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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03 / 3부 · 혁명 이후 모순의 30년

신정국가가
한국의
친구였던 시절이 있다

THEOCRACY × FRIENDSHIP · 1979 — 2018

Operation Epic Fury 첫날 하메네이가 사망한 그 정권이,
1979년부터 39년간 한국의 친구였다.

약 13분 분량 · 5,500자 한·이란 교역액 라인 차트 + 제재 vs 한국 대응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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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회 한 줄 —

Operation Epic Fury 첫날 사망한 그 정권이
한국의 39년 친구였다.

Operation Epic Fury 첫날 새벽 알리 하메네이가 표적 폭격으로 사망했다. 그는 1989년부터 37년간 이란을 통치했다. 이란 신정 체제는 1979년 혁명 이후부터 2018년 트럼프의 JCPOA 탈퇴까지 한국의 외교 파트너였다. 미국이 1980년 단교했을 때 한국은 관계를 유지했다. 1995년 한국이 테헤란로 명칭 변경을 검토하자 이란 외교가 반대 의사를 전했고, 한국은 결정을 보류했다. UN 제재 시기 한국은 이란 중앙은행에 원화 결제 계좌를 허용했다. 이 39년은 한국 외교가 미국 입장과 거리를 두고 독자 판단을 행사한 마지막 시기에 해당한다. 3부는 그 39년의 모순을 다룬다.

— 01 —
December 1995
테헤란로를 지킨 한 달

한국이 그 거리 이름을 바꾸려 했을 때, 이란이 막아냈다.

강남 한복판 '테헤란로'를 바꾸자는 청원

강남 한복판에 왜 외국 도시 이름이 붙어 있을까. 1995년에 누군가 이 질문을 진지하게 던졌거든요. 그해 11월, 한국은 '수출 1,000억 달러 달성'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한국무역협회와 강남 일대 상인들이 요구 하나를 들고 나왔다. "강남 한복판 '테헤란로'를 '무역의 거리'로 바꾸자." 무역·금융의 중심지에 외국 도시 이름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논리였다.

서울시도 일부 호응했다. 강남이 한국 경제의 상징으로 떠오르던 시기다. 그 거리를 한국의 새 정체성으로 다시 부르자는 발상은 1995년의 분위기와 잘 맞았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거리 이름 하나에 외국 정부가 끼어든 것이다.

이란이 반발했다.

1995년 12월 15일, 주한 이란대사가 광화문 이홍구 국무총리 집무실을 찾았다. 메시지는 단호했다. "테헤란로와 서울로는 1977년 양국 합의로 만들어진 상징이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폐기할 수 없다." 외무부는 그날 즉시 서울시에 명칭 유지를 요청하는 공문을 발송했다. 한국 정부는 한 달 만에 '개명 불가'를 공식 입장으로 정했다.

[※참고: 루사리·히잡은 무슬림 여성이 머리카락을 가리는 가리개를 뜻한다. 히잡은 가리개를 통칭하고, 루사리는 그중 머리에 둘러 목 위만 덮는 스카프형이다. 이란은 신정 체제 수립 이후 여성의 머리 가리개 착용을 법으로 의무화해 왔다.]

이란이 꺼낸 카드는 무엇이었을까. 외교부가 2026년 이 문서의 기밀을 해제하면서 그날 면담의 장면이 처음 공개됐다. 주한 이란대사는 이홍구 총리에게 두 장의 카드를 꺼냈다. 첫째, 정치 카드다. "테헤란의 서울로는 1979년 혁명 이후 친팔라비 시기의 흔적이 지워질 때도 우리가 지켜낸 이름이다." 둘째, 경제 카드다. "이란은 한국 원유 수입의 14.4%를 공급한다. 이 관계는 도로명 하나로 측정되지 않는다." 사료의 메모지 한쪽에는 이홍구 총리의 친필로 보이는 다섯 글자가 있다. "철회 즉시 보고."

1995년 외교부 책상 — 철회 즉시 보고 메모 (재현 이미지)
1995년 12월 15일, 외교부 책상 위 — "철회 즉시 보고" (재현 이미지) 주한 이란대사의 면담 직후 작성된 메모. 한·페르시아 외교 각서 위에 한국 총리의 친필 다섯 글자가 적혔다. 이 메모 한 장이 한국 정부의 입장을 한 달 만에 뒤집었다 · AI 재현 이미지(Higgsfield Soul Cinematic, 본지 제작)

결정은 얼마나 빨랐을까. 서울시도 그날 안에 입장을 정리했다. 한국무역협회는 12월 18일 임시 이사회를 열어 '무역의 거리' 개명 추진을 보류했다. 강남 상인의 청원도 잠잠해졌다. 11월에 시작한 논의가 12월에 멈췄다. 정확히 한 달이었다. 한국 정부가 신정 국가 이란의 외교적 압박을 받고 자국 도로명 결정을 뒤집은 셈이다. 1990년대 외교에서 보기 드문 장면이었다.

그 신정 국가가,
한국의 친구였다.
— 1995년, 사우디 다음 제2 원유 공급국
— 02 —
Revolution, But No Break
혁명, 그러나 단교는 없었다

미국이 이란과 등을 돌렸을 때, 한국은 어떻게 했을까. 1979년 2월 1일, 망명 중이던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파리에서 테헤란으로 귀국했다. 열흘 뒤 팔라비 왕조는 완전히 무너졌고, 4월 1일 이란은 이슬람 공화국을 공식 선포했다.

[※참고: 신정국가는 종교 지도자와 종교법이 국가 권력의 정점에 서는 체제를 말한다. 이란은 1979년 혁명 뒤 최고지도자가 대통령보다 윗자리에 서는 이슬람 공화국이 됐고, 성직자가 국정을 최종 결정한다.]

같은 해 11월 4일, 테헤란의 학생들이 미국 대사관을 점거했다. 444일에 걸친 인질극은 미-이란 관계의 종언이었다. 카터 행정부는 1980년 4월 대(對)이란 외교를 단절했다.

한국은 단교하지 않았다.

한국 외교부는 호메이니 체제의 외교적 인정을 유지했다. 1980년에도 주이란 한국대사관은 운영을 계속했고, 이란 측 주한 대사관도 문을 닫지 않았다. 양국은 외교 관계를 끊지 않은 채 새로운 정권에 적응한 셈이다.

왜 끊지 않았을까. 배경은 단순하다. 첫째, 한국은 이란이 '미국의 적'이라는 이유로 이란을 자국의 적으로 분류할 정치적 여유가 없었다. 1970년대 후반 이란에는 한국 노동자 약 2만여 명이 일하고 있었거든요. 둘째, 이란은 한국의 핵심 원유 공급국이었다. 셋째, 이슬람 공화국 측도 한국과의 관계를 깨려 하지 않았다.

호메이니 1979 파리 기자회견
아야톨라 호메이니, 1979년 1월 파리 근교 노플르 르 샤토 기자회견 2주 뒤 그는 테헤란으로 귀국, 팔라비 왕조를 무너뜨렸다 · 사진: 위키미디어 공용
— 03 —
Casualties of an Eight-Year War
이란-이라크 전쟁의 한국인 (1980-1988)

8년짜리 전쟁이 한국에 남긴 흔적은 무엇이었을까. 1980년 9월 22일, 이라크 사담 후세인이 이란을 침공했다. 8년간의 전쟁이 시작됐다.

전쟁은 한국에도 영향을 미쳤다. 바다에서, 그리고 건설 현장에서다.

1988년 캉간 가스 정유소 공습 직후 — 재현 이미지
1988년 7월, 캉간(Kangan) 대림산업 건설 현장 (재현 이미지) 뒤틀린 철근 너머 지평선의 가스 화염. 이라크 공습으로 한국인 13명이 사망한 그날의 아침이다 · AI 재현 이미지(Higgsfield Soul Cinematic, 본지 제작)
이란-이라크 전쟁 발발일 메흐라바드 공습
이란-이라크 전쟁 발발일, 1980년 9월 22일 이라크군 공습 직후 테헤란 메흐라바드 공항 · 같은 공항에 36년 뒤(2016년) 박근혜 대통령이 한국 대통령 최초로 도착하게 된다 · 사진: 위키미디어 공용 (CC BY-SA 4.0)

남들 다 떠난 현장에 남은 한국 건설사

한국은 그 위험한 현장을 버렸을까. 그러지 않았다. 다른 외국 건설사들이 줄지어 철수하는 와중에도, 한국 건설사들은 현장에 남아 공사를 마무리했다. 이란 지도부는 그 사실을 기억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이란은 한국 기업과의 거래를 우선적으로 이어갔다.

다만 공식 외교 수준은 한 단계 내려갔다. 1981년부터 1989년까지 8년 동안 한·이란 외교관계는 대사급에서 대리대사급으로 격하됐다.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이란 신정 체제의 외교 인력 부족이다. 둘째, 북한이 이란에 무기를 지원하고 있었다. 이란은 중국과 북한제 스커드를 도입했다. 그 대가로 북한에 스커드 잔해를 넘겨 스커드 C형 개발의 기반을 만들어준 셈이다. 평양-테헤란 군사 협력이 1980년대 한반도 안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래도 단교는 끝까지 없었다. 1989년 이란-이라크전이 종전된 직후, 양국은 외교관계를 대사급으로 다시 격상했다. 전후 복구에 한국 건설사들이 본격 참여하기 시작했다.

— 04 —
The Petrodollar Golden Age
가전과 자동차의 페트로달러 황금기 (1990s-2000s)

이란인이 가장 먼저 익힌 한국어는 'LG'와 'Samsung'이었다.

이란 사람이 가장 먼저 외운 한국어는 뭐였을까. 'LG'와 'Samsung'이었다. 1990년대는 한국 기업의 이란 황금기였거든요.

LG전자(당시 금성사)와 삼성전자가 이란 가전 시장을 사실상 장악했다. 텔레비전·냉장고·세탁기에서 한국 브랜드가 일본 브랜드(소니, 산요)를 빠르게 밀어냈다. 이란인들이 가장 먼저 익힌 한국어 단어는 'LG'와 'Samsung'이었다는 농담이 외교가에서 돌 정도였다.

현대자동차도 1990년대 후반 이란 시장에 본격 진출했다. 이란의 도로에서 가장 흔히 보이는 외국 차가 현대 엑센트, 쏘나타였던 시절이 한동안 이어졌다.

차트 1 · 통계
한·이란 양국 교역액 추이 — 1995년 15억 달러에서 2011년 174억 달러까지
0 50 100 150 174 200 교역액 (억 달러) ▲ 174억 달러 2011년 사상 최대 원화 결제 시스템 + 콘덴세이트 황금기 15 테헤란로 개명 위기 94 박근혜 국빈방문 37 ▼ 트럼프 JCPOA 탈퇴 1995 2000 2005 2011 2015 2016 2018 연도

자료: 한국무역협회 K-stat. 양국 교역은 2011년 174억 달러로 정점 → 2018년 트럼프 JCPOA 탈퇴 후 추락.

교역액은 어디까지 올랐을까. 1995년 15억 달러로 출발한 양국 교역은 2011년 174억 달러로 정점을 찍었다. 16년 만에 약 12배다. 한국이 가져온 것은 가전·자동차·기계류였고, 한국이 가져간 것은 원유·천연가스·석유화학 원료였다. 양국의 산업 구조가 거의 정확히 보완 관계였던 셈이다. 30년 넘게 쌓은 외교가 경제의 깊이로 바뀌던 시기였다.

— 05 —
The Won-Account Workaround
원화 계좌의 시작 — 2010년 제재와 한국의 우회로

제재가 조여 오는데 원유는 끊을 수 없다면, 어떻게 할까. 2000년대 중반부터 이란 핵 프로그램은 국제 사회의 쟁점으로 떠올랐다. 부시 행정부는 2002년 이란을 '악의 축'으로 분류했고, 유엔 안보리는 2006년부터 단계적 제재 결의를 채택하기 시작했다.

분기점은 2010년 6월 유엔 안보리 결의 1929호였다. 국제사회는 이전의 부분 제재보다 훨씬 광범위한 금융·무역 제재를 부과했다. 한국은 결의를 준수해야 했다. 그러나 동시에 이란산 원유를 끊을 수도 없었다.

해법은 우회로였다.

[※참고: 원화결제계좌는 이란 중앙은행이 한국 시중은행에 원화로 트는 계좌다. 달러를 거치지 않고 원화로 원유 대금을 주고받아 미국의 달러 결제망 제재를 피하는 구조다. 결제가 한국 안에서만 돌기에 양국만 굴릴 수 있었다.]

2010년, 이란 중앙은행이 한국 IBK기업은행과 우리은행에 원화 계좌를 열었다. 한국 정유사는 이란산 원유 대금을 달러가 아닌 원화로 이 계좌에 넣었다. 이란은 그 원화로 한국 기업의 가전, 자동차, 의료기기, 산업장비를 사들였다. 원화 결제 시스템이다. 양국만이 굴린 비공식 무역 메커니즘이었다.

2010년 IBK기업은행 원화 결제 서류 — 재현 이미지
2010년 IBK기업은행 창구 — 이란 중앙은행 원화 결제 서류 (재현 이미지)한글과 페르시아어가 함께 찍힌 결제 명세. 한국 원화로만 작동한 9년짜리 비공식 무역 메커니즘이 이 한 묶음 안에 있었다 · AI 재현 이미지(Higgsfield Soul Cinematic, 본지 제작)

[※참고: 콘덴세이트는 천연가스에 섞여 나오는 초경질 원유다. 일반 원유보다 가벼워 나프타 같은 석유화학 기초 원료를 뽑아내기 좋고, 이란산은 한국 석유화학 산업의 핵심 공급원이었다.]

이 우회로는 얼마나 깊었을까. 이 메커니즘 위에서 한국 정유사는 이란산 콘덴세이트(초경질유)를 대규모로 수입했다. 2012년 SK이노베이션은 하루 13만 배럴, 현대오일뱅크는 7만 배럴의 이란산 원유를 들여왔다. 콘덴세이트는 한국 석유화학 산업의 핵심 원료였고, 이란산은 카타르산보다 배럴당 약 2.5달러 쌌다. 2016년에는 한국이 수입한 콘덴세이트 전체의 54%가 이란산이었다. 절반을 넘긴 셈이다. 이란은 제재 속에서도 한국에 원유를 팔았고, 한국은 비싼 값을 피해 산업을 돌렸다. 미국도 이 구조를 묵인했다. 다만 그 우회로는 한 사람의 결정에 모든 무게를 걸어 두고 있었다. 미국 대통령의 결정이었다.

표 1 · 정책 비교국제사회의 이란 제재와 한국의 대응 (2006 — 2018)
연도국제사회 조치한국의 대응
2002부시 '악의 축' 연설 — 이란 포함외교관계 그대로 유지, 무역 지속
2006-2008UN 안보리 결의 1696·1737·1747·1803호UN 결의 준수, 그러나 양자 무역은 유지
2010.6UN 안보리 결의 1929호 — 광범위한 금융·무역 제재이란 중앙은행, IBK기업·우리은행에 원화 계좌 개설. 원유 대금 원화 결제 시스템 가동
2012-2013미국 NDAA 발효, 對이란 SWIFT 단절SK이노 13만/일, 현대오일뱅크 7만/일 수입 지속. 미국 예외 인정
2015.7JCPOA 체결 (P5+1 + 이란). 단계적 제재 해제'제2의 중동 붐' 기획. 콘덴세이트 54% 점유
2016.5JCPOA 이행기간박근혜 이란 국빈방문 (5.1-3). 236명 경제사절단
2018.5.8트럼프 JCPOA 일방 탈퇴. 미국 제재 단계적 복원한국 정부 침묵. 정유사·은행권 즉시 대응 검토

자료: UN 안보리 결의문, 미국 재무부 OFAC, 외교부 보도자료.

이란은 제재 속에서도 한국에 원유를 팔 수 있었고, 한국은 비싼 가격을 피해 산업을 돌릴 수 있었다. 미국도 이 구조를 묵인했다. 그러나 이 우회로는 한 사람의 결정에 모든 무게를 걸어두고 있었다 — 미국 대통령의 결정.

— 06 —
Park's Hijab · May 2016
박근혜의 히잡 — 54년 만의 정상회담

제재가 풀리면 한국엔 무엇이 열렸을까. 2015년 7월 14일, 빈에서 P5+1(미·영·프·러·중·독)과 이란이 핵 합의(JCPOA)에 서명했다. 이란이 핵 프로그램을 제한하는 대가로 국제 사회의 제재를 단계적으로 해제하는 협정이었다. 오바마 행정부의 외교적 성취였다.

[※참고: JCPOA(포괄적공동행동계획)는 2015년 이란과 P5+1이 맺은 핵 합의다. 이란이 우라늄 농축 등 핵 활동을 제한하고 사찰을 받는 대신, 국제사회가 대(對)이란 경제·금융 제재를 단계적으로 풀어 주는 거래였다.]

한국은 다시 황금의 시간을 맞았다.

2016년 5월 1일, 박근혜 대통령이 테헤란 메흐라바드 공항에 내렸다. 1962년 한-이란 수교 이후 54년 만의 첫 한국 대통령 이란 국빈 방문이었다. 박 대통령은 흰색 루사리(이슬람 두건의 한 종류, 히잡)를 착용하고 전용기에서 내렸다.

박근혜 대통령 이란 방문
박근혜 대통령, 2016년 5월 1일 테헤란 메흐라바드 공항 도착 1962년 수교 이후 54년 만의 첫 한국 대통령 이란 국빈방문 · 흰색 루사리(히잡) 착용 · 사진: 위키미디어 공용

236명, 30건, 456억 달러의 하루

누가 함께 갔을까. 방문단의 규모는 역대 최대 — 236명의 경제사절단이 동행했다. 한국 정부와 재계가 한꺼번에 테헤란으로 옮겨간 셈이다.

박 대통령은 권력 서열 1위인 알리 하메네이(Ali Khamenei) 최고지도자를 면담하고, 권력 서열 2위 하산 로하니(Hassan Rouhani) 대통령과 1시간 15분 동안 정상회담을 열었다. 한국은 '제2의 중동 붐'을 기대했다.

손에 쥔 결과는 무엇이었을까. 구체적이었다. 양국은 정상회담 직후 공동성명에 30건의 양해각서(MOU), 추정 사업 규모 456억 달러를 담았다. 항만 개발, 사우스파스 가스전, 차바하르 항만, 보건·의료, 문화·관광, 자동차 부품, 가전, 건설장비 수출 협약이 붙었다. KOTRA는 실제 계약으로 넘어간 비중을 약 4분의 1로 봤다.

정상회담장의 분위기를 전한 외교부 출입기자들의 보도에 따르면, 로하니는 회담을 시작하며 한국어로 "안녕하십니까"를 시도했고, 박근혜는 회담 마지막에 페르시아어로 "감사합니다(메르시·متشکرم)"를 답했다. 1979년 혁명에도 단교하지 않고 37년을 이어온 두 나라가 처음 정상 대 정상으로 마주 앉은 자리 — 1977년 두 시장의 악수 이후 가장 가까웠던 한·이란 외교 거리였다.

방문 마지막 날인 5월 3일, 박근혜는 테헤란시 시청을 방문했다. 강남 테헤란로의 자매도시 협약을 명시적으로 언급한 자리였다. 시청 입구에서 '서울로' 명패를 직접 확인한 그는 짧은 말을 남겼다. "1977년 두 시장이 약속한 거리가 39년이 지난 그날도 같은 자리에 있다." 그 한 줄이 두 도시의 이름 교환을 양국 정부 차원의 외교 의제로 다시 끌어올렸다.

이 방문은 1962년 수교의 정점이자 1977년 테헤란로 명명의 의례적 회수이기도 했다. 54년의 관계는 처음으로 '국가 최고지도자 간의 만남'이라는 정상 외교의 모습을 갖췄다.

2016년 5월의 그 순간이
54년 우정의 정점이었다.
그러나 다음 2년이 남아 있었다.
— 2018년 5월 8일을 향해
— Epilogue —
The Paper Was Torn
2018년 5월, 종이가 찢어졌다

정점은 얼마나 오래 갔을까. 박근혜가 메흐라바드에 내린 지 2년 뒤다.

2018년 5월 8일.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백악관 외교실에서 JCPOA 탈퇴를 공식 선언했다. 카메라 앞에서 그는 합의문을 들어 보이며 "끔찍한 합의"라 불렀고, 미국이 이란을 향해 풀어줬던 모든 제재를 90~180일 안에 다시 가동한다고 밝혔다.

한국에 그 결정은 곧 하나를 의미했다 — 원화 결제 시스템의 종말.

무너지는 데는 얼마나 걸렸을까. 미국은 이듬해 한국 등 주요 수입국에 인정했던 이란산 원유 수입 예외를 모두 종료했다. 미국 재무부는 이란 중앙은행을 테러 지원 기관으로 추가 지정했다. 그해 말, 한국의 우리은행과 IBK기업은행은 이란 중앙은행 원화 계좌의 결제를 중단했다. 그 시점에 계좌에 남아 있던 약 70억 달러는 미국 제재에 묶였다.

39년 만에 한-이란의 우정이 처음으로 멈춘 순간이다. 1979년 혁명에도 버틴 관계를 미국 대통령의 한 결정이 끊은 셈이다.

다음 회는 그 동결 이후의 시간 — 12일 전쟁과 Operation Epic Fury로 이어진 현재형 이야기다. 39년 우방은 오늘 폐허로 변했다.

참고자료

1차 자료

보조 자료

사진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