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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02 / 2부 · 박정희와 팔라비

한강의 기적은
페르시아의 기름으로
굴러갔다

PARK × PAHLAVI · 1962 — 1979

오늘 폐허가 된 그 나라가,
한때 한강의 기적을 떠받친 가장 가까운 우방이었다.

약 14분 분량 · 6,000자 오일쇼크 V자 차트 + 17년 동행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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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회 한 줄 —

오늘 폐허로 변한 그 나라가
한강의 기적을 떠받쳤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었다.

왜 1962년부터 1979년까지를 따로 떼어 보는가. 이 17년이 한·이란 관계가 가장 가까웠던 유일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오늘 한국이 폭격을 묵인하고 있는 그 나라가, 반세기 전 한국이 일찍이 수교한 페르시아만 우방이었다. 1차 오일쇼크 때 이란은 한국에 기름을 끊지 않았다. 현대건설의 첫 이란 현장이 그곳에서 열렸다. 강남 한복판에 거리 이름을 남겼다. 박정희와 팔라비는 만난 적이 없다. 그러나 두 정권의 17년이 한강의 기적을 떠받쳤다. 누가 그 토대를 만들었고, 우리는 왜 그것을 잊었나. 2부는 그 17년을 추적한다.

— 01 —
Autumn 1973
1973년 가을, 한국에 기름을 댄 나라

유가가 4배로 뛰었다. 한국 경제성장률은 14.9%에서 2.3%로 추락했다. 그러나 이란은 한국을 도왔다.

유가가 1년 만에 4배로 뛴 그해, 이란만 한국에 기름을 끊지 않았다

1973년 가을, 한국 경제가 1년 만에 무너진 걸 아시나요? 시작은 그해 10월 6일이었다. 이집트와 시리아가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했거든요. 제4차 중동전쟁이었다.

10일 뒤인 10월 16일, 사우디아라비아·이란 등 페르시아만 산유국이 원유 공시가격을 움직였다. 배럴당 3.01달러에서 5.12달러로 올리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다음 날엔 아랍석유수출국기구(OAPEC)가 한 발 더 나갔다. 이스라엘 후원국을 겨냥해 석유 금수와 단계적 감산을 결정한 것이다. 1차 오일쇼크였다. 세계 경제는 한 분기 만에 흔들렸다.

[※참고: OAPEC(아랍석유수출국기구)는 1968년 결성된 아랍 산유국 간 석유 협력 기구다. 1973년 이스라엘 후원국을 겨냥해 석유 금수 조치를 단행하면서, 석유가 외교적 무기로도 쓰일 수 있음을 보여줬다. 산유량으로 가격을 조정하는 OPEC과는 성격이 다른 기구다.]

한국은 직격탄을 맞았다.

차트 1 · 통계
1차 오일쇼크가 한국 경제에 만든 V자 — 1973년 14.9%에서 1974년 2.3%로 추락
0% 5% 10% 15% 20% 경제성장률 5.8% 1972 14.9% 1973 정점 2.3% 1974 오일쇼크 5.7% 1975 11.0% 1976 중동 건설붐 ▼ 12.6%p 추락 (1년 만에)
정상기 성장률 1973년 정점 1974년 오일쇼크 충격

자료: 한국은행 경제통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석유파동〉.

얼마나 추락했을까. 성장률이 1973년 14.9%에서 1974년 2.3%로 내려앉았다. 1년 만에 12.6%포인트가 날아간 셈이다. 물가는 거꾸로 뛰었다. 1974년 물가상승률이 24.8%, 전년 3.5%의 7배였다. 유가가 모든 걸 끌어올린 결과다. 1974년 7월 OPEC 사우디 기본유종 가격은 배럴당 11.65달러, 1973년 10월의 약 4배였거든요.

그런데 그 한복판에서 한국은 한 가지 사실을 확인했다. 중동 산유국 중 이란만 한국으로의 원유 공급을 끊지 않았다. OAPEC가 친미 국가에 요구한 5% 감산 명단에서도 한국은 빠졌다.

왜 한국만 비껴갔을까. 11년 전에 미리 손을 잡아둔 덕이다. 한국은 1962년 10월 23일 이란과 수교했다. 한국이 1962년 수교한 페르시아만의 핵심 우방이었다. 1973년 오일쇼크는 그 선택의 값어치를 직접 확인시킨 시점인 셈이다.

1962년의 선택이
1973년 가을
가치를 보였다.
— 한국의 핵심 페르시아만 우방, 이란
— 02 —
Two Strongmen, Never Met
만난 적 없는 두 사람

박정희는 이란을 방문하지 않았다. 팔라비도 한국에 오지 않았다. 그러나 두 정권은 가장 닮은꼴이었다.

박정희와 팔라비가 실제로 마주 앉은 적이 있을까. 없다. 두 사람은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시리즈 부제목에 두 이름을 나란히 걸어둔 터라, 이 대목은 먼저 짚어둬야 한다.

박정희는 재임 18년 동안 이란을 방문하지 않았다.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Mohammad Reza Pahlavi) 황제도 한국을 국빈 방문하지 않았다. 그러니 정상회담 사진도 한 장 남지 않았다.

만난 적은 없지만, 두 정권은 가장 닮은꼴이었다

그런데도 두 정권은 1960~70년대 한반도와 페르시아 고원에서 가장 닮은꼴이었다.

표 1 · 비교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

이란 황제 (재위 1941-1979)

  • 1953년 8월 · CIA-MI6 쿠데타로 권좌 복귀. 모사데크 정부 전복.
  • 국시 · 친미·반공·근대화
  • 1963년 · 백색혁명 — 농지개혁·여성참정권·문자해독
  • 비밀경찰 · SAVAK (1957 창설, 모사드 훈련)
  • 최후 · 1979년 1월 16일 망명, 1980년 7월 카이로에서 사망

박정희

대한민국 대통령 (재임 1963-1979)

  • 1961년 5월 16일 · 군사 쿠데타로 권력 장악
  • 국시 · 반공·자립·근대화
  • 1962년 · 경제개발 5개년 계획 — '조국 근대화'
  • 비밀경찰 · 중앙정보부 (1961 창설)
  • 최후 ·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에서 김재규 총탄에 사망

두 사람의 정치적 결은 닮아 있었다. 둘 다 위로부터의 산업화를 밀어붙였고, 둘 다 비밀경찰을 운영했다. 둘 다 1979년에 권력을 잃었다. 1월 16일 팔라비가 테헤란을 떠나 망명길에 올랐고, 10월 26일 박정희가 궁정동에서 김재규의 총탄에 쓰러졌다.

그러나 만난 적은 없다. 두 정권은 정상회담장이 아니라 다른 자리에서, 다른 사람들의 손으로 만났다.

박정희 대통령 공식 초상 1963
박정희 대통령 공식 초상 (1963)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권력 장악 직후. 1962년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발표. 사진: 위키미디어 공용 (PD-South Korea)
— 03 —
The Choice of 1962
한국이 왜 이란을 택했나

왜 하필 이란이었을까. 답을 알려면 5·16 직후 한국의 처지부터 봐야 한다. 그때 박정희 정권은 외교적 고립 상태였다. 한일 국교는 정상화 전이었고, 미국·일본을 빼면 우호국이 많지 않았거든요. 게다가 유엔 가입국 다수가 북한과 동시 수교를 검토하던 시기였다. 외교부는 새 우방이 급했다.

이때 한국이 눈을 돌린 곳이 중동이다. 이유는 단순했다. 첫째, 중동에는 신생 독립국이 많아 외교의 여지가 컸다. 둘째, 한국의 산업화 계획에는 석유가 필요했다. 셋째, 이슬람권 다수가 친미 진영이었다.

그중 첫 선택지는 이란이었다. 1961년 8월, 한국 정부는 첫 중동친선사절단을 꾸려 테헤란으로 보냈다. 1년 2개월의 협상 끝에 1962년 10월 23일, 대한민국과 이란 제국은 공식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이란은 사우디아라비아(10월 16일)에 이어 한국이 1962년 수교한 페르시아만 국가였다.

수교 이후 후속 절차가 빠르게 진행됐다.

수교 뒤 첫 5년 동안 한국은 이미 이란을 중동 외교의 중심축으로 삼았다.

— 04 —
Tent City at Persepolis
1971년 10월, 페르세폴리스의 텐트도시

사막 한복판에 호텔급 텐트 도시가 통째로 들어선 적이 있다는 걸 아시나요? 1971년 10월, 이란이 페르시아 제국의 옛 수도 페르세폴리스 폐허 위에 거대한 텐트도시를 세웠다.

[※참고: 페르세폴리스는 기원전 6~5세기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 제국의 의례용 수도다. 다리우스 1세가 본격 조성했고, 거대한 돌기둥과 부조로 유명하다. 기원전 330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불탄 뒤 폐허로 남았으며, 현재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다.]

명분이 거창했다. 팔라비 황제가 자국의 역사를 키루스 대왕이 제국을 세운 기원전 6세기까지 끌어올린 것이다. 그렇게 '페르시아 제국 건국 2,500주년'을 기념했다. 행사장은 다리우스 1세가 세운 페르세폴리스 폐허였다. 규모는 사상 최대였다. 프랑스 디자이너 잔 라모르가 텐트 인테리어를, 막심 모로(Maxim's de Paris)가 만찬을 맡았다. 60여 개국의 국가원수와 특사가 사막 한복판의 호화 텐트도시에 모였다.

한국에서는 김종필 국무총리가 부인 박영옥 여사와 함께 박정희 대통령 정책특사 자격으로 참석했다. 1971년 10월 11일이었다. 수교 9년 만에 한국 총리가 페르시아의 가장 화려한 자리에 앉았다.

행사 규모는 1970년대 외교사에서 가장 사치스러운 장면 중 하나였다. 이란은 페르세폴리스 폐허 인근 사막에 50여 동의 호화 텐트를 세웠다. 텐트마다 욕실, 에어컨, 은제 식기, 실크 침구가 들어갔다. 프랑스 패션 하우스 랑방이 의전 제복을 맡았다. 파리 막심이 만찬을 맡았다. 캐비어와 송로 거위간, 핑크 샴페인이 다섯 시간 넘게 이어졌다. 외신은 이를 "사상 최장 공식 만찬"으로 보도했다.

참석자 명단은 화려했다. 덴마크·노르웨이·벨기에 왕실, 모로코의 하산 2세, 에티오피아의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 유고슬라비아의 티토, 소련 최고지도부, 미국 부통령 스피로 애그뉴. 그 사이에서 한국의 김종필이 박정희의 친서를 팔라비에게 전달했다.

친서 전문은 공개되지 않았다. 다만 당시 정황으로 보면 한국 측 메시지는 두 갈래였을 것이다. 하나는 양국의 오랜 문명 교류와 우호를 잇자는 의례적 인사, 다른 하나는 안정적 원유 공급과 건설·인프라 협력이라는 실리였다. 1차 오일쇼크가 2년 앞으로 다가온 시점이었다. 박정희 정권이 진짜로 원한 것은 두 번째였다.

김종필은 다리우스 1세가 세운 거대한 기둥들 사이에서 행사를 지켜봤다. 수교 9년 만에 한국 총리가 페르시아 문명의 한복판에 선 장면이었다. 그는 행사를 계기로 한국 건설사의 이란 시장 진출 문제에 관심을 두었던 것으로 전해지며, 그 흐름은 몇 해 뒤 현대건설의 이란 진출로 이어진다.

페르세폴리스 2500주년 텐트도시
페르세폴리스 2,500주년 기념 텐트도시 (1971년 10월) 60여 개국 정상·특사가 페르시아 제국 옛 수도 폐허 위 사막에 모였다. 한국에서는 김종필 국무총리 참석. 사진: 위키미디어 공용
1971년 10월 페르세폴리스의 한국 사절단 — 재현 이미지
1971년 10월 11일, 다리우스 1세 기둥 사이의 한국 사절단 (재현 이미지) 다리우스 1세가 세운 기둥들 사이에 한국 사절단이 섰다. 수교 9년 만에 한국 총리가 페르시아의 가장 화려한 자리에 앉은 그날이다 · AI 재현 이미지(Higgsfield Soul Cinematic, 본지 제작)

훗날 드러난 페르세폴리스 행사의 비용은 추정 1억~2억 달러였다. 이란 정부는 예산의 상당 부분을 한 차례 의례에 쏟아부었다. 역사학자들은 이 행사를 이란 국민의 반발이 본격화한 분기점 중 하나로 꼽는다. 페르세폴리스는 팔라비 왕조의 정점이자 균열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그날 김종필은 그 균열을 보지 못했다. 그는 박정희의 친서를 팔라비에게 전달했다. 두 정권은 그렇게 우방으로 자리매김했다.

— 05 —
20,000 Korean Workers
1975년, 현대건설이 테헤란에 도착했다

한국 노동자 2만 명이 페르시아만의 햇볕 아래서 콘크리트를 부었다.

오일쇼크로 벌어진 빈자리, 그 틈을 한국이 메웠다

위기는 곧 시장이기도 했다. 1차 오일쇼크 이후 중동 산유국이 막대한 페트로달러를 손에 쥐었거든요. 그 돈을 사회 인프라로 옮기려면 길과 항만과 산업단지가 필요했다. 그런데 일본 건설업체는 본국 시장에 묶여 있었다. 미국 업체는 너무 비쌌다. 그 빈자리에 한국이 들어갔다.

1973년, 삼환기업이 사우디아라비아 알울라-카이바 고속도로를 수주하며 한국 건설사의 중동 진출 1호를 기록했다. 곧 다른 회사들이 뒤따랐다.

[※참고: 반다르 아바스는 이란 남부 호르무즈 해협 길목에 자리한 항구 도시다. 페르시아만과 인도양을 잇는 요충지로, 예부터 무역항이자 군항이었다. 'Bandar'는 페르시아어로 항구를 뜻한다.]

이란은 한국에 두 번째 중동 시장이었다. 1975년 1월, 현대건설이 테헤란에 이란 지점을 개설했다. 같은 해 8월, 반다르 아바스의 동원훈련조선소 건설 공사를 수주했다 — 한국 건설사의 첫 이란 공사. 두 달 뒤에는 바레인 아랍수리조선소 공사도 따냈다. 정주영의 현대건설이 페르시아만에서 이름을 만들기 시작한 셈이다.

정주영의 현대건설에게 이란은 사우디 다음의 도전이었다. 사우디 진출이 사막의 도로 공사였다면, 이란 진출은 산악과 항만·조선·정유였다. 더 어렵고 더 큰 일이었다. 1975년 1월의 그 결정이 한국 건설사 이란 진출의 출발점이 됐다.

현장 조건은 혹독했다. 한국 노동자들은 한국 여름의 두 배에 이르는 더위, 굳기도 전에 표면이 갈라지는 콘크리트와 싸우며 현지에 맞는 시공법을 새로 만들어야 했다. 그렇게 1970년대 한국 건설사는 중동에서 가격뿐 아니라 속도로 일본·유럽 업체를 앞지르기 시작했다.

1970년대 한국 건설사의 중동 건설 현장
1970년대 한국 건설사의 중동 건설 현장 (국가기록원 소장·공공누리) 현대건설을 비롯한 한국 기업은 사우디·UAE·이란 등 중동 전역에서 항만·정유·발전 공사를 수주했다. 1975년 현대건설의 이란 반다르 아바스 조선소도 그 흐름의 하나였다 · 사진: 국가기록원

같은 해 1975년, 이란 측은 서울에 주한 이란 대사관을 설치했다. 양국 외교가 대등한 위치에 섰다. 그 대사관 자리는 지금의 한남동, 미군 용산기지에서 한강을 건너 도로 두 정거장 거리. 1979년 혁명 후에도 같은 자리에 그대로 남았다.

20,000

1970년대 이란 건설현장에서 일한 한국인 노동자 수.
그 임금이 외화로 한국에 들어와 한강 변의 아파트와 영동개발을 떠받쳤다.

이것이 한강의 기적이 페르시아의 기름으로 굴러갔다는 말의 실체다. 한국은 이란에서 원유를 들여왔고, 노동자를 보냈고, 건설로 외화를 벌었다. 1970년대 후반 이란은 한국에 단순한 수교국이 아니라 경제 동반자였다.

— 06 —
June 27, 1977
강남에 새겨진 두 글자

두 시장의 악수와 함께, 강남 한복판은 '테헤란'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강남 한복판이 어쩌다 '테헤란'이라는 이름을 얻었을까. 출발점은 1977년 6월이다. 이란 테헤란 시장 골람레자 닉페이(Gholamreza Nikpey)가 서울을 찾았거든요. 공식 방문 목적은 서울특별시와의 자매도시 협약 체결이었다.

1977년 6월 17일, 서울시와 테헤란시는 정식 자매결연을 체결했다. 결연식 자리에서 닉페이는 구자춘 서울시장에게 제안 하나를 했다. "양국 수도의 이름을 도로명으로 교환합시다." 구자춘은 동의했다.

열흘 뒤인 1977년 6월 27일, 서울시는 강남의 옛 '삼릉로' 현장에서 도로명 교환 기념 표지석 제막식을 열었다. 표지석에는 한국어와 페르시아어로 도로명 교환 사실을 새겼다. 이어 7월 1일자 공고로 기존 삼릉로 명칭을 폐지하고 동일 구간(약 3,200미터)에 '테헤란로'라는 이름을 공식 부여했다.

강남 테헤란로 표지석
강남 테헤란로 표지석 — 1977년 6월 27일 제막 서울·테헤란 자매도시 결연을 기념해 옛 삼릉로 자리에 세워졌다. 한 면엔 한국어, 반대 면엔 페르시아어로 같은 문장이 새겨져 있다. 49년째 같은 자리를 지킨다 · 사진: 위키미디어 공용

같은 해 11월 28일, 이란 테헤란도 '서울로(Seoul-ro)'라는 이름을 붙였다. 1979년 혁명 이후 새 정권이 친팔라비 시기의 흔적을 지울 때도, 이 도로명만은 남겼다.

강남 테헤란로 표지석
서울 강남 테헤란로 표지석 1977년 6월 27일 제막 · 한국어와 페르시아어 양국 언어로 도로명 교환 사실 표기 · 사진: 위키미디어 공용
수교 15년 만에,
한국과 이란은
서로의 수도에 서로의 이름을 새겼다.
— 1977년 6월 27일, 강남에서
— Epilogue —
January 16 / October 26
1979년 — 우방이 떠난 해

1977년 6월의 그 여름이 절정이었다.

그 절정은 얼마나 짧았을까. 1년 7개월이었다. 1979년 1월 16일,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가 가족과 함께 테헤란을 떠나 이집트로 망명했다. 1925년 레자 샤가 연 팔라비 왕조가 54년 만에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2주 뒤인 2월 1일엔 망명 중이던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파리에서 테헤란으로 돌아왔다. 이슬람 공화국의 시작이었다.

테헤란로의 이름은 살아남았다. 그러나 그 이름이 가리키던 우방은 사라졌다.

그해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궁정동 안가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쓰러졌다. 박정희와 팔라비 — 단 한 번도 만나지 않았던 두 사람이, 1979년 한 해 안에 같은 무대에서 동시에 사라졌다.

표 · 연표박정희와 팔라비, 17년의 동행
  1. 1962년 10월 23일
    한·이란 공식 외교관계 수립. 한국이 1962년 수교한 페르시아만 핵심 우방.
  2. 1964년 8월
    KOTRA 테헤란 사무소 개설. 한국 무역 외교의 첫 중동 거점.
  3. 1967년 4월
    주이란 한국대사관 정식 개설.
  4. 1971년 10월 11일
    김종필 국무총리 페르세폴리스 방문. 박정희 대통령 정책특사로 페르시아 제국 건국 2,500주년 축전 참석.
  5. 1973년 10월 6일
    제4차 중동전쟁 발발. 1차 오일쇼크 시작. 한국이 받은 충격은 거셌으나, 이란은 한국에 5% 감산 면제 적용.
  6. 1975년 1월
    현대건설 이란 지점 개설. 8월 반다르 아바스 동원훈련조선소 수주 — 한국 건설사의 첫 이란 공사.
  7. 1975년
    이란 측, 서울에 주한 이란 대사관 개설. 양국 외교 대등 자리.
  8. 1977년 6월 17일
    서울시-테헤란시 자매도시 협약 체결. 골람레자 닉페이 테헤란 시장 방한, 구자춘 서울시장과 회동.
  9. 1977년 6월 27일
    강남 '테헤란로' 표지석 제막식. 옛 삼릉로 → 테헤란로. 한국어·페르시아어 양국 언어 명기.
  10. 1977년 7월 1일
    서울시, 삼릉로 명칭 폐지 + 동일 구간(약 3,200미터)에 '테헤란로' 공식 공고. 행정 절차 완료.
  11. 1977년 11월 28일
    이란 테헤란에 '서울로(Seoul-ro)' 설치. 1977년의 우정 정점.
  12. 1979년 1월 16일
    팔라비 가족 이집트로 망명. 54년간 이어진 팔라비 왕조 사실상 종언.
  13. 1979년 2월 1일
    아야톨라 호메이니, 파리에서 테헤란 귀국. 4월 1일 이란 이슬람 공화국 공식 선포.
  14.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궁정동에서 김재규 총탄에 사망. 한 해 안에 두 정권 모두 종언. 17년의 동행 종료.

수교 17년이 그렇게 마감됐다. 한국은 1979년 이란 정권 교체 직후에도 단교하지 않았다. 다음 단계는 3부 〈혁명 이후 모순의 39년(1979-2018)〉에서 다룬다.

참고자료

1차 자료

보조 자료

사진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