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가 1년 만에 4배로 뛴 그해, 이란만 한국에 기름을 끊지 않았다
1973년 가을, 한국 경제가 1년 만에 무너진 걸 아시나요? 시작은 그해 10월 6일이었다. 이집트와 시리아가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했거든요. 제4차 중동전쟁이었다.
10일 뒤인 10월 16일, 사우디아라비아·이란 등 페르시아만 산유국이 원유 공시가격을 움직였다. 배럴당 3.01달러에서 5.12달러로 올리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다음 날엔 아랍석유수출국기구(OAPEC)가 한 발 더 나갔다. 이스라엘 후원국을 겨냥해 석유 금수와 단계적 감산을 결정한 것이다. 1차 오일쇼크였다. 세계 경제는 한 분기 만에 흔들렸다.
[※참고: OAPEC(아랍석유수출국기구)는 1968년 결성된 아랍 산유국 간 석유 협력 기구다. 1973년 이스라엘 후원국을 겨냥해 석유 금수 조치를 단행하면서, 석유가 외교적 무기로도 쓰일 수 있음을 보여줬다. 산유량으로 가격을 조정하는 OPEC과는 성격이 다른 기구다.]
한국은 직격탄을 맞았다.
자료: 한국은행 경제통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석유파동〉.
얼마나 추락했을까. 성장률이 1973년 14.9%에서 1974년 2.3%로 내려앉았다. 1년 만에 12.6%포인트가 날아간 셈이다. 물가는 거꾸로 뛰었다. 1974년 물가상승률이 24.8%, 전년 3.5%의 7배였다. 유가가 모든 걸 끌어올린 결과다. 1974년 7월 OPEC 사우디 기본유종 가격은 배럴당 11.65달러, 1973년 10월의 약 4배였거든요.
그런데 그 한복판에서 한국은 한 가지 사실을 확인했다. 중동 산유국 중 이란만 한국으로의 원유 공급을 끊지 않았다. OAPEC가 친미 국가에 요구한 5% 감산 명단에서도 한국은 빠졌다.
왜 한국만 비껴갔을까. 11년 전에 미리 손을 잡아둔 덕이다. 한국은 1962년 10월 23일 이란과 수교했다. 한국이 1962년 수교한 페르시아만의 핵심 우방이었다. 1973년 오일쇼크는 그 선택의 값어치를 직접 확인시킨 시점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