일
원래 수치의 계열·기준을 확인하지 못해 세계은행 WDI의 현재 한국 실질GDP 성장률·소비자물가 상승률 계열로 대조했습니다. 현재 계열의 갱신일은 2026년 7월 13일이며 원기사 작성 당시의 수치라고 소급하지 않습니다.

1973~1974년 석유파동은 한국 경제의 성장과 물가를 함께 살펴야 하는 사건이다. 그러나 성장률이 낮아졌다는 사실과 경제가 마이너스 성장했다는 설명은 다르다. 실질GDP와 소비자물가, 국제유가도 서로 다른 지표다.

2026년 9월 7일 조회한 WDI 계열에서 한국의 실질GDP 성장률은 1973년 14.97%, 1974년 9.65%다. 반올림 전 원자료로 계산한 하락 폭은 약 5.33%포인트다. 기존 기사와 그래프의 1974년 2.3%·12.6%포인트 하락이라는 설명은 이 계열과 일치하지 않아 바로잡았다. 같은 계열에서 1975년은 7.93%, 1976년은 13.26%다.

차트 · 현재 WDI 계열을 이용한 후속 대조
한국 실질GDP 성장률, 1972~1976년
0%5%10%15%20%7.34%197214.97%19739.65%19747.93%197513.26%1976

세계은행 WDI · NY.GDP.MKTP.KD.ZG · 연간 실질GDP 증가율 · 현재 계열 갱신 2026-07-13, 조회 2026-09-07

WDI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973년 3.22%, 1974년 24.30%다. 생산이 늘어나는 속도는 둔화한 반면 물가는 더 빠르게 올랐다. 특정 원유 공급국과의 관계만으로 두 지표의 변화 전체를 설명할 수도 없다.

한국의 연간 경제지표 — 현재 WDI 계열
연도실질GDP 성장률(%)소비자물가 상승률(%)
19727.3411.69
197314.973.22
19749.6524.30
19757.9325.25
197613.2615.33

미국 국무부 외교문서 해설은 이란이 1973년 아랍 산유국의 금수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이란의 원유 가격 인상 정책은 금수 불참과 별개의 문제였다. 이를 한국만 특별히 공급을 보장받았다거나 중동에서 이란만 한국에 원유를 공급했다는 근거로 바꿀 수는 없다.

한국과 이란의 1962년 수교가 갖는 의미를 평가하려면 실제 수입량·계약·가격·대체 공급처와 당시 외교문서를 함께 확인해야 한다. 수교 날짜 하나로 공급 조건이 결정됐다고 단정한 기존 문장은 제외했다.

자료 · 세계은행 실질GDP 성장률 원자료 · 소비자물가 원자료 · 미국 국무부 외교문서 해설

수교의 역사와 공급 조건은
서로 다른 자료로
확인해야 한다.
— 외교관계와 경제지표를 구분해 읽기
02
Government and Diplomacy
지도자의 이름 너머에 있던 교류

이 시기 한국의 대통령은 박정희, 이란의 군주는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였다. 박정희는 1961년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뒤 1963년 대통령에 취임했다. 경제개발을 추진하는 한편 1972년 유신체제로 장기집권을 제도화했다. 산업화의 성과와 권위주의 통치는 함께 살펴야 할 역사다.

팔라비 역시 개혁과 권력 강화를 동시에 추진했다. 1964년 미국 정보평가 문서는 농지개혁 등 백색혁명 정책을 설명하면서 그가 정보기관 SAVAK를 반대 세력 통제와 정부 지지 조직에 활용했다고 분석한다. 이는 당시 미국 정부가 이란 정세를 어떻게 판단했는지 보여주는 자료다.

당시 교류의 경로에는 외교장관과 총리, 시장, 기업이 있었다. 외교부는 2016년 박근혜 대통령의 이란 방문을 수교 이후 한국 정상의 첫 이란 방문으로 기록한다. 박정희 시기의 한·이란 관계는 두 정상의 방문 외교보다 다른 사절과 기관의 활동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자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박정희」 · 1964년 미국 정보평가 문서 · 외교부의 첫 정상 방문 설명

박정희의 1963년 초상
박정희의 1963년 초상사진 설명과 연도: 위키미디어 공용 원파일 · 촬영자 미상, 공용에 PD-South Korea로 표시. 1961년 쿠데타 직후 사진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03
Diplomatic Ties
수교와 공관, 무역 거점

한국과 이란의 수교일은 1962년 10월 23일이다. 주이란 한국대사관은 1967년 4월 1일, 주한 이란대사관은 1975년 8월 25일 문을 열었다. 외교부 관계 약사는 1966년 11월 이동원 외무장관의 이란 방문도 기록한다. 외교관계 수립과 공관 설치, 고위 인사의 방문은 각각 다른 단계다.

무역기관도 활동 기반을 마련했다. KOTRA 60년사 부록은 테헤란 무역관 설립일을 1964년 8월 1일로 적고 본문은 같은 해 테헤란에 시장조사원을 파견했다고 설명한다. 이 기록은 한국이 이란 시장을 조사하고 교역을 넓힐 거점을 마련해 간 과정을 보여준다.

수교와 공관 설치에 이어 시장을 조사할 거점까지 생겼다. 정부 간 외교와 기업의 경제 활동이 만날 기반이었다. 다만 외교관계의 성립 자체가 원유 공급량이나 개별 계약의 조건까지 정한 것은 아니다.

자료 · 주이란 한국대사관 관계 약사 · KOTRA 60년사, 부록 311쪽

04
Iran 1971
김종필 총리의 이란 방문

1971년 10월 김종필 국무총리는 이란 건국 2500주년 경축 행사에 참석했다. e영상역사관의 당시 문화영화 설명은 김 총리가 박영옥 여사와 함께 박정희 대통령의 정책특사로 이란을 방문했다고 기록한다. 공항 영접, 사절단의 유적 관람, 미국 부통령 스피로 애그뉴와의 면담도 소개한다.

문화영화 설명에 따르면 김 총리는 사절단과 함께 유적을 둘러보고, 귀빈전 숙소에서 애그뉴 부통령을 만나 한미 현안을 논의했다. 이란의 기념행사는 방문국과의 교류뿐 아니라 다른 나라 인사와 접촉하는 외교의 자리이기도 했다.

팔라비 정권은 페르시아 왕조의 역사를 기념하는 대규모 행사를 열었다. 옥스퍼드대학교의 관련 해설은 페르세폴리스 유적 인근에서 역사 의상을 갖춘 행진과 연회 등 여러 행사가 이어졌다고 설명한다. 한국 사절단도 이 행사에 참석했다. 그러나 기념행사에 참가했다는 사실만으로 몇 년 뒤 건설공사의 수주 경위까지 설명되지는 않는다.

자료 · e영상역사관 문화영화 설명 · 옥스퍼드대학교 1971년 행사 해설

1971년 페르세폴리스 기념행사의 텐트 시설
1971년 페르세폴리스 기념행사의 텐트 시설촬영자 미상. 위키미디어 공용 원파일은 1971년 사진으로 설명하며 PD-Iran으로 표시합니다.
페르세폴리스 방문을 상상한 기존 재현 이미지
페르세폴리스 방문을 상상한 기존 재현 이미지본지 제작 AI 재현 이미지. 실제 사절단의 얼굴·위치·촬영일을 입증하는 기록사진이 아닙니다.
05
Construction and People
이란에서 시작한 현대건설의 중동 사업

한국 기업의 이란 진출을 보여주는 사례는 현대건설의 반다르아바스 동원훈련조선소 공사다. 현대건설 70년사는 1975년 1월 이란 지점을 열어 수주 활동을 시작했고 이 공사를 통해 중동에 처음 진출했다고 기록한다. 이란을 현대건설의 사우디 진출 다음 단계로 설명한 원기사의 순서는 사사와 맞지 않는다.

이후 현대건설은 중동의 다른 시장으로 사업을 넓혔다. 사사의 국가별 첫 사업 목록에는 바레인 아랍수리조선소가 1975년 10월,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해군기지 해상공사가 그해 12월로 적혀 있다. 이란·바레인·사우디로 이어지는 기록은 현대건설 한 회사의 사업 경로를 보여준다. 한국 건설업계 전체의 국가별 진출 순서와는 다르다.

공사와 함께 사람들이 이동했다. 주이란 한국대사관의 관계 약사는 1970년대 중동 진출 과정에서 한국인 2만여 명 이상이 이란의 건설시장 등에 진출했다고 설명한다. 이는 특정 공사장의 인원이나 어느 한 시점의 동시 체류 인원을 뜻하는 수치가 아니다.

외교부는 이들의 진출이 양국관계 발전과 한국 경제성장에 기여했다고 평가한다. 기업의 계약과 현장으로 간 사람들은 수교국이었던 이란을 한국의 일과 생활에 더 가까이 연결했다. 이들의 경험과 송금, 귀국 뒤의 삶을 더 구체적으로 보여주려면 개인의 기록과 당시 자료를 따로 살펴야 한다.

자료 · 현대건설 「한눈에 보는 70년사」 8~9·34~35쪽 · 「기업문화사」 126~127쪽 · 외교부의 한국인 진출 규모 설명

20,000

2만여 명 이상 · 외교부가 설명한 1970년대 이란 건설시장 등에 진출한 한국인 규모.
특정 현장의 노동자 수나 한 시점의 체류 인원으로 한정한 통계는 아닙니다.

06
Street Names, 1977
삼릉로에서 테헤란로로

1977년 테헤란 시장의 서울 방문을 계기로 양 도시는 서로의 이름을 도로에 붙였다. 서울에는 테헤란로, 테헤란에는 서울로가 생겼다. 외교부는 이를 우호관계의 상징으로 설명한다.

서울시청 행정과 권순기가 1994년 「새국어생활」에 쓴 글은 테헤란 시장의 방한 기간을 1977년 6월 26~30일로 적는다. 서울시는 당초 여의도에 테헤란로를 지정하려다가 강남의 삼릉로를 개명하는 쪽으로 계획을 바꿨다는 설명이다. 당시 해당 도로의 폭은 50m, 길이는 3200m로 기록했다. 오늘날 도로 전체의 길이와는 구분해야 한다.

도시의 길 이름에 외교가 남았다. 테헤란로라는 이름이 생기기까지는 방한 행사뿐 아니라 서울 시내 어느 도로에 이름을 붙일지 정하는 행정적 선택도 있었다. 표지석의 한국어와 페르시아어 표기는 그 교환을 지금까지 보여주는 흔적이다.

자료 · 외교부 관계 약사 · 권순기·서울시청 행정과, 「새국어생활」 1994년 봄

한국어와 페르시아어가 보이는 테헤란로 표지석
한국어와 페르시아어가 보이는 테헤란로 표지석위키미디어 공용 원파일 · 업로더 PuzzletChung의 자체 촬영으로 추정 표기, 퍼블릭 도메인 공개. 2007년 6월 10일은 업로드일이며 촬영일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Epilogue
1979
정권 교체 뒤에도 이어진 외교관계

1979년에는 양국의 정치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팔라비는 1월 16일 이란을 떠났고 호메이니는 2월 1일 귀국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의 연표는 2월 11일 왕정 해체와 4월 1일 이슬람공화국 선포를 각각 기록한다. 군주의 출국, 정권 붕괴, 새로운 국가체제의 선포를 한 날짜의 사건처럼 다룰 수는 없다.

한국에서는 같은 해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격으로 사망했다. 두 지도자가 같은 해 권력을 잃었지만 이란의 혁명과 한국 대통령의 피살은 서로 다른 정치 상황에서 벌어진 사건이었다.

한국과 이란의 외교관계는 혁명 뒤에도 이어졌다. 외교부 관계 약사는 이후 관계가 소원해져 1981~1989년 대리대사급으로 낮아졌다가 다시 대사급으로 올라갔다고 기록한다. 지도자와 정권은 바뀌었지만 수교로 시작한 관계가 곧바로 사라진 것은 아니다.

1962년 수교에서 공관 설치, 사절 방문, 건설 진출과 거리명 교환까지, 양국 교류에는 여러 주체가 참여했다. 원유뿐 아니라 외교관과 기업, 일자리를 찾아 이동한 사람들의 활동이 관계를 넓혔다. 오늘 서울에 남은 테헤란로는 그 과정을 돌아보게 하는 지명이다.

자료 · 미국 NARA의 1979년 연표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외교부 관계 약사

한·이란 교류와 정치 변화 — 확인한 기록의 날짜
시기사건근거·범위
1962-10-23한국·이란 수교외교부 관계 약사
1964-08-01KOTRA 테헤란 무역관 설립KOTRA 60년사 부록
1967-04-01주이란 한국대사관 개설외교부 관계 약사
1971-10김종필 국무총리의 경축 행사 참석 방문e영상역사관 설명
1975현대건설의 이란 중동 사업 진출사사별 계약 월 차이는 주석 참조
1975-08-25주한 이란대사관 개설외교부 관계 약사
1977테헤란로·서울로 명명외교부 관계 약사
1979-01-16팔라비의 이란 출국NARA 연표
1979-02-01호메이니의 이란 귀국NARA 연표
1979-02-11이란 왕정 해체NARA 연표
1979-04-01이란 이슬람공화국 선포NARA 연표
1979-10-26박정희 대통령 피살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Sources
Correction Notes
자료의 차이와 정정 범위

현대건설 「한눈에 보는 70년사」의 국가별 목록(PDF6)은 반다르아바스 사업을1975.03.10으로 적지만 본문(PDF19)은1975.8 계약을 설명한다. 「기업문화사」PDF65는1975.3 수주로 적는다. 계약 원문 미확보로 본문은1975년으로 표기한다.

테헤란 시장 방한을 서울시 행정과의1994년 기고는6/26~30,후대2020년 시민기자 기사는6/17로 설명한다. 협약식·명명식·공고 원문을 확보하지 못해 이 날짜들을 별개 행사의 확정 일정처럼 연결하지 않았다.

1971년10월11일은 문화영화 설명의 방문일이다. 특정 연회·유적 관람일로 확장하지 않았다. 친서 내용과 김종필·박정희의 속마음, 방문과 건설 수주 사이 직접 인과는 근거 미확보로 제외했다.

원기사가 제시한 한국 전용 원유 공급 보장, 임금의 강남 개발 재원 사용, 한국 여름 두 배의 현장 더위, 양국 친밀도의 순위를 확정한 표현 등 단정은 확인하지 못했다. 미확인을 곧 거짓 확정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KOTRA의 옛 국가정보에는 설립일을 4월 1일로 적은 자료도 있습니다. 이 기사에는 60년사 부록의 1964년 8월 1일 표기를 사용했습니다.

기존 건설사진은 국가기록원의 정확한 원기록과 촬영 장소·시점을 대조하지 못해 지면에서 제외했습니다. 원본 파일은 보존했습니다. 배경 영상과 재현 이미지는 지면 연출이며 개별 사건의 증거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표지 초상: Ghazarians의 팔라비 1973년 공식 초상에서 파생한 공용 이미지 · 상세 출처는 위키미디어 공용 원파일에 표시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