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노동자는 우리의 삶 속에 녹아 있다
오늘날에는 역사상 유례없이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전 세계 곳곳에서 일하고 있다. 국제 노동력 이동은 1980년대 이후 사상 유례없이 부쩍 활성화되었다. 1980년대에 전 세계적으로 국제 노동력 이동이 활성화 된 것은 극소전자공학(microelectronics)과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에 따라 자본주의의 전지구화 경향이 한층 더 강화된 데 원인이 있다. 1989년을 분기점으로 하는 사회주의 블록의 해체와 자본주의 세계경제권으로의 편입은 자본주의 세계체계의 역동성과 전 지구적 성격을 더욱 강화시켰다. 냉전체제의 붕괴 이후 사회주의 국가들도 노동력 송출국의 대열에 합류하였다. 예컨대, 중국과 베트남은 자국인의 이출(emigration) 억제 정책을 포기하고, 오히려 해외 취업을 권장하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그 결과 국제 노동력 이동의 규모와 밀도는 과거의 경험과는 전혀 다른 차원을 형성하고 있다. 심지어는 현대사회를 일컬어 이주의 시대(age of migration)라고 할 정도다. 국제이주기구(IOM)의 추계에 의하면, 2000년을 기준으로 일하거나, 공부하거나, 가족과 함께 지내거나, 박해와 폭력을 피하기 위하여 다른 나라에서 생활하는 사람과 그 가족의 수는 세계 인구의 2%인 1억5천만 명에 달한다. 그런데 이 수치는 영구적 혹은 일시적 불법체류자는 포함되지 않은 것이다.
국제노동력이동이 이루어진 배경에는, 세계 자본주의의 전개와 그로 인한 각국 사회의 불균등 발전, 보다 나은 삶의 기회를 찾으려는 개인의 선택, 이주노동자를 보낸 사회와 받아들인 사회의 대응 등의 요인이 작용하고 있다. 이 여러 가지 요인들이 상호 작용함으로써 오늘날의 외국인 노동자 문제가 구체화되고 있는 것이다.
1. 국제 노동력 이동의 역사
‘국제 노동력 이동’이라는 말에는 ‘국적’과 ‘노동자’라는 두 개념이 녹아 있다. 국제 노동력 이동이라는 개념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국가권력의 국경 통제가 이루어져야 하고, 또 동시에 ‘노동력’이 상품으로 판매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국제 노동력 이동의 역사는 16세기 자본주의 세계체계의 형성과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자본주의 최초의 국제 노동력 이동은 노예무역이라는 강제적 형태를 띠었다. 노예무역은 노예라고 하는 인간의 노동력을 아프리카로부터 남·북 아메리카의 플랜테이션과 광산으로 대량 이동시킨 것이다. 도예제가 폐지된 이후, 신대륙 자본은 아프리카인 대신 인도인과 중국인 쿨리(coolie)를 수입하였다. 쿨리는 고용주가 부담한 자신의 이동비용과 몸값을 상환하기 위하여 계약노동을 해야 했던 ‘부자유 채무노동자’였다. 노예와 쿨리는 현대에도 만연하고 있는, 이주노동자에 대한 여러 가지 차별대우가 응집된 원형적 형태로 평가할 수 있다.
19세기는 이민의 시대였다. 수백만 명의 유럽인들이 신대륙으로 이주하여 원주민을 학살하거나 내쫓고 그곳을 백인의 땅으로 만들었다. 이민자들은 자유로운 시민으로 정착하였다. 신대륙의 지배계급이 된 백인들은 1880년대 들어 중국인 쿨리가 정착하면서 그 수가 느는 데 경악하였다. 그들은 힘들여 백화(白化)한 땅이 순식간에 노랗게 물드는 황화(黃禍, yellow peril)를 막으려 하였다. 황화론은 그 당시 출현한 인종주의의 반영이었다. 황화론의 확산에 따라 여러 나라는 유색인종의 이민을 봉쇄하기 시작하였다.
‘이주노동자’ 제도는 이민의 시대가 종료된 후 출현하였다. 20세기 들어 국제 노동력 이동의 주요 형태는 ‘외국인에게 국적을 제공하지 않고 노동력만 이용하는’ 이주노동자 제도로 정착되었다. 이민자는 이주한 나라의 국민이 되어 영주하는 것을 보장받는 데 반해, 이주노동자는 ‘외국인으로서 일정 기간 일한 후 본국으로 귀국’하는 것을 조건으로 한다. 1880년대 독일이 폴란드 농민들을 계절노동자로 수입하였을 때 이러한 조건을 처음 달았다. 1960년대 독일로 일하러 간 한국인 광원과 간호사, 1970년대 중동 산유국으로 갔던 한국인 건설노동자들이 이주노동자다. 1987년 이후 한국에 와서 일하고 있는 외국인들 역시 이주노동자다.
수백 년에 걸쳐 이루어진 국제 노동력 이동은 지구 곳곳에 그 흔적을 남겨놓았다. 예컨대, 미국의 흑인은 아프리카 출신 노예의 후손이고, 세계 곳곳에 있는 차이나타운은 19세기 중국 광동성 출신 쿨리의 이주 이후 형성되었으며, 독일에 거주하는 수백만 명의 터키 사람들은 1950~1970년대에 이주한 노동자 또는 그 가족들이다.
2. 신국제분업과 이주노동자
자본주의 전 지구 경제체계가 확립된 이후,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은 생산기지를 저개발국으로 이전함으로써 외국 인력의 자국 내 유입을 봉쇄하려는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 초국적기업의 경제활동 증대에 따라, 각국 경제의 국경이 허물어지고 상호작용이 증가하는 전 지구적 생산체계가 구축되었다. 미국을 비롯한 선진공업국은 외국으로부터 신규 이민을 받아들이는 규모를 줄이고, 공장을 해외에 설립하였다. 저개발국과 선진국 간에 형성되었던 농공 분업은 자본의 국제화에 의하여 새로운 형태로 재편되었다. 과거 원재료 생산기지의 역할을 수행했던 저개발국은 중심부 자본의 진출로 세계의 공장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저개발국의 민중들은 노동자로서 자본주의 세계체계의 한 구성원으로 편입되었다.
동시에 초국적기업은 직원을 전 세계에서 충원하고 있다. 선진국 정부는 초국적기업이 외국인 전문기술자를 영입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대부분의 국가는 자국 경제에 도움이 되는 외국인에게 출입국이 자유로운 사증(visa)을 발급해준다. 외국인 전문기술자를 유치하기 위해 시민권을 즉시 부여하는 나라도 있다. 그 결과 출신국보다는 자신이 속한 기업에 우선적으로 정체성을 부여하는 ‘초국적 전문기술자’ 또는 ‘초국적 경영자층’이 새로운 사회계급으로 형성되고 있다.
선진국 정부가 모든 외국인을 그렇게 대하는 것은 아니다. 선진국 정부는 전문기술직 종사자는 환영하여 자국민에 준하는 대우를 해주지만, 생산기능직 종사자는 일정 기간 사용한 후 폐기하는 일회용품으로 간주하고 있다. 말하자면, 선진국은 생산기능직 외국인 노동자도 받아들이지만, 매우 까다로운 조건을 붙여서 그들을 선별하고 또 단기간만 체류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북미자유무역협정(North America Free Trade Agreement, NAFTA)의 핵심은 자유무역이라기보다는 ‘국제 노동력 이동의 봉쇄’와 ‘관세 철폐’에 있다. 미국과 캐나다의 기업들이 조직노동의 저항을 피하면서 싼 임금을 찾아 멕시코 마킬라도라(Maquiladora) 지역으로 공장을 옮기더라도 관세를 부과하지 않겠다는 것이며, 멕시코 노동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함으로써 리오그란데(Rio Grande) 강을 건너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즉, 리오그란데 강은 두 개의 상이한 노동시장의 경계선과 정확히 일치한다. 한마디로 말해, 선진국 정부는 전문기술자를 제외한 외국인의 이민을 강력히 규제하고 있다.
개인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이민의 기회가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분배되지 않음을 뜻한다. 전 지구적 자본주의하에서 국민국가들은 ‘우수한 시민’을 유치하기 위하여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다. 기업이나 사회가 필요로 하는 자질이나 자격을 가진 외국의 전문기술자는 희소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대다수의 이민 희망자들은 자기 사회를 이탈하기를 원하나 그렇게 하기 쉽지 않다.
사람들이 자신이 살던 터전을 떠나 뿌리 뽑힌 삶을 선택하는 요인은 지금 살고 있는 곳이 싫은 경우도 있고, 이주대상지가 제공하는 매력에 끌리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은 이 두 가지 요인이 상호작용하고 있다. 그렇지만 근본 원인은 배출요인(push factor)에 있다. 빈곤과 실업에 찌든 저개발국의 젊은이들이 외부세계에서의 삶을 꿈꾸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국제 자본 투자에 의하여 만들어진 ‘사회적 연결구조’를 통로로 이용하여 선진국 사회로 스며들고 있다. 선진국 정부의 규제가 심한 경우, 그들은 불법적 통로를 이용해서라도 해외 취업을 감행하고 있다. 수많은 멕시코 인들이 리오그란데 강을 건너 미국으로 몰래 숨어들고 있다. 또 재중동포와 외국인들이 국내로 밀입국을 기도하고 있으며, 합법적으로 입국한 외국인들이 사증에 정해진 체류기간을 초과하여 국내에서 일하고 있다. 그 결과, 역설적이게도 수많은 불법체류자들이 일하고 있는 세계 각국의 주요 도시를 ‘세계도시(global city)’라 일컫게 되었다.
요컨대, 선진공업국의 해외 투자가 국제 노동력 이동을 완전히 대체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국제 자본 이동은 새로운 국제 노동력 이동을 낳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선진국 자본의 생산 입지가 저개발국으로 이전되고 노동억압적인 자유무역지대가 설립되면서, 국제 노동력 이동은 줄어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늘어났다. 국제 자본 이동을 통해 형성된 사회적 연결망을 타고 저개발국의 시민들이 해외 취업의 기회를 찾아 나섰기 때문이다. 수백만 명에 이르는 아프리카인을 노예화하였던 강제이동, 쿨리로 대표되는 아시아니 부자유 계약노동자, 그리고 현대의 이른바 ‘자발적’ 이주노동자는 자본 투자에 의하여 창출된 고용기회에 따라 국경을 넘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본주의의 형성 · 발전 · 재구조화 과정에서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였고, 지금도 그러고 있다.
3. 한국인의 해외 취업, 외국인 노동자의 국내 취업
한국은 오랫동안 노동력 송출국이었다. 20세기 초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멕시코 에니켄(henequen) 농장으로 일자리를 구해 떠났던 사람들, 일제 식민지시대 만주와 연해주 및 일본 등지로 새로운 삶의 기회를 찾아간 사람들, 1960~1980년대 독일 · 베트남 및 중동의 여러 산유국으로 일하러 갔던 광원 · 간호사 · 서비스 노동자 · 건설노동자들은 한국이 해외로 노동력을 송출한 역사가 거의 1세기에 달함을 말해준다. 그들은 해외에서 몇 년간 고생하여 목돈을 만들어 귀국하겠다는 원대한 꿈을 안고 한국을 떠났다. 그들 중 일부는 귀국하였지만 해외 현지에 정착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 결과 오늘날 재외동포 수가 6백만명에 이르는 한민족의 이산(diaspora) 현상이 생겨났다.
1987년은 한국 이주노동의 역사에서 전환점이었다. 그 무렵 해외로 일하러 떠나는 한국인은 거의 사라졌고, 대신 외국인 노동자들이 한국으로 일하러 오기 시작하였다. 서울 아시안게임이 끝난 이듬해인 1987년 봄, 『동아일보』에는 필리핀 출신 가정부들이 서울 강남에서 일한다는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는 한국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의 탄생을 알리는 첫 신호였다. 그후 국내 외국인 노동자의 수는 급증하였고, 출신국도 다양해졌다. 노태우 정부는 북방정책을 추진하며 중국과 교류의 물꼬를 텄고, 그 과정에서 재중동포의 고국 방문을 적극적으로 유치하였다. 그러면서 ‘중국 국적을 가진 한민족’, 즉 중국에서 조선족(朝鮮)이라 불리는 우리 동포들이 대거 한국에 몰려왔다. 재외동포든 이민족이든, 중국과 동남아시아의 가난한 나라 출신 외국인들은 형식적으로는 관광객이나 친지 방문자였지만, 한국에 들어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국내 노동자로 자리 잡았다. 그들의 수가 늘어나면서 한국은 ‘노동력 유입국(labor receiving country)’의 하나가 되었다.
한국에 외국인 노동자가 들어온 것은 한국 정부가 1960년대부터 추진한 공업화 정책의 성공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한국전쟁 직후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의 하나였지만, 1980년대 중엽에는 이웃 나라 사람들이 일하러 올 정도로 발전한 나라가 되어 있었다. 외국인 노동자가 한국에 일하러 오는 현상은 세계 각국의 발전 격차로 설명할 수 있다. 한국에서 한 달 일해 번 돈이 자국에서는 몇 달치 혹은 몇 년치 소득에 준한다는 ‘환율의 마술’이 가난한 나라 출신의 이주노동자를 끌어들인 원동력이었다.
외국인 노동자가 유입되기 시작한 시점은 강력한 노동운동과 그로 인한 임금 상승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때와 정확히 일치한다. 1987년 이후 강력한 노동운동은 국내 대기업 생산직 노동자의 임금을 급속히 상승시켰고, 동시에 내국인 노동자의 ‘어렵고 지저분하며 위험한 직종 기피 현상’이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 경제적 궁핍에서 막 벗어난 한국인들은 더 이상 ‘어렵고 지저분하며 위험한 직종’에 종사하지 않으려 하였기 때문에, 중소 제조업체와 건설현장 등에서는 구인난이 만성화되어 있었다. 이처럼 생산직 인력난이 만성화된 국내 노동시장 상황은 이주노동자를 한국으로 유인한 기본적 계기가 되었다.
더욱이 그 당시 한국 정부는 한국인의 해외여행 규제를 풀었고 이것은 외국인의 한국 입국을 매우 용이하게 하였다. 이 무렵 추진된 한국 정부의 북방정책에 의하여 중국 동포는 한국 방문 사증을 매우 쉽게 발급받을 수 있었고, 필리핀 · 방글라데시 · 네팔 · 파키스탄 · 스리랑카 출신의 이주노동자도 별 어려움 없이 입국할 수 있었다. 방문 · 관광 등 단기 사증을 발급받고 입국한 외국인들이 국내에서 취업하는 현상이 출현하기 시작하였다. 이주노동자의 입장에서 볼 때, 한국은 입국하기 쉽고 일자리도 쉽게 구할 수 있는 ‘기회의 나라’였다. 중국과 동남아시아 등지의 가난한 나라 출신 외국인들이 한국에 와서 노동자로 정착하였다. 한국 정부는 생산직 인력난에 대처하기 위한다는 명목으로 미등록 노동자를 사실상 방치하다가, ‘근로자’가 아닌 ‘산업연수생’을 받아들이는 산업연수제도를 1991년에 실시하여 편법 인력 수입의 물꼬를 텄으나, 심각한 불법체류 · 인권침해 · 송출비리 때문에 새로운 제도를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회는 2003년 8월 ‘외국인 근로자의 고용 등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였고 2004년 8월 17일부터 외국인 노동자에게도 노동3권을 보장하는 고용허가제가 실시되었다.
4. 한국의 이주노동자의 시민권
‘이주와 거주의 자유’는 세계인권선언에 규정되어 있는 인간의 기본적 인권이다. 하지만 그러한 자유가 허용되는 것은 대게 제한된 국경 내에서일 뿐이다. 일정 범위를 넘어서면 출입국 서류, 이민 내지 국적 전환 등의 문제와 결부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국민국가는 자국인과 외국인의 출 · 입국을 통제하고 있고, 그것을 주권의 한 부분으로까지 간주한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외국인은 사증(visa)이나 체류허가(residence permit) · 취업허가(work permit) 등의 규제를 받는다. 국민국가는 자국민의 취업 기회를 보호하기 위해 이러한 조치를 취한다.
한국 정부는 국내 노동력 부족에 대처하기 위하여 외국 인력을 받아들이되 이민자 혹은 시민권자로서가 아니라 ‘일정 기간 노동력만 제공한 후 되돌아갈 사람’의 지위를 부여하였다. 혈통에 기반을 둔 민족 개념을 신봉하는 한국 사회는 외국인 노동자가 정착하여 단일민족의 신화가 훼손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국적에 근거한 차별 속에서 이주노동자는 ‘인간’이 아니라 관리 · 통제 · 처분의 대상일 뿐이다.
한국에서는 ‘현대판 노예제’라는 오명을 들어왔던 ‘산업연수제도’와 ‘고용허가제도’를 병행하여 실시하고 있다. 산업연수제도는 1년간의 연수기간 동안 이주노동자에게서 ‘근로자’로서의 권리를 박탈하는 문제점을 갖고 있고, 2004년 8월 17일부터 시행 예정인 고용허가제도도 산업연수제도와 마찬가지로 1년 단위의 고용계약으로 인한 노동자로서의 권리 제한, 사업장 이동의 제한, 가족 동반 · 초청 금지 등의 인권침해 요소를 가지고 있다. 상대적으로는 낫다는 고용허가제도 역시 이주노동자를 ‘시민’으로 받아들이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이미 오래전에 세계경제에서 국경이 사라졌다. 전 지구적 자본주의는 숙명처럼 한국인의 삶을 옥죄고 있다. 더 이상 ‘우리끼리만’ 살 수 있는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졌다. 한국의 출산율은 매우 낮은 수준이고, 동시에 국민의 평균 수명은 점점 연장되고 있다. 이러한 추세가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른바 3D업종의 인력난은 쉽사리 해결되지 않을 것이 명백하다. 국제연합(UN)의 인구 전문가들은 “한국 사회가 현재의 생산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외국 인력을 현재보다 훨씬 더 많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제안하고 있다. 외국인 노동자는 한국경제가 원활하게 운영되기 위해서 필수적인 존재이다. 최근에는 단순생산직 외국인 노동자뿐 아니라, 외국인 소프트웨어 프로그래머와 과학자들까지도 받아들이고 있다. 그들은 한국 사회가 발전을 지속할 수 있도록 하는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고, 앞으로 그들의 중요성은 더욱 증대될 것이다. 한국인들이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지혜를 익히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도달하였다.
이 땅의 외국인 이주노동자가 그동안 한국경제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하고,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주는 것은 도덕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당연하다. 21세기형 인권협약이라 할 수 있는 ‘모든 이주노동자와 그 가족의 권리보호에 관한 국제협약’을 비준하는 것은 그 첫걸음이다. 이주노동자권리협약은 그동안 각종 국제조약에서 규정되어온 권리 주체로서의 ‘시민’ 내지 ‘주민’ 등의 범주에 포함되지 못한 이주노동자와 그 가족이 누릴 수 있는 각종 권리를 명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요 인권협약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그런데 이주노동자를 송출하는 나라들이 이 협약을 비준 또는 서명한 반면, 받아들이는 나라는 비준은 물론이고 서명조차 하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명백하다. 송출국 정부는 해외에서 취업 중인 자국인 이주노동자와 가족의 인권을 보장하는 데 적극적이고, 반대로 유입국 정부는 자국에서 일하는 외국인 이주노동자와 가족에게 내국인과 동등한 대우를 해주기를 꺼리기 때문이다.
한국은 1980년대 중엽 이후 외국인 이주노동자를 받아들이고 있지만. 지난 1백여 년간 자국인 이주노동자를 해외로 송출하였다는 역사적 특수성을 지니고 있다. 그 결과 한국은 약 6백만 명에 이르는 재외동포를 거느리고 있다. 그들의 처지를 고려한다면, 이주노동자를 생산요소의 하나인 ‘노동력’으로만 파악하는 시각을 탈피하고 사회적 권리 · 의무의 주체로 인정하는 전향적 시각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선진국들과는 달리 한국은 노동력 송출국의 처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입장에 있다. 더욱이 한국이 부국강병을 지향하는 패권국가(覇權國家)가 아니라 인권 · 평화 · 민주주의를 존중하는 강소국(强小國)으로서의 발전 모델을 가질 수밖에 없다면, 다른 나라가 가지 않을 길을 선택하는 데 주저할 필요가 없다.
설동훈
1964년생.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 저서 『외국인노동자와 한국사회』, 『노동력의 국제이동』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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