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에서 마주한 회복과 기적의 순간
홍상수는 첫 영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로 관객을 찾아왔다. <그 후>(2017)에 이르기까지 스무 편의 영화를 통해 영화 보기의 새로운 감각을 찾아내고 고유한 삶의 질감을 변주하면서도 변하지 않는 영화 만들기의 태도를 견지해왔다. 그의 영화는 한국영화사에서 간헐적으로 시도되었던 김기영의 <하녀>(1960), 유현목의 <춘몽>(1965), 이만희의 <휴일> (1968), 하길종의 <화분>(1972), 장선우의 경마장 가는 길>(1991)을 잇는 모더니즘 계열에 속할 뿐 아니라 영화를 통해 삶이라는 질료를 편견 없이 포착하는 리얼리티에 천착한다. 첫 영화가 안겨주었던 서늘하고 치밀한 관찰과 쉽게 결론지을 수 없는 영화의 무드는 이십여 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각각의 영화를 되비치는 ‘다면적인 홍상수 세계’를 구성하고 있다. 인물들의 상황을 둘러싼 비선형적인 서사구조는 철저하게 일상의 자질구레한 면모와 비루한 감정의 표면에만 머물러 있다. 영화 외부에서 끌어들인 도구를 동원해서 풀어내는 인물의 심리구조나 표면 아래 도사린 또 다른 이야기 구조는 그의 영화에서 제거되어야 할 겉치레에 불과하다. 그는 삶의 사실성과 영화를 이루어가는 리얼리티의 간극을 최대한 얇게 만들기를 원하고, 영화가 제 스스로 생성되는 과정을 믿기 때문이다. 또 온전히 삶에 충실하기 위하기만 권태와 불길한 죽음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일상을 돌고 있는 인물들의 스산한 행렬과 맞닥뜨린다. 그의 카메라는 실제를 포각하기 위해 인물과 공간을 직시하거나 맴돌고, 단절된 것들 사이로 미끄러진다. 자명한 진리, 모두가 의심하지 않는 답변을 향해 나아가기를 거부하기 때문일까. 그의 영화는 명료하고 상쾌한 종결을 향하지 않기 때문에 새롭고, 당연하게 받아들인 사물들을 매혹의 시선으로 볼 수 있도록 인도하기에 놀랍다. 비관적이고 시니컬한 삶 속에서도 끈질기게 움켜잡으려는 사랑에 대한 욕망은 영화가 거듭될수록 남녀의 세속적인 마찰을 날카롭게 해부하거나 주도면밀한 탐색 끝에 도달한 허망함으로 향하기도 하고, 그래도 살아가기 위해 공들여 붙들어야 하는 삶의 목표(괴물은 되지 말자라거나 생각을 하자)를 거쳐 유머러스한 포용과 나 자신에 대한 통렬한 배움의 태도로 나아가고 있다. 무엇보다 그의 성실함을 말해야 한다. 홍상수는 자신의 방법론(그날마다. 새롭게 써내는 시나리오, 큰 틀을 구상한 후 전적으로 배우들의 느낌에 따라 세부를 채워가며 촬영하는 방식, 소박한 스태프 규모와 촬영횟수, 지속적으로 함께 작업하는 협업자들 등)을 지켜오면서 지속적으로 영화를 생산하고 있다. 그는 친밀하고도 낯선 감각과 낯익지만 새로운 일상의 리듬을 형상화함으로써 세상과 사람에 대해 접근할 가능성을 제안한다. 안락함보다 불편함을, 익숙함보다 낯섦을, 친절한 전개보다 모호하게 경계를 흐리는 불연속성을, 반복보다 변주를, 통합보다 분절된 감각을 발견하고 느끼는 과정을 통해 치밀한 사유로 향하도록 관객들을 이끌어간다. 그렇기에 관객들이 그의 영화와 대면할 때 필요한 것은 해석보다 직관에 의지하며, 서사를 꿰어가는 과정보다 영화가 증여한 꿈과 현실을 예민하게 느끼는 감각을 발견하고 의미망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울 수 있다는 의지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의 영화들 앞에서 여전히 주저하고 머뭇거리게 되는 것은 홍상수라는 사람이 세상과 마주하는 방식, 그가 함께 일하는 배우들이 빚어내는 특유의 분위기, 배우와의 대화를 통해 도달하는 섬세한 정감의 표현, 촬영 당시의 기후와 날씨를 재료 삼아 펼쳐지는 영화의 궤적을 미처 뒤따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가 생산하는 영화의 속도에 비해 나의 사고는 늘 더딜뿐더러 새 영화가 등장할 때마다 이미 정식화의 위험에 빠져버린 오인은 수정되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테면 그의 영화를 분류하고 나름의 계열을 찾기 위해 분주하게 생각하다가 뒤늦게 무용한 짓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경우도 허다하고(왜 줌렌즈를 사용해서 프레이밍을 구축하는가, 연속성/분할, 확장과 집중의 원칙이 무엇일까, 음악의 유무에 따른 변화 등), 음악의 주선율을 이루는 단위처럼 그의 영화를 함축하는 구조를 추출하려는 노력이 어긋나기도 한다. 심지어 작가론적인 접근에서 반복되는 것과 차이를 형성하는 분기점이 되는 영화조차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여전히 그의 영화적 실체를 더듬어 찾으려다 실패하고 또다시 보기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글을 시작하기로 한다.
그의 영화 대부분은 남녀의 관계가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카메라는 서로에게 품게 되는 감정과 욕망이 불화하거나 엇갈리는 과정을 필사하듯 꼼꼼히 관찰하면서 미세한 변화를 포착한다. 유머와 냉소, 감정의 수용과 포기를 오가는 생활의 발견〉(2002)-<해변의 여인>(2006)-<잘 알지도 못하면서>(2008)-<밤과 낮>(2008)-<하하하>(2009)에서 연애는 인물들이 다른 곳을 여행하면서 만나게 되는 사건이다. 남자 주인공들은 비루한 일상을 벗어나기 위해 일시적인 환상을 꿈꾸고 욕망의 대상에 탐닉하지만, 여행이 끝날 무렵 그들에게 남겨진 것은 퍼붓는 비, 청명한 바다, 나무 한 그루, 모래 언덕, 캐리어 하나에 불과하다. 그들은 사랑을 고백하고 여인의 아름다움을 칭송한다. 무엇보다 간절히 섹스를 원하지만 현명하고 부드러운 여성들에 의해 오만함이 들통나거나, 끈질긴 설득으로도 떠나지 않는 건강함에 부딪혀 제풀에 지친다. <북촌 방향>(2011)-<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2015)의 인물도 방문지에서 깔끔하게 해야 할 일만 마치고 귀가하려는 다짐이 어그러지는 과정을 겪게 된다. 예전에 사귀었던 여성과 닮은 여성, 이름이 같은 여성의 그림자를 붙들고 늘어져 하룻밤을 운 좋게 보낸다고 하더라도 새로운 사랑으로 이어지기는 쉽지 않다. 운명적인 사랑이라고 느낀 여성도 밤이 지나고 다른 공간에서 마주치면 허망한 꿈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길모퉁이를 돌아 사라진다. 반면 여성 주인공의 여정을 담고 있는 <옥희의 영화>(2010)-<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2012)-<다른 나라에서>(2012)-<리 선희(2013)-밤의 해변에서 혼자>(2017)에서 그녀들은 남자들의 비겁함에 진저리치기도 하고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 소박한 소망마저 방해받거나, 지키지 못할 약속 때문에 다투고, 뒤쫓아 온 남자를 돌려보내기도 한다. 하지만 그녀들은 사랑하는 남성(그들은 유부남 교수거나 선배인 경우가 많다)보다 중요한 것이 자신의 삶임을 알고 있다. 누군가에게 속해 있다는 안온함과 맞서기 위해, 궁극적으로 잘 헤어지기 위해 여행을 떠나고 돌아오는 길에서 그녀들은 자신의 시간을 살아내는 것에 한 발짝 다가서게 된다. 남녀의 성차와 기질을 떠나서 홍상수가 드러낸 연애와 사랑은 가볍고 날렵한 톤으로 세상-나-너-사랑하는 우리-영화를 탐구하는 영화들과 낯선 곳에서 만나게 된 꿈같은 열기와 통증이 묵직하고 단단한 감정으로 쌓여가는 영화들이 뒤섞여 있다. 게다가 일종의 연작, 혹은 서로를 마주 보거나 비스듬히 쳐다보는 시선처럼 배치된 영화들도 발견된다. <하하하 - 북촌 방향>, <옥희의 영화>-<우리 선희>, <다른 나라에서>-<자유의 언덕>(2014),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 <그 후>를 생각해볼 수 있다. 이 영화들의 쌍에서 서로를 비추는 도구는 불현듯 깨닫게 되는 죽음과 기이한 우연, 영화를 사이에 둔 사람들의 복잡하고 모호한 관계, 낯선 곳을 찾은 자의 불안과 그리움.
붙잡아둘 수 없는 시간과 사랑에서 비롯된 정감이 충돌하고 바스러진 흔적들이다.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2016) (이하 <당신자신>)도 홍상수의 다른 연애담처럼 사랑과 연애에 따른 감정의 결들이 퇴적되어간다. 다른 점이 있다면 눈앞에서 꽁꽁 숨어버린 연인을 애타게 찾으며 방랑의 길을 가는 남자가 사랑하면서도 의심하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못했음을 후회한다는 것이다. <당신자신>은 홍상수의 영화 중에서 흔치 않은 남자 주인공으로 인해 지리멸렬한 말싸움과 지분거리는 행동을 주고받는 것보다 그가 홀로 골똘히 견뎌내는 시간을 경험할 수 있다. 그는 진정한 사랑이 어떠해야 하는지 진심을 다 해 찾고, 처음 만났을 때의 감정을 가까스로 깨닫고, 그 결과로써 회복된 사랑을 선사 받는다. 아마도 여행지, 섬광 같은 우연, 끈덕지게 찾아다니는 아름다운 여인, 도피로서의 욕망과는 다른 방향에서 사랑을 탐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배우 김주혁이 지닌 본래의 성품과 기질이 철없거나 떼를 쓰는 남성상과 달리, 포용과 수긍으로 향하기 때문일지 모른다. 2015년 여름 연남동을 떠나지 않고 촬영한 이 영화는 좁아진 장소만큼 집약적인 공간 구성과 이전의 영화에서 등장하지 않던 몇몇 이미지 구성을 통해 강직하고 분명한 톤으로 방황하는 자의 감정을 드러낸다. 첫째는 인물들이 걸어가는 골목을 보여주는 방식이다. 카메라는 이미 프레임인 상태의 인물을 따라 패닝 하거나 조금씩 움직인다. 하지만 골목길이 돌연히 등장하기 때문에 동네에 위치한 길을 따라 인물들이 자유롭게 어디든 돌아다닌다는 사실을 영화가 망각하거나 일부러 외면한다는 느낌이 든다. 유독 영수 김주혁에게 이 짧은 골목은 세상의 막다른 곳으로 유인하는 비현실적인 장소처럼 작동한다. 골목 끝에 위치한 민정(이유영)의 집을 두 번 찾을 때 그는 문득 환청과 환상에 이끌린다.
현실에 존재하지만 현재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는 그녀에 대한 불안과 그리움이 그를 엄습하도록 영화가 그를 유인한 셈이다. 나아가 민정에게 가는 열쇠를 얻기 위해 게임에 동참해야 하는 곳이 된다. 두 남자의 술자리에서 나온 민정이 어두운 골목에 주저앉아 울고 있다. 그녀를 찾아 나선 영수가 골목으로 들어섰을 때 처음으로 건물의 모서리가 등장하는데, 이 골목만이 유일하게 두 갈래 길을 보여주고 있다. 영수는 ‘민정이라고 부르지 말고 대화하자’고 제안하는 게임에 동참하고 그제야 그녀에 대한 사랑을 확신하게 된다. 앞서 등장한 부재하는 그녀의 환영은 후경이 막혀버린 막다른 골목과 민정의 마당 구석에서 나타나지만, 감정의 변이가 가장 큰 이 씬은 골목의 성질을 바꿈으로 인해 그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순간을 지시하게 된다. 둘째, 영수의 집 대문이 열리고 닫히는 쇼트에 이어 등장하는 두 번의 침실 장면을 눈여겨봐야 한다. 당신자신은 특이하게 연인이 함께 등장하는 씬이 세 번밖에 되지 않는다. 나머지 장면은 각자의 시간을 보내는 데 할애된다. 영화의 첫 씬부터 짚어보자. 걸어오는 중행(김의성), 닫혀 있는 영수의 집 대문이 열리고, 중행이 화실에 앉아 있는 쇼트로 이어진다. 두 사람은 위중한 어머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영수가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는 민정이 술을 마시고 다른 손님과 다투었다는 소문 때문에 신경전을 벌인다. 첫 씬에서 이 영화의 중심 사건인 영수가 ‘직접’ 보지 못하고 전해 들은 민정에 대한 ‘말’이 등장하게 된다. 우리는 민정이 등장하기 전에 동네 친구들이 목격한 민정의 술버릇과 무절제하게 술을 마시는 그녀에 대한 힐난, ‘민정과 영수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을 먼저 접하게 된다. 두 번째 씬은 카페에서 카프카의 <변신>을 읽고 있는 민정과 재영(권해효)의 만남인데, 둘의 대화가 이상하다. 재영은 그녀를 아는 사람이라고 확신하고 대뜸 말을 걸지만 ‘나는 민정이가 아니고 당신을 처음 본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그녀가 거짓말을 하는 것인지, 재영이 오해를 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을 통해 우리는 민정의 정체성과 참과 거짓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세 번째 씬은 영수의 화실 입구로 들어서는 민정과 굳게 닫히는 철문, 영수의 침실로 이어진다. 침대에서 이불을 덮어쓰고 있던 영수가 일어나 그녀와 언성을 높이며 다툰다. 영수는 우리한테 필요해서 한 약속을 지킬 것을 요구하면서 그녀가 거짓말을 했다고 판단한다. 반면 민정은 ‘믿지 못하는데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느냐’, ‘당분간 연락하지 말고 지내자.’, ‘시간을 가지자.’고 말한다. 이 씬은 9분가량의 롱테이크로 촬영되었다. 침대에 앉은 두 사람의 거리감과 감정의 강도에 따라 줌인/아웃이 이어지고 민정과 영수를 따라 카메라가 조금씩 움직인다. 홍상수가 즐겨 사용하는 줌인/아웃을 통한 쇼트의 분절은 공간과 인물 간의 친밀도나 이질감이 축소/확장되거나 심상에 맺히는 시간적 간격을 드러내지만, 그만의 특별한 규칙이나 일반적인 용례를 따르지 않기 때문에 ‘어느 지점’이 지시하는 의미를 파악하려는 시도는 무의미하다. 대신, 영수의 격앙된 목소리와 체념, 민정이 되받아치는 저항과 결단이 물리적 거리감을 뛰어넘는 의미심장함을 뿜어내고 있음을 느끼는 게 나을지 모른다. 그리고 마지막 침실 장면과 연결 지어볼 때만 벽으로 막힌 침실, 그것도 귀퉁이만 삐죽이 등장하는 침대가 두 사람에게 어떤 장소로 변주됐는지 선명해진다. 출구만 있는 골목길처럼 이 방도 막다른 곳에 있다. (영수의 집 구조는 대문 화실 그리고 침실일 것으로 예측할 수 있지만, 홍상수는 골목길의 조망을 무시한 것처럼 집의 구조 또한 보여주지 않는다). 연인의 사랑이 유지되었건, 의심과 이기심으로 인해 깨어지건,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충만함으로 채워지건 이 장소는 그들에게 삶이자 꿈, 이상이 동일하게 머무는 곳이 된다. 마지막 침실 씬은 8분 30초가량 이어진다. 여전히 줌인/아웃과 카메라의 팔로잉이 이어지지만,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인 기적이 나타난다. 둘이 조용히 대화하고 미소 짓다가 잠이 들면 크기가 줄어든 촛불이 디졸브된다. 내가 기억하기로 홍상수의 영화에서 이런 명쾌한 이미지의 겹침은 처음 등장했다. 흔히 시간의 경과를 기시하는 광학효과가 이 영화에서는 영수가 현실과 환상/꿈의 경계에서 머뭇거리고 있음을, 정말 내가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있었던 것인가라는 질문을 조심스럽게 떠올리는 순간을 보여준다. 초가 작아질 만큼의 시간/꿈결/민정을 진정으로 대하기까지 하릴없이 버려진 시간이 이 쇼트에 모두 담겨있는 것 같다. 영수가 깨어나 사라진 시간의 흔적을 되돌리는듯한 복합적인 표정에 짓고 있을 때 민정이 수박을 들고 프레임인한다. 그제서야 영수는 갈증이 사라질 만큼의 시원함을 느끼게 된 것이 아닐까. 게다가 씬을 영화의 기본단위로 여기면서 필요에 따라 줌렌즈를 사용해서 분절/포용하면서 시공간적 관계의 폭을 카메라가 어떻게 인지하는지 관객에게 드러내는 홍상수의 영화적 방법에 덧대어 등장한 디졸브는 방황 끝에 당도한 회복을 가시화한다. 세 번째로 살펴볼 것은 카메라의 왕복운동으로 포착된 공간이다. 영수와 다툰 후(영화에서 네 번째 씬이다) 민정이 어두운 골목을 걷고 있다. 불빛이 하나도 없는 어둠 속으로 진입하는 그녀에 이어 검은색 무지화면이 등장한다. 심연처럼 가로막힌 어둠은 민정을 영수로부터 완전히 갈라놓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그녀의 말처럼 각자 시간을 보낸 후(영수가 민정에 대해 새롭게 각성하기까지 기다린 이후) 마지막이 되어서야 비로소 조우하게 된다. 카메라가 공간을 왕복하면서 삶과 환영을 아무렇지 않게 횡단하는 장면은 다섯 번째 씬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이 씬은 이후로 반복되고 변주되는 마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중요하다. 대문이 열리면 목발을 짚은 영수와 중행이 걸어 나오고 카메라는 두 사람을 보여주다가 (오른쪽에서 중앙으로)패닝한다. 이어지는 쇼트는 민정의 집이 있는 골목으로 불쑥 들어온 두 사람이다. 이때 카메라는 골목 안에서 그들을 보여주다가 인물의 움직임을 따라 왼쪽으로 이동하면 두 사람의 뒷모습으로 재프레이밍된다. 외화면에서 ‘영수씨’라는 소리가 들리면 영수가 프레임의 오른편으로 고개를 돌릴 때 카메라도 (줌인과 동시에 오른쪽으로) 패닝한다. 활짝 웃으면서 팔을 벌리고 걸어오는 민정의 모습에서 다시 왼쪽으로 패닝하면 영수의 측면 얼굴이 보인다. 물끄러미 쳐다보던 그가 다시 대문을 향하고 서면 중행이 담 너머를 살핀다. 다시 시선은 계량기 앞에 멈추고 두 사람은 전기 계량기가 돌아가는지 아닌지 애꿎은 소리를 하다가 프레임 아웃하지만 카메라는 기계 앞에 머무른다. 왜 홍상수는 골목을 한 테이크로 촬영하면서도 적어도 다섯 개 이상의 쇼트로 분절시킨 것일까. 영수는 대문 앞에 서 있을 뿐이지만 그의 마음은 민정의 환청과 환영을 향해 있다. 무심히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따라 그의 마음에 맺힌 환영이 나타났다 사라지지만, 즉 무심하게 시선을 옮기지만 한때는 자신을 반갑게 맞아주었던 그녀의 있고/없음을 지시하는 카메라의 왕복운동 안에서 그녀의 부재를 실감하게 된다. 대문과 골목을 오가는 운동을 통해 영수의 한정된 시야와 자신의 입장에서 본 타인의 이미지와 민정의 다정함이라는 과거가 서로를 마주 보게 하는 것 같다. 즉 카메라의 자의적인 운동 그녀가 있던 과거와 없는 현재 - 장소가 떠올려주는 영수의 감정 부재마저 탁월하게 침입시키는 홍상수의 리듬이 일체를 이룬다.
홍상수가 만든 열아홉 편의 영화와 달리 <당신자신>에서는 불길한 징조나 죽음을 연상시키는 뉘앙스를 지닌 것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사람들 사이를 떠도는 말과 소문이 어떻게 퍼져나가는지에 대한 경로를 간결하게 제시한다. 동네 술집 씬에서 술집 주인과 친구들이 프레임 왼편을 보면서 쑥덕거리는 쇼트 다음에 민정과 다른 인물이 술 마시는 모습을 연달아 보여준다. 타인에 대한 말과 편견이 얼마나 막힘없이 전파되는지를 이보다 더 뚜렷하고 명쾌하게 보여줄 수 없을 정도다. 이 영화가 주목한 것은 연애의 지난함과 사랑의 불확실함, 삶의 신랄함과 고달픔, 그로 인한 절망과 불안보다 말의 위력이기 때문이다. 그런 말들에 휩쓸려 연인을 믿지 못한 영수에게 주어진 장애물은 집요하게 프레임의 후경을 마기나(막다른 골목과 벽, 닫힌 대문과 창문, 영수의 그림 등), 그가 자유롭게 이동할 수 없도록 운신의 폭을 좁혔기 때문에 영수는 프레임을 거의 벗어나지 못한 채 쇼트 안에 갇혀있게 된다. 마치 영수에게 시련을 주고 시험을 거친 후에 비로소 곁을 허락받는 사랑으로의 여정이 참으로 험난하다는 것을 시각화시킨 것 같다. 그가 가진 편견 때문에 민정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상태 깁스를 한 다라 목발을 짚고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떠도는 출구 없는 골목이 일체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골목이 다시 등장한다. 사랑과 약속 구속과 자유 불신과 저항 자신의 것을 버리는 순간과 비로소 온전히 받아들여지는 존재 회복되는 사랑이라는 여정에서 중요한 분기점을 만들어낸 이곳은 민정의 환영이 불쑥 침범하거나 그의 마음이 불러낸 화해의 꿈이 펼쳐지는 곳이자 마침내 눈물겨운 긍정으로 변모되는 장소이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가장 내밀한 대화가 가능해진 협소한 침실로 좁혀 들어간다. 홍상수는 이 영화를 통해 낯선 곳을 탐험하듯 여성들을 찾는 애처로운 남성으로부터 물러선다. 자신의 눈으로 본 것보다 더 위대한 진실은 믿음에 있음을, 사랑은 ‘고마워요, 행복해요’라는 진심 어린 말에 있음을,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받아들일 용기가 곧 사랑이라고 고백하는 것 같다.
박인호
영화평론가, 부산영화평론가협회 회원, mybresson@daum.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