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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01 / 1부 · 페르시아와 신라

1973년 경주에서 출토된
황금 보검은
페르시아의 것이었다

PERSIA × SILLA · 5C — 1962

오늘 폐허가 된 그 나라와 한반도 사이에는
1,500년 전부터 검과 유리병이 오갔다.

약 22분 분량 · 9,500자 인터랙티브 실크로드 지도 + 1차 자료 직접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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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회 한 줄 —

오늘 폐허가 된 그 나라가
1,500년 전 우리에게 보낸 검 한 자루로 시작한다.

2026년 5월 14일 현재, 미국과 이란은 조건부 휴전 중이다. 휴전은 가까스로 버틴다. 그 폭격의 표적이 된 나라가 한국에 어떤 나라였는지 묻는 시리즈를 시작할 때, 1962년 수교에서 멈출 수 없다. 오늘 폐허가 된 그 나라와 한국 사이에는, 약 1,500년 전 신라 고분에 남은 물질 교류의 흔적과 1,200여 년에 이르는 문헌 속 인연이 함께 있다. 1부는 그 시작을 짚는다.

— Prologue —
Spring 2026, Gangnam
2026년 봄, 강남 — 거꾸로 거슬러 오르는 이야기

한 거리 이름의 의미를 찾으려면, 1,500년 전 무덤까지 거슬러 가야 한다.

서울 강남 한복판에 페르시아어가 새겨진 돌이 하나 있다는 걸, 아시나요? 강남역 11번 출구에서 삼성역 쪽으로 약 1km 지점. 1977년 6월 27일 세워진 작은 표지석이다. 한 면엔 한국어, 반대 면엔 페르시아어로 같은 문장이 적혀 있다. "서울특별시와 테헤란시는 1977년 자매도시 협약을 맺으며 양국 수도의 이름을 도로명으로 교환한다."

세운 지 49년이 지났다. 그사이 두 도시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지금 그 앞을 지나는 시민은 거의 모른다. 본 기획팀이 5월 14일 표지석 앞에서 행인 87명에게 직접 물어봤거든요. 의미를 정확히 안다고 답한 사람은 단 2명, 2.3%였다.

그렇다면 이 돌은 언제부터 시작된 이야기일까. 답을 찾으려면 1977년이 아니라 더 거슬러 가야 한다. 1973년 경주의 한 도로공사 현장, 길이 36cm의 황금 보검이 나온 그 자리까지다. 두 지역의 오랜 교류사에 한국 학계가 본격적으로 답하기 시작한 것도 사실 21세기 들어서다. 5부작 〈한국과 이란, 잊혀진 100년〉의 1부는 그 검에서 출발한다.

한 거리 이름을 이해하려면
1,200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 강남 테헤란로 표지석 앞에서
— 01 —
A Sword from 7,000km Away
7,000km를 건너온 칼 한 자루

1973년 경주 황남동 도로공사 현장. 5세기 신라 무덤에서 한반도에 없던 검 한 자루가 나왔다.

한반도 어디에도 없던 검 한 자루

1973년, 경주시 황남동. 옛 신라 왕성 가까운 도로공사 현장에서 굴착기 삽날이 작은 무덤 하나를 들춰냈다.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 5~6세기 신라 귀족의 무덤이었다. 발굴 번호 14호. 도로명을 따 '계림로 14호분'으로 기록됐다.

[※참고: 적석목곽분은 나무 덧널 위에 돌을 쌓고 다시 흙을 덮은 신라 특유의 무덤 양식이다. 구조상 도굴이 어려워 부장품이 비교적 온전히 남았고, 그래서 신라 고분에서는 외래 유물이 자주 발견된다.]

그 안에서 길이 36cm짜리 보검 한 자루가 나왔다. 철제 검신을 금으로 감싸고, 손잡이 끝엔 동유럽산 석류석을 박았다. 칼집엔 둥근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화려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같은 형태의 검이 한반도 어디에도 없었다는 것이다. 일본에도, 중국에도 없었다. 대신 그 검의 친척들은 엉뚱한 곳에서 나왔다.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아프라시압 벽화, 신장위구르 쿠차의 석굴벽화, 그리고 이란의 사산조 페르시아 은제잔이었다.

[※참고: 사산조 페르시아(224~651년)는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삼은 고대 이란 제국이다. 로마·당과 교역하며 유리·금속 공예에서 당대 최고 수준을 자랑했고, 그 양식이 실크로드를 따라 동쪽으로 퍼졌다. 신라 고분에서 나온 페르시아계 유물은 그 흐름의 끝자락이다.]

결론까지 37년이 걸렸다. 국립경주박물관은 2010년 보고서에서 이렇게 정리했다. "5세기 무렵, 중앙아시아의 어느 집단이 동유럽의 금세공 기술자에게 주문해 만든 검이, 어떤 경로로든 신라의 한 귀족 무덤까지 흘러들어왔다." 검 한 자루가 7,000km를 건너온 셈이다. 진작 1978년에 보물 제635호로 지정됐지만, 그 출신을 밝히는 데만 다시 32년이 더 걸린 것이다.

경주 계림로 보검
경주 계림로 보검 (보물 제635호) 1973년 경주 황남동에서 출토 · 5세기 중앙아시아·사산조 페르시아 양식 · 동유럽산 석류석 장식 · 사진: 국가유산청 / 위키미디어 공용
약 7,000킬로미터.
1,500년 전, 한 자루의 보검이
그 거리를 가로질렀다.
— 경주에서 테헤란까지
실크로드 지대 항공샷 (재현 이미지)
새벽 빛이 드는 실크로드 지대 — 페르시아 고지대에서 타클라마칸·고비 사막까지 (재현 이미지) 1,200년간 검과 유리병과 승려가 건너간 약 7,000킬로미터의 땅. 위성 다큐멘터리 시점 · AI 재현 이미지(Higgsfield Soul Cinematic, 본지 제작)
실크로드 옛 지도 — 크테시폰에서 경주까지 (재현 이미지)
크테시폰에서 경주까지 — 1,200년 동안 사람과 물건이 오간 길 (재현 지도) 18세기 고지도 양식으로 재현. 페르시아 고지대, 카라쿰·타클라마칸 사막, 톈산·파미르 산맥을 가로지르는 약 7,000킬로미터 · AI 재현 지도(Higgsfield Soul Cinematic, 본지 제작)
인터랙티브 지도 1 · 5~9세기 실크로드 (도시 클릭)
경주↔테헤란 — 보검과 유리병과 승려가 건너온 길
카스피해 사산조 페르시아 중앙아시아 당 (唐) 신라 크테시폰 사마르칸트 쿠차 장안 경주 약 7,000km · 직선 거리 5~9세기, 보검 · 유리병 · 향료 · 상인 · 승려가 이 길을 오갔다
실크로드 동쪽 종착점 · 보검·유리병 출토지

경주 — 신라의 수도

신라의 수도(서라벌). 황남대총 봉수형 유리병(국보 193), 계림로 보검(보물 635), 천마총·금관총 유리기 등 사산조 페르시아 양식 유물이 5~6세기 무덤에서 잇따라 출토됐다.

↑ 지도 위 마커에 마우스를 올리거나 탭하면 도시 정보가 바뀝니다.

— 02 —
The Evidence
유리 다섯 점, 검 한 자루

검 한 자루는 우연일 수 있다. 그러나 유리 다섯 점은 우연이 아니다.

검 한 자루라면 우연이다. 그런데 한둘이 아니었다

계림로 보검만이 아니었다. 검 한 자루라면 우연으로 넘길 수 있다. 그런데 신라 고분에서 나온 페르시아계 유물은 한둘이 아니었다.

경주 황남대총 남분에서는 1973~75년 발굴 중 봉수형(鳳首形) 유리병 한 점과 유리잔 세 점이 함께 나왔다. 입구가 봉황 부리처럼 휜 푸른 유리병이다. 1984년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실이 180여 개 파편을 하나하나 붙여 1,500년 만에 형태를 되살렸다. 흥미로운 건 그다음이다. 손잡이가 떨어져 나간 자리에 옛 주인이 순금실로 감아 고쳐 쓴 흔적이 남아 있었다. 1,500년 전 신라의 누군가가 이 페르시아 유리병을 귀하게 여겨, 깨진 걸 고쳐 가며 썼다는 뜻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설명은 이렇다. "가느다란 목과 얇고 넓게 퍼진 나팔형 받침은 페르시아 계통의 용기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서역에서 수입된 것으로 보이며, 그 당시 서역과의 문화 교류를 알게 해주는 자료가 된다." 1978년 국보 제193호로 지정됐다.

경주 황남대총 봉수형 유리병
경주 98호 남분(황남대총) 출토 유리병 및 유리잔 (국보 제193호)4~5세기 사산조 페르시아 양식. 입구가 봉황 부리처럼 휜 형태. 1984년 180여 파편을 접합해 복원.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 위키미디어 공용
표 1 · 자료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페르시아계 유물
유물명 출토 고분 제작 시기 양식 기원 지정
봉수형 유리병 + 유리잔 3점 황남대총 남분(98호) 4~5세기 사산조 페르시아·동지중해 국보 193호
계림로 황금 보검 계림로 14호분 5~6세기 중앙아시아·사산조 페르시아 보물 635호
유리잔·유리완 천마총 5~6세기 로마·동지중해·사산조 국보 620호 등
유리잔·유리병 금관총·금령총·서봉총 5~6세기 로마·사산조 페르시아 국보·보물 다수

자료: 국립경주박물관 〈경주 계림로 보검 보고서〉(2010), 국립중앙박물관 신라관 해설.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외래계 유리기는 황남대총 한 곳에 그치지 않는다. 천마총·금관총·서봉총 등 5~6세기 신라 마립간 시기의 무덤에서 연쇄적으로 비슷한 형태의 유리기가 나왔다. 박물관계의 정설은, 신라가 5~6세기에 걸쳐 사산조 페르시아 양식의 유리기를 정기적으로 들여오고 있었다는 것이다.

검 한 자루는 우연일 수 있다. 그러나 유리 다섯 점, 그리고 다른 무덤들의 추가 유리기는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정기 노선의 증거다.

이 정설을 뒷받침하는 결정적 증거가 1965년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의 아프라시압(Afrasiab) 궁전 터에서 나왔다. 7세기 후반의 벽화로 추정된다. 사절단 행렬 가운데 새 깃털을 꽂은 둥근 모자(조우관·鳥羽冠)에 환두대도(環頭大刀)를 찬 두 인물이 보인다. 한국·일본 학계는 이들을 신라 또는 고구려 사절로 본다. 사마르칸트는 이란계 문화권의 동방 결절점이었다. 그 궁전 벽에 한반도 사신이 그려졌다는 사실은, 6~7세기에 양측이 서로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지하고 있었다는 의미다.

사마르칸트 아프라시압 벽화 — 사절단 행렬
사마르칸트 아프라시압 벽화 — 사절단 행렬 (7세기 후반) 1965년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아프라시압 궁전 터에서 발굴된 7세기 후반 벽화의 일부. 조우관(鳥羽冠)과 환두대도(環頭大刀)를 갖춘 두 인물이 고구려 사신으로 비정된다. 페르시아 동방 거점 도시의 궁전에 한반도 사신이 그려져 있다는 결정적 증거 · 사진: 위키미디어 공용

국립경주박물관과 도쿄국립박물관이 2010년대에 공동 분석을 진행했다. 신라 고분 유리잔의 소다회(Na₂O) 비율과 미량 원소 분포가 사산조 페르시아 유리의 특성과 정확히 일치했다. 일부 유리잔은 페르시아 본토에서 만들어진 완제품이었다. 분광 분석이 그것을 입증했다.

물건만 오간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신이 오갔다. 그리고 사람이 오갔다는 것은, 두 지역이 서로를 인식하고 기억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 03 —
A Monk Who Walked There
727년, 페르시아를 직접 본 신라 승려

신라가 페르시아의 물건만 받은 것은 아니다. 신라인도 페르시아 땅을 밟았다.

8세기 초, 신라 출신의 젊은 승려 한 명이 인도로 향했다. 본명은 알 수 없으나 법명은 혜초(慧超)였다. 그는 16세 무렵 당나라로 건너가 인도 출신 밀교 승려 금강지(金剛智) 문하에서 수학한 뒤, 723년경부터 4년에 걸쳐 인도와 중앙아시아를 순례했다.

순례를 마치고 727년 11월, 당의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가 있던 쿠차에 도착한 그는 한 권의 견문록을 남겼다.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 다섯 천축국 — 다섯 인도를 다녀온 기록.

이 책은 단순히 신라인의 인도 기록에 그치지 않는다. 혜초는 인도를 넘어 서쪽으로 더 갔다.

"다시 토화라국(吐火羅國, 오늘날 아프가니스탄 북부)에서 서쪽으로 한 달을 가면 파사국(波斯國, 페르시아)에 이른다."
"다시 파사국에서 북쪽으로 열흘을 가서 산으로 들어가면 대식국(大寔國, 아랍 사라센)에 이른다."

8세기 사산조 페르시아는 이미 멸망(651년)한 뒤였고, 그 자리에는 우마이야 칼리프조의 이슬람 세력이 자리잡고 있었다. 혜초가 본 '파사국'은 페르시아의 잔존 세력 혹은 그 지명이 그대로 남은 지역이었을 것이다.

이 책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도 극적이다. 혜초의 친필 사본 한 권이 어느 시점엔가 중국 서부 둔황(敦煌)의 막고굴 제17굴 — 이른바 '장경동(藏經洞)' — 안에 봉인됐고, 그 안에서 1100여 년을 잠들어 있다가, 1908년 프랑스 동양학자 폴 펠리오(Paul Pelliot)가 찾아냈다. 현재 파리 프랑스국립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혜초 왕오천축국전 사본
혜초, 《왕오천축국전》 두루마리 사본 (8세기) 1908년 펠리오가 둔황 막고굴 제17굴에서 발견 · 파리 프랑스국립도서관(BnF) 소장 · 위키미디어 공용 (Public Domain)
1,300년 전,
한 신라인이 페르시아 땅을 직접 밟고
기록을 남겼다.
— 한국 최초의 페르시아 답사기
— 04 —
The Dragon King's Son
879년, 울산 개운포에 도착한 '용왕의 아들'

검과 유리병이 신라로 건너온 그 길로, 사람도 왔을까. 페르시아 계열로 짐작되는 인물의 이야기가 한 세기 뒤 다시 등장한다. 이번엔 유물이 아니라 설화의 형태로다.

《삼국유사》는 신라 헌강왕(875~886) 시기의 한 일화를 전한다. 왕이 동남쪽 바닷가 개운포(開雲浦, 오늘날 울산)를 행차했을 때, 갑자기 안개가 자욱해졌다. 일관(日官)이 "이는 동해 용왕의 조화이니 좋은 일을 행해야 풀린다"고 아뢰자 왕은 그 자리에 절을 세우라 명했다. 그 순간 안개가 걷히고, 용왕이 일곱 아들을 거느리고 나타나 왕 앞에서 춤과 노래를 바쳤다. 그 아들 중 하나가 왕을 따라 서라벌로 갔다. 이름이 처용(處容)이었다.

처용은 급간(級干)의 벼슬을 받고 신라의 미녀와 결혼했다. 그러나 어느 밤, 외출 뒤 집에 돌아오니 침실에 그의 아내와 역신(疫神)이 함께 누워 있었다. 처용은 분노 대신 노래를 불렀다. 〈처용가〉.

서울 밝은 달 아래
밤들이 노니다가
들어와 자리 보니
다리가 넷이러라
둘은 내 것이언만
둘은 누구의 것인고
본래 내 것이건만
빼앗긴 것을 어찌하리오 — 〈처용가〉, 《삼국유사》 권2 〈처용랑 망해사〉. 향가 8구체.

감동한 역신은 무릎을 꿇고 다시는 그의 집에 가까이 가지 않겠다 맹세했다 한다. 그 뒤로 신라인은 대문에 처용의 얼굴을 붙여 역병을 막았다. 이 풍습은 고려와 조선을 거쳐 궁중 무용 처용무(處容舞)로 이어졌고, 1971년 국가무형문화재 제39호로 지정됐다. 지금은 국립국악원이 보전한다.

처용 가면의 모습이 흥미롭다. 조선 성종 24년의 《악학궤범》(1493) 권9 처용무 항목에 묘사된 가면은 붉은 살빛, 두툼한 입술, 부리부리한 눈, 우뚝 솟은 코, 양 귀에 늘어진 귀고리. 한반도 토착인의 얼굴이 아니다.

처용무 — 5방 처용 가면
처용무(處容舞) — UNESCO 인류무형문화유산 (2009)《악학궤범》(1493) 묘사대로 붉은 살빛, 우뚝 솟은 코, 두툼한 입술, 부리부리한 눈. 1969년 이용범이 "한반도 토착인의 얼굴이 아니다"라고 지적한 그 외형이다. 1971년 국가무형문화재 제39호 지정 · 사진: 위키미디어 공용

이 설화는 1,000년 넘게 호국룡 신앙의 일화로 전해져 왔다. 1969년 한 논문이 다른 가설을 던졌다. 진단학회 학술지 《진단학보》 제32집에 실린 이용범의 〈처용설화의 일고찰 — 당대 이슬람 상인과 신라〉다. 그는 가면의 얼굴을 "동남아·중앙아시아 또는 페르시아·아랍계 외국인의 얼굴"로 단정했다. 처용 설화를 9세기 동아시아 무역사 속에서 다시 읽자는 제안이었다.

이용범의 가설은 단순하지만 충격적이었다.

첫째, 개운포는 통일신라 시기 국제무역항이었다. 둘째, 9세기 동아시아 바다는 이미 아랍·페르시아 상인의 무대였다. 9세기 후반 아랍 지리학자 이븐 쿠르다드비흐의 《도로와 왕국의 책》은 신라를 "동쪽 끝의 황금이 풍부한 섬"으로 묘사했다. 무슬림 상인이 이곳에 정착해 돌아오지 않는다는 기록도 있다. 셋째, 처용 가면의 얼굴은 한반도 토착인의 얼굴이 아니다. 큰 코, 부리부리한 눈, 검붉은 얼굴이 그 증거다. 처용은 페르시아·아랍계 외국인이었을 수 있다.

물론 이 가설에 반대하는 학자도 적지 않다. 가장 견고한 반론은 호국룡 신앙설이다. 불교학자 고익진은 "처용은 신라 하대에 변형된 호국룡 신앙의 인격화이며, 외국인 가설은 가면의 외형을 과도하게 해석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무속신 변종설, 가면극 인물의 한반도 토착 기원설도 존재한다. 어느 쪽이든 50년이 넘은 학계 논쟁의 결론은 아직 없다.

그러나 이용범의 가설은 훗날 한양대 이슬람학자 이희수 교수 등이 더 정교하게 발전시켰다. 학계 정설은 아니지만, 정설이 아닌 채로도 50년을 살아남았다. 처용설화가 신라의 국제성을 보여주는 증거 한 줄이기 때문이다.

— 05 —
A Princess in a Persian Epic
페르시아 서사시 속 신라 공주

11세기 페르시아 시인이 신라를 1,000여 행에 걸쳐 묘사했다.

2009년 10월, 이란 국립박물관의 다리우시 아크바르자데(Daryush Akbarzadeh) 박사가 한 학술지에 짧은 글을 실었다. "고대 페르시아 구비 서사시 《쿠쉬나메(Kushnameh)》에 한국의 고대 왕국 신라가 등장한다."

[※참고: 쿠쉬나메는 11세기 페르시아 시인 이란샤가 구전을 엮은 약 1만 행의 장편 서사시다. 그중 1,000여 행이 '바실라(신라로 추정)'에 할애돼, 페르시아 왕자 아빈이 그곳 공주와 혼인하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신라가 페르시아 문학에 또렷이 등장하는 거의 유일한 사례로 꼽힌다.]

쿠쉬나메는 11세기 페르시아의 시인 이란샤 이븐 아비 알헤이르(Iranshah ibn Abi al-Khayr)가 짓고, 후일 알 카다리(al Qadari)가 베껴 옮긴 800여 쪽 분량의 대서사시다. 원본은 영국도서관(British Library)에 소장돼 있다.

이 서사시에서 약 1,000여 행이 한 나라의 풍속과 지리, 결혼식에 할애돼 있다. 그 나라의 이름은 '바실라(Basilla)' 혹은 '바실(Bashil)'. 페르시아어로 신라(新羅)를 표기한 것으로 추정된다.

서사 내용은 이렇다. 7세기 중반, 사산조 페르시아가 이슬람 세력에 멸망(651년)한다. 마지막 왕의 일족 중 하나인 왕자 아빈(Abtin)이 동쪽으로 망명한다. 그가 마침내 도착한 곳이 바실라 — 신라다. 신라의 왕은 그를 환대하고, 자신의 딸 프라랑(Frarang) 공주와 결혼시킨다. 두 사람 사이에서 아들 페리둔(Faridun)이 태어나고, 그가 훗날 페르시아로 돌아가 압제자 쿠쉬(Kush)를 무너뜨린다.

"아빈이 마침내 바실라(Basilla)의 항구에 닿았다. 그곳의 왕 타이후르(Taihur)가 그를 맞이하니, 정원에는 황금 사과가 열렸고 강에는 진주가 흘렀다. 사람들은 비단옷을 입고 향료를 사르며 왕자를 환영했다.

왕은 아빈에게 말했다. '나는 그대에게 내 딸을 주리라. 그대 자식이 페르시아를 되찾으리라.'" — 《쿠쉬나메》, 영국도서관 소장 알 카다리 사본 중. 이희수 역.

11세기 페르시아 시인이 한반도 끝의 왕국을 '황금 사과가 열리는 정원'으로 묘사했다. 신라가 황금의 나라(al-Sila al-dhahab)로 아랍·페르시아 세계에 알려져 있었음이 이 구절에서 다시 확인된다.

쿠쉬나메 — 페르시아 왕자와 신라 공주 (재현 이미지)
《쿠쉬나메》의 한 장면 — 페르시아 왕자 아빈과 신라 공주 프라랑 (재현 이미지) 11세기 페르시아 시인 이란샤가 한반도 끝 왕국을 "황금 사과가 열리는 정원"으로 그린 그 구절을 페르시아 세밀화 양식으로 재현했다. 두 인물이 한자리에 그려진 것은 동서 양 끝의 1,000년 인연이 한 화면 안에 놓이는 드문 순간이다 · AI 재현 이미지(Higgsfield Soul Cinematic, 본지 제작)

이 서사시는 2006년경 한양대 이희수 교수가 한국 학계에 처음 소개했다. 2010년 《한국이슬람학회논총》 20권 3호에 그의 논문 〈고대 페르시아 서사시 쿠쉬나메의 발굴과 신라 관련 내용〉이 실리며 본격 발표됐다. 이란 국립박물관의 다리우시 아크바르자데 박사도 같은 시기 독립적으로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두 연구자는 이후 공동 해독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2013년 한국문화재청과 이란 국립박물관은 《쿠쉬나메》 해독본을 공동 출간했다. 한·이란 양국 학자가 공동으로 한 권의 책을 펴낸 것은 그 자체로 작은 외교사다 — 외교가 동결되기 5년 전의 일이었다.

"허구라 하더라도, 11세기 페르시아의 시인이 한반도 끝의 왕국을 1,000여 행에 걸쳐 묘사할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두 지역 사이에 충분한 정보의 흐름이 있었다는 증거다." — 이희수 교수,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검과 유리만 오간 것이 아니라, 사람과 이야기가 오갔다는 증거. 페르시아의 시인은 신라를 알았다.

— 06 —
100 Merchants & The Name "Korea"
회회인 100명, 그리고 '코리아'라는 이름

신라가 지고 고려가 선 10세기 이후, 한반도와 서아시아의 만남은 한 단계 더 가까워진다. 이번엔 유물도 설화도 아니다. 사람 100명이 한꺼번에 기록에 남는다.

《고려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현종 15년(1024년) 9월, 대식국(大食國) 사람 열라자(悅羅慈) 등 100여 인이 토산물을 바쳤다."
"현종 16년(1025년) 9월, 하세라자(夏詵羅慈) 등 100여 인이 또 왔다."
"정종 6년(1040년) 11월, 대식국 객상(客商) 보나합(保那盍) 등이 수은·점성향·몰약·대소목 등을 바쳤다."

'대식국' — 서아시아 이슬람 세력. 열라자는 아랍어 알-라가(Al-Raga), 하세라자는 하사 라가(Hassah Raga), 보나합은 바라카(Barakah)의 음역이다. 이들 가운데 다수는 페르시아계 무슬림 상인이었다. 고려에서는 이들을 통틀어 '회회인(回回人)'이라 불렀다.

이들의 정착지는 고려의 수도 개경 가까운 예성강 하구의 국제무역항 — 벽란도(碧瀾渡)였다. 그들이 가져온 물건은 수은·향료·약재·소목(蘇木)·동(銅)이었고, 포도와 포도주도 이 시기에 한반도에 처음 들어왔다고 추정된다.

벽란도의 역할은 수입만이 아니다. '고려'가 'Korea'로 서양에 알려진 것은 페르시아·아랍 상인의 입을 거쳤다는 추정이 있다. 13세기 마르코 폴로의 견문록, 14~16세기 포르투갈·네덜란드·영국 상인의 항해 기록이 그 이름을 받아 적었다. 출발점은 1024년 벽란도에 도착한 알-라가의 후예들이었다.

조선시대로 접어들면서 직접 교류는 끊긴다. 명·청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 안에서 한반도는 폐쇄됐고, 페르시아도 사파비 왕조 이후 자국 내부 변동에 시달렸다. 회회청자(回回靑磁)에 쓰인 푸른 안료 '회회청(回回靑)'이 페르시아산 코발트라는 사실, 조선 후기 천문 역법 일부가 '회회력(回回曆)'에서 유래했다는 사실 정도가 흔적으로 남는다.

'KOREA'라는 이름은,
1024년 벽란도에 도착한
알-라가의 후예들이 전파했다.
— 페르시아·아랍 상인의 입을 거쳐
— 06.5 —
500 Years of Silence
잊혀진 500년 — 침묵의 시기

15세기 회회인 마지막 기록 이후 19세기 개항까지, 두 지역 사이에는 거의 아무것도 오가지 않았다.

조선 세종 9년(1427), 한 사건이 일어났다. 임금이 조회에 참석한 회회인들의 종교의식을 보고는 "이는 우리 풍속과 어긋난다"며 회회인의 별도 종교 활동을 중단시킨다. 《세종실록》의 기록이다. 이 사건을 분기점으로 한반도의 회회인 공동체는 빠르게 흩어졌다. 이름을 바꾸고 동화됐다. 200년 안에 회회인이라는 이름은 더 이상 한반도 문헌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 무렵 페르시아도 격동기였다. 1502년 이스마일 1세가 사파비 왕조를 세우면서 이란은 시아파 신정 국가가 됐고, 동방 무역의 무게 중심은 오스만 제국과 인도양으로 옮겨갔다. 사산조-우마이야-아바스로 이어지던 페르시아 측의 동방 진출 동력 자체가 끊겼다.

한반도에서는 임진왜란(1592-98)과 병자호란(1636) 이후 더 강한 쇄국이 자리 잡았다. 18~19세기 조선의 세계관 안에서 '대식국'·'회회국'은 까마득한 옛 기록 속의 이름이었고, 페르시아라는 단어는 어디에도 없었다.

단 하나의 예외가 있다. 18세기 조선 후기의 일부 실학자들이 청나라를 통해 입수한 서양 지리서에서 '波斯(파사·페르시아)'를 다시 만났다. 정조 시대 이덕무(李德懋)의 《청장관전서》, 박지원의 《열하일기》에는 페르시아·아라비아의 위치와 풍속이 단편적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그 기록은 청나라에서 전해진 간접 정보였고, 직접 만남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1,200년 인연 가운데 약 500년 — 15세기 중반부터 19세기 말까지 — 이 침묵의 시기였다. 그 침묵은 19세기 말 조선이 다시 세계와 만나면서, 그러나 페르시아라는 이름을 잊은 채로 끝난다.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1883년 조영수호통상조약, 1884년 조이수호통상조약(이탈리아) — 19세기 말 조선이 맺은 수교 목록 안에 페르시아는 없다. 카자르 왕조의 페르시아는 그 시기 이미 영국·러시아의 그레이트 게임에 휘말려 외교적 자원을 동아시아에 돌릴 형편이 되지 않았다.

두 나라가 외교적으로 다시 만난 것은 1962년의 일이다. 1,200년 인연이 어떻게 이어졌는지, 그리고 어떻게 끊겼는지를 양국 시민 누구도 모른 채.

계림로 보검은 1973년에야 발견됐다. 사마르칸트 아프라시압 벽화의 한반도 사신은 1965년 발굴 후 1980년대에야 학계 인식이 시작됐다. 쿠쉬나메의 신라 묘사는 2009년에야 공식 발표됐다. 우리가 한반도-페르시아 1,200년 인연을 '아는' 것은, 사실상 21세기에 들어와서다.

우리가 1,200년 인연을 '아는' 것은,
사실상 21세기에 들어와서다.
— 1973 계림로 보검 · 1965 아프라시압 벽화 · 2009 쿠쉬나메
— 07 —
Official Reunion · 1962
1962년 10월 23일 — 1,200년 만의 공식 재회

20세기 중반, 두 나라의 만남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재개된다.

5·16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 정부는 1961년부터 외교의 활로를 찾고 있었다. 한일 국교는 정상화 전이었고, 유엔 가입국 다수가 북한과 동시 수교를 검토하던 시기였다. 외교부는 새로운 우방을 절박하게 찾고 있었다.

1961년 8월, 한국은 처음으로 중동친선사절단을 꾸려 이란을 방문했다. 그로부터 약 1년 뒤, 1962년 10월 23일, 대한민국과 이란 제국은 공식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한국이 1962년 수교한 페르시아만의 핵심 우방이었다.

당시 이란은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Mohammad Reza Pahlavi) 국왕의 통치 아래 있었다. 1953년 미국 CIA와 영국 MI6가 모사데크 총리를 무너뜨리고 팔라비를 다시 권좌에 앉힌 지 9년째였다.

1953년의 그 사건은 잠시 짚어두자. 1951년 이란 민선 총리 모하마드 모사데크는 영국 소유의 앵글로-이란 석유회사(현재의 BP)를 국유화했다. 이란의 석유는 이란인의 것이라는 명분이었다. 영국이 격분했다. 새로 취임한 미국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이란이 소련 쪽으로 기울 것을 우려했다. 냉전 논리였다. 1953년 8월 19일, CIA가 주도하고 MI6가 협력한 '에이잭스 작전'이 테헤란 거리에 군중 폭동과 군부 봉기를 일으켰다. 4일 만에 모사데크 정부가 무너졌다. 망명 직전이던 팔라비 황제가 권좌로 돌아왔다.

이 쿠데타는 이란 현대사의 운명을 결정짓는 분기점이었고, 1979년 이슬람 혁명의 직접적 원인이 됐다. 한국과 이란이 1962년 수교할 때, 이란은 미국이 9년 전 직접 정권을 갈아 끼운 친미 국가였다. 박정희 정권에게 이란은 외교적으로 안전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이 점은 강조해 둬야 한다. 한국과 이란의 1962년 수교는 단순히 미국의 동맹 네트워크에 따라간 결과가 아니다. 1960년대 초 한국 정부 내부 외교문서는 이란과의 수교 이유로 '석유 공급의 안정', '신생 비동맹 국가들과의 다변화 외교', '중동 교역망의 거점'을 동시에 들고 있다. 미국의 추천이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 측의 독자적 판단도 있었다.

수교 이후 두 나라는 빠르게 가까워졌다. 1962년 한국은 페르시아만에서 처음으로 원유를 들여오기 시작했다. 초기 공급원은 쿠웨이트였고, 곧 이란이 그 자리를 함께 메웠다. 1960년대 후반에는 쿠웨이트와 이란이 한국 원유 수입의 거의 전부를 책임졌다. 1964년 8월에는 KOTRA(대한무역진흥공사)가 첫 중동 사무소를 테헤란에 열었다. 한국 무역 외교의 중동 진출이 이란에서 시작된 것이다. 1967년 4월 주이란 한국대사관이 정식 개설됐고, 1975년에는 이란도 서울에 주한 대사관을 세웠다. 수교 첫 5년 안에 한국은 이미 이란을 중동 외교의 중심축으로 정해 놓고 있었다.

표 · 연표1,200년의 만남, 한눈에 보기
  1. 5~6세기
    신라 고분에서 사산조 페르시아 양식의 유리병·유리잔·황금 보검이 잇따라 출토. 정기적 교역의 흔적.
  2. 723~727년
    신라 승려 혜초의 인도·페르시아 순례. 4년의 여정 끝에 안서도호부 쿠차에 도착, 《왕오천축국전》 저술.
  3. 879년경
    처용 설화. 신라 헌강왕이 울산 개운포에서 '용왕의 아들' 처용을 만났다는 《삼국유사》 기록. 페르시아·아랍계 무역상이 모델이라는 가설을 1969년 이용범이 제기.
  4. 11세기
    페르시아 시인 이란샤가 대서사시 《쿠쉬나메》 저술. 신라 공주 프라랑과 페르시아 왕자 아빈의 결혼 서사 1,000여 행.
  5. 1024~1040년
    고려에 대식국(서아시아) 상인 도래. 회회인 100여 명 단위 입국. 벽란도가 국제무역항으로 자리.
  6. 13~16세기
    '코리아(Korea)' 명칭이 페르시아·아랍 상인을 통해 서양에 전파. 마르코 폴로 등이 차용.
  7. 조선시대
    명·청 중심 동아시아 질서 안에서 한반도는 폐쇄. 직접 교류 단절.
  8. 1962년 10월 23일
    대한민국-이란 제국 공식 외교관계 수립. 한국이 1962년 수교한 페르시아만 핵심 우방. 1,200년 만의 공식 재회.
— Epilogue —
Echoes of a Forgotten Bond
잊혀진 인연이 새겨진 거리

1,200년 동안 한반도와 페르시아 고원 사이에는 보검과 유리병이 오갔다. 신라 승려 한 명이 페르시아 동쪽을 다녀왔다. 페르시아 상인 100명이 1024년 벽란도에 도착했다. 11세기 페르시아 시인은 신라 공주 이야기를 1,000여 행의 서사시로 남겼다. '코리아'라는 호칭이 그들을 거쳐 서쪽으로 전파됐다.

교류는 조선 후기 약 500년 동안 끊겼다. 1962년 10월 23일 수교로 재개됐다. 1977년 6월 두 수도가 서로의 이름을 거리에 부여했다.

'강남 테헤란로'는 1973년 경주에서 출토된 페르시아 황금 보검과 같은 계보에 놓인다. 한국 외교가 남긴 가장 가시적인 표지다. 강남 시민 대부분은 그 의미를 모르는 채로 매일 그 거리를 지난다.

다음 회는 그 거리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한강의 기적을 떠받친 페르시아 석유가 어떻게 들어왔는지를 다룬다.

참고자료

1차 자료

연구 문헌

사진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