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고 답하다
묻고 답하다

적대의 정치, 원한의 정치- 신자유주의의 프랑켄슈타인

차미경
기사 듣기

 

1.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사회란 존재하지 않는다”(society does not exist)는 발언이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던 시절이 있었다. 신자유주의라는 낯선 이름이 서구 사회의 한구석에 등장하던 무렵 이 불길한 문장은 상반되는 이념 진영에서 동시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1979년 노동당의 연속집권을 분쇄하고 보수 정권을 창출해낸 마거릿 대처 영국 수상은 사회의 부재를 아쉬워하기는커녕 그 냉혹한 진실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며 이 야박한 문장을 발설했다. 그녀는 개인을 넘어선 사회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역할을 긍정했던 좌파들에 맞서 사회 같은 것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사회라는 것은 허약한 존재들이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만들어낸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심약한 존재들이 인간적 유대와 사회적 연대라는 아름다운 구호 아래 세금을 낭비하고 타인의 노동을 갈취하며 자본의 자유로운 흐름을 가로막고 있다면, 그 환상의 허상을 드러내고 각자가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기획하고 책임질 줄 알도록 강제하는 것이 보수주의 정치가가 수행해야 할 역사적

 

과제가 된다.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도덕적 훈계가 그녀의 정치 수사를 늘 따라다녔다. 대처 수상은 자신이 짊어진 이 역사적 과제를 수행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고 꽤 성공적이었다. 그녀는 사회정의를 위험한 미신이라 불렀던, 신자유주의의 그루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정언명령을 충실히 이행했다. 그녀의 손을 통해 노동당 정권하에서 국가 주도 사업들의 실패와 부작용을 목도했던 사람들의 불만을 해결해줄 조치로 탈규제화와 민영화가 시행되었고, 국가의 기능은 시장으로 아웃소싱되거나 개인의 어깨 위로 떨어졌다. 이런 탈규제 민영화 정책의 강력한 집행을 통해 그녀는 철의 여인이라는 호칭을 얻으며 대서양 건너편의 레이건 대통령과 함께 1980년대를 신보수주의의 시대로 만드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흥미로운 점은 철의 이념을 옹호하는 데 동원되었던 이 문장이 대처 수상과 이념적으로 대척점에 서 있던 이론가들 사이에서도 발설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포스트맑스주의 이론가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샹탈 무페는 1985년 출판된 그들의 저서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에서 사회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데리다의 차연과 라캉의 실재 개념을 사회에 적용함으로써 맑스주의를 현대화하고자 했던 그들은 적대(antagonism)를 사회의 구성적 조건으로 설정했다. “대타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라캉의 주장을 사회로 옮기면 사회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가 도출된다. 대타자란 사회적 상징질서를 안내하고 지배하는 숨은 존재, 특정 개인으로 환원되지 않는 사회적 역할과 기능을 체화한 존재를 가리킨다. 그런 대타자에게 결핍이 존재한다면 그가 체현하고 있는 사회적 상징질서도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 드러난다. 대타자에게 존재하는 결핍은 그가 체현하는 상징질서의 균열을 드러내는 증상이다. 이 증상은 상징질서의 불완전함을 드러냄으로써 공포와 불안을 조성하기도 하지만, 주체가 대타자에게서 벗어나 자유를 쟁취할 조건이 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사회에 존재하는 적대는 하나의 이데올로기적 입장이 사회적 장을 평정하여 사회가 조화로운 전체가 되는 것을 가로막는 내적 한계이다. 적대는 사회적 갈등을 유발하는 원천이지만, 동시에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집단들이 헤게모니 투쟁을 벌일 수 있는 가능성의 조건이기도 하다. 복잡한 논의를 단순화하는 감이 없지 않지만, 라클라우와 무페에게 사회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문장이 의미하는 바는 적대를 사회의 구성적 조건으로 받아들임으로써 특정 집단들에 의해 특정한 방식으로 의미화되는 사회적 기표들을 재의미화할 가능성을 열어놓는 데 있다. 어느 한 집단이나 이념적 입장이 사회를 독점적으로 지배할 수는 없다. 헤게모니 투쟁에서 승리한 세력이 자신의 입장으로 적대를 일시적으로 봉합하거나 재편할 수는 있지만 적대 자체를 없앨 수는 없다. 적대는 사회가 완전한 전체로 기능하는 것을 가로막는 구조적 한계이기 때문이다. “사회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지금과 다른 사회를 만들 가능성을 표현하는 진술문이었다. 다만, 구성원들은 분열과 갈등에서 비롯되는 불안과 불확실성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다.

 

사회의 존재를 부인하는 듯한 이 두 입장은 상이한 담론의 층위에서 각기 다른 목적과 다른 지향성을 가지고 출현했지만, 동일한 감정구조를 공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현대 사회가 상이한 이해관계와 욕망을 지닌 사람들을 통합시켜 줄 어떤 공통의 기반과 본질론적 토대를 잃어버렸다는 상실감, 그리고 그로부터 연원하는 불안이 두 입장 모두에 자리 잡고 있다. 대처수상은 당시 부상하던 신자유주의의 논리에 맞춰 사회를 다시 원자화된 개인들로 쪼개고 그 개인들의 자기 책임성을 강화함으로써 사회의 부재에서 비롯되는 상실감과 불안을 강박적으로 넘어서려고 했다. 그녀의 손을 통해 복지정책은 보모국가’(nanny state)의 재정 낭비 정책으로, 그 정책의 수혜자들은 자신의 삶을 감당하지 못하는 어린아이 같은 존재로 치부된다. 라클라우와 무페는 적대와 분열을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불안에 대처하고 이를 통해 사회를 새롭게 혁신할 민주적 계기로 삼고자 했다. 그들이 주창한 다원주의적 민주주의는 사회적 적대에서 비롯되는 긴장과 불안을 이해관계를 달리 하는 집단들의 경합과 경쟁을 통해 사회변화의 동력으로 전환하려는 정치시스템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정치적인 것의 활성화가 필수적이다.

 

2.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문화전쟁의 재점화: 브렉시트와 도널드 트럼프

 

3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돌이켜보면, 사회의 부재에 대응하는 두 대립되는 방식 중에서 결과적으로 대처의 길이 승리해왔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공산주의 체제의 역사적 패배가 확인된 후 자유민주주의의 최종승리만이 남은 것 같은 착각이 서구 지식인들 사이에서 퍼졌던 적이 있었지만, 이 착각의 유통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2008년 세계금융위기, 20165월 영국의 브렉시트와 그해 11월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트럼프의 당선은 세계화와 그 수탈자들이 일으킨 전 지구적 차원의 위기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음을 보여준 징후적 사건이었다. 세계 금융위기 이후 전 세계를 휩쓴 2011점령 운동은 약탈적 세계화에 맞선 대항운동이었지만, 대항이 대안의 창출로 이어지지 못하면서 운동의 동력을 상실했고 이후 정치적 반동이 부상할 토양을 마련했다. 자본주의 체제가 주기적으로 대면하는 이런 경제 위기들은 끝없는 경제팽창과 부의 창출이란 자본주의적 이상이 실현되기 어렵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나 사회적 적대를 새로운 사회시스템으로 만들어낼 대안 사회의 모형은 보이지 않았고 그것을 추진할 집단 주체의 힘도 점차 약화되어갔다. 새로운 통치형태로서 신자유주의적 이성이 지배력을 키워오면서 시장의 힘과 개인의 책임성은 점점 더 커졌고, 그에 반비례해서 사회의 영역은 줄어들었다. 시장의 자유는 확대되어왔지만, 정치의 영역은 위축되어 국가와 정당은 시장의 관리자 역할로 그 기능을 재조정 당했다. 사적, 개인적 영역의 확대와 정치적, 사회적 영역의 축소는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에토스를 만들어냈다. 이제 공적, 다원적, 세속적 민주주의의 상상계는 사적, 동질적, 가족적 상상계로 대체되었다. 전자가 개방성과 다원성을 지향한다면, 후자는 동질성과 위계성을 추구한다. 동질성은 불가피하게 차이를 배제한다. 차이의 추방 위에서 위계적 · 배제적 동질성이 형성된다. 상이한 국가와 지역들, 종교와 문화들, 젠더와 섹슈얼리티들 사이에 장벽을 세우고 그 견고한 벽 안에서 안전을 도모하는 빗장 공동체’ (gated community)가 사회정의라는 위험한 미신을 걷어낸 신자유주의 사회의 실상이었다. 문제는 신자유주의 체제에 의해 자기 책임성을 강요받고 있는 개인들의 삶의 역량이 증대되기는커녕 생존 자체가 위협받는 극단적 위축 상태로 내몰리고 있다는 점이다. 불확실한 미래와 위태로운 삶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세계 곳곳의 사람들에게 드러낸 충격적 실상이었다. 세계화는 전혀 다른 과거를 지닌 개인들을 하나의 세계로 내몰았고, 그런 낯선 이들이 얼굴을 맞대고 있는 근접 현실 속에서 극히 불평등하게 분배된 부와 권력은 생존을 위협하는 새로운 계급 질서와 문화전쟁을 만들어냈다.

 

문제는 이런 신계급사회와 문화전쟁이 초래한 위기를 19세기 유럽 사회가 제국주의를 통해 극복했던 방식으로는 더이상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경계를 뚫고 해체하고자 하는 세계화의 임무는 완수되었다. 하지만 세계화의 완수와 함께 인류는 그 부정적 결과에 고스란히 노출되어야 했다. 세계화가 초래한 개방성은 모두가 저항할 수 없는 운명의 횡포에 무방비상태로 노출된 사회)” 의 다른 이름이었다. 일백 년 전 로자 룩셈브르크가 예언했듯이, 자본주의는 발전을 위한 발판으로 비자본주의적 조직들을 필요로 하지만”, “자체의 존립을 보장해줄 조건을 동화시킴으로써 발전한다.” 비자본주의적 조직은 자본주의가 번성할 토양을 제공하고 자본주의는 그런 조직에서 죽어간 시체를 먹고 자란다. 하지만 세계화의 전 지구적 석권 이후 자본주의의 성장을 보장해줄 비자본주의적 배지(培地)는 사라졌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주장처럼, 이제 자본주의가 양산한 인간쓰레기혹은 쓰레기가 된 사람들 (wasted human)을 처리할 배후 공간이 사라지면서 땅과 일터, 사회적 안전망에서 밀려난 사람들은 지구를 떠돌고 있다. 이전 지구적 잉여 인간들은 생존을 위해 선진자본주의 국가로 몰려들고 있다.

 

빵과 집과 안전을 찾아 선진 자본주의국가로 들어가고자 하는 이주민들과 난민들은 기존 국가 안에서 내부적으로 배제된 사람들과 충돌한다. 방어적 민족주의와 정체성 갈등은 선진 국가 안과 밖에서 쓰레기로 버려진 사람들이 벌리는 문화전쟁의 형태로 표출된다. 다문화적 자유주의가 사회 갈등의 조절과 통합을 위해 관용을 유효한 통치전략으로 내세웠다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시대에는 관용이라는 고상한 제스처를 사용할 여유조차 남아 있지 않다. 잉여인간을 배출할 전 지구적 통로가 막히면서 선진 국가 내부에 남아 있던 쓸모없는 사람들 역시 점점 더 궁지로 내몰리게 되었다. 신자유주의의 지배력이 커지면서 과거에는 당연한 것처럼 제공되었던 사회적 보호책들 가족과 공동체적 유대는 전근대사회의 대표적인 사회 안전망이었다 이 사라지고 개인들은 전례 없이 취약한 무방비상태에 처하게 된다. 이제 그 누구도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는 위험상황에 내몰리게 된다. 내부에서 쓰레기로 판정받은 사람이 밖에서 온 이방인들에게 환대와 관용을 베풀 여력은 없다. 그들은 자원과 공간을 나눠야 할 이웃이 아니라 자신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따라서 추방하거나 파괴시켜야 할 적으로 다가온다.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는 적대세력에 맞설 이념적 무기가 각종 정체성들이다. 애초에 정체성 담론과 그에 기반한 문화전쟁은 역사적으로 억압받고 소외당한 존재들이 자신들의 역사적 경험을 인정받고자 하는 해방적 정치기획의 일부로 출현했다. 1960년대 미국 좌파 운동과 흑인 민권운동에서 시작한 정체성 정치는 소수집단의 권리와 문화적 자존감을 인정받으려고 했지만, 그 기저에는 민족, 종교, 인종, 성적 장벽을 넘어서는 보편주의적 지향성이 자리 잡고 있었다. 마르틴 루터 킹은 흑백의 진정한 통합이라는 미국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인종 차별과 불평등을 해소하고 흑인의 역사적 경험과 정치적 권리를 인정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실제로 그의 주장은 민권법과 투표권법의 성취라는 정치적 성과로 나타났다. 그러나 1980년대 등장한 신보수주의가 차별과 불평등의 해소에 반대하기 위한 명분으로 보편주의를 악용하자 정체성 정치의 방향은 보편성으로 초월 되지 않는 다양한 차이와 정체성을 강조하는 쪽으로 옮겨간다. 정체성은 같음다름’, ‘일치'분리'의 상호작용이 낳은 잠정적 결과물이다. 그것은 피부 색깔이나 DNA로 환원할 수 없는 문화적 구성물이다. 성차처럼 자연적 차이에 기초해있는 경우에도 자연적 차이는 문화적 차이와 얽혀 자연-문화의 연속체를 구성한다. 정체성은 같은 속성을 지닌 것들과의 동일시를 통해 형성되지만, 동류 감정은 다른 속성을 지닌 것들과의 분리를 통해 강화된다. 인간은 자신과 닮은 존재를 만나면 몸을 떨며 즐거워하고 낯선 존재를 마주칠 때면 온몸이 오그라드는 것 같은 공포를 느낀다. 프로이트는 사랑으로 하나가 되려는 에로스’(Eros)와 공격적으로 분리되려는 타나토스’(Thanatos)를 인간을 끌고 가는 두 충동으로 보았다. 동일성을 통해 만들어지고 분리를 통해 강화되는 정체성은 인간의 근원적 충동과 맞닿아 있는 만큼 쉽게 해소되기 어렵다. 인간의 정체성 형성에 에로스와 타나토스가 함께 작용하는 까닭에 정체성 정치는 소속집단에 대한 사랑 못지않게 타 집단에 대한 공격성을 그 정동적 에너지로 삼고 있다. 하나로 결합하려는 사랑의 욕구가 충족되지 못할 때 우리의 자존감에는 깊은 상처가 생기고, 상처받은 자아는 억눌린 공격성을 타자에게 투사한다. 1990년대 다문화주의와 결합한 정체성 정치는 보편적 지평과의 끈을 놓쳐버리고 정체성 투쟁에 몰두함으로써 차이의 인정'이라는 긍정적 기능뿐 아니라 타 집단에 대한 적대와 배제라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우파 백인 정체성 정치는 좌파 정체성 정치가 낳은 기형적 산물이다. 이제 스스로를 차별받는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상처 입은 백인 남성들은 자신들의 인종적·문화적·종교적·성적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고 정치적으로 결집한다.

 

신자유주의는 선진 자본주의국가가 외부적으로 버린 사람들과 내부적으로 버린 사람들이 생존투쟁을 벌일 때 포용적 공동체에서 배제적 공동체로 정책 기조를 바꾸고, 국민국가 경계 바깥의 잉여 인간들이 국경을 넘지 못하도록 거대한 장벽을 세운다. 그러나 동시에 자본이 저렴하고 유순한 노동력에 무제한적으로 접근하도록 하기 위해 제한적으로 국경을 열어놓는다. ‘자유무역은 실시하지만 이민은 반대한다는 이 명백한 모순을 모순이 아니게 만드는데 신자유주의의 정치적 곡예술이 발휘된다. 그런데, 나오미 클라인은 그 곡예술이 그리 어렵지 않다고 말한다. “우선 울타리를 크게 친다. 그다음 걸어잠그라.”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은 캐나다와 멕시코를 받아들여 미국의 시장을 확장시킨 국제협약이다. 2007년 이 협정은 수르 계획(Plan Sur)으로 보완되었다. 이 계획은 가난한 이주민들과 난민들이 라틴아메리카로부터 미국으로

 

흘러 들어가지 못하도록 멕시코 정부가 경찰력을 투입하여 미국 남부국경을 순찰한다는 조치를 담고 있었다. 실제로 수십만의 라틴아메리카 이주민들이 미국 국경에 닿기도 전에 멕시코 경찰에 저지당해 추방당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멕시코 경찰의 감시업무가 신통치 않다고 판단하고선 멕시코와 미국 국경 사이에 장벽을 쌓겠다는 계획을 선거 공약으로 제시했고, 당선 후 이 공약을 실천에 옮겼다. 자신의 계획이 의회의 반대에 부딪히자 20191월 트럼프 대통령은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대통령령으로 멕시코 국경에 인접한 뉴멕시코주와 애리조나주에 82km에 이르는 장벽을 설치하도록 전격 명령했다. 시민단체의 고발로 이 국경장벽 건설작업은 법원에 제소되었다가 2019525일 캘리포니아 북부 연방지방법원에 의해 제지당해 현재 건설이 중단된 상태이다. 법원은 의회 승인 없는 행정부의 예산전용이 삼권 분립에 따른 의회 예산권을 침해한 것으로 판결했다. 트럼프의 국경장벽 설치작업은 일시적으로 중단되었지만 의회를 패싱한 이 긴급 행정명령을 촉발한 문제의식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대중의 지지는 계속되고 있다. 사실 도날드 트럼프라는 기업가가 미합중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된 것 자체가 미국적 민주주의의 위기를 드러내는 징후라 할 수 있다. 리치몬드 하원 의원의 지적대로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다” (Make America Great Again)는 트럼프의 선거 슬로건은 실상 미국을 다시 하얗게 만들겠다” (Make America White Again)는 정치적 의도를 가리는 방패막이었을 뿐, 대통령 후보 시절부터 집권 이후까지 트럼프 행정부를 지배하는 일관된 정책 방향은 평등과 포용이라는 국가통합의 원리를 차별과 배제라는 적대의 원리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인종 차별과 소수자 배제에 기반한 극우 포퓰리즘이 트럼프 당선의 이념적 토대라는 점은 새삼 지적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 극우포퓰리스트 정치가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백인, 저학력, 복음주의적 기독교인 남성들이라는 점도 밝혀졌다. 트럼프는 워싱턴 정가를 지배하는 엘리트 정치가들에 대한 대중들의 계급 적대감뿐 아니라 타 인종, 다 민족에 대한 백인의 증오심과 여성 혐오 정서를 동원하여 권력을 쟁취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초래한 사회경제적 박탈에 맞서는 백인 하층계급 남성들의 백래시가 유럽대륙과 미국을 강타하고 있는 정치적 동력이라는 점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2016년 트럼프와 브렉시트에 투표한 사람들은 이민자 집단에 빼앗겨 버린 자신들의 일자리와 그것을 보장해줄 한때 영광스러웠던 나라를 되찾을 수만 있다면, 그리고 서브프라임 모기지 위기나 유로 위기 같은 극심한 경제 위기 때 생존의 위기에 내몰린 자신들을 배반했던 정치 엘리트들에게 복수할 수만 있다면, 어떤 실질적 손해나 위험도 감수하겠다는 극단적 열정으로 극우 포퓰리즘을 지지했다. 그 열정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남은 문제는 상처 입은 백인 남성 국수주의라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이 극우 포퓰리즘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이다. 이들의 적대 정치를 움직이는 감정동학은 무엇인가?

 

3. 상처 입은 백인 남성들의 불안과 원한의 정치: 신자유주의적 권위주의의 출현

홉스는 만인이 만인에게 늑대가 되는 자연 상태의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근대국가가 탄생했다고 말했다. 개인은 국가에 권력을 이양함으로써 자연 상태의 위험으로부터 안전을 보장받는 사회계약을 맺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자유주의하에서 국가는 더 이상 약육강식의 공포를 덜어줄 보호자 기능을 수행하지 않는다. 국가는 국민의 복종을 구하는 대신 안전을 지켜준다는 계약을 더 이상 지킬 생각 없이 자본의 관리자 역할이나 임시적인 위기관리 활동에 만족하고 있다. 이제 개인의 안전은 오로지 개인의 몫으로 돌아가는 개인 안건 국가다. 코덕 후퇴하고 있다.” 그러나 안전하지 않을 자유는 자유 없는 안전보다 결코 무섭지 않고, 덜 당혹스럽지 않다. 두 경우 모두 억압적이며 공포를 잉태하고 있다. 악마냐 검푸른 바다나? 3의 길을 찾기 위해 노력했건만 적어도 믿음기해보이는 탈출구는 보이지 않는다.” 바우만이 서유럽 사회를 향해 던진 위발언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지배하의 세계 모든 사람이 직면한 전 지구적 현상이라 해도 무방하다.

 

신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가로막는 장애물을 제거함으로써 자유를 극대화하고자 한다. 하지만 신자유주의가 부각하는 개인의 자유란 인적 자본으로서의 자유일 뿐 정치적, 윤리적, 미학적 자유, 끝없는 성찰과 실험이라는 인간에게 고유한 능력을 확장하고 표현하는 자유가 아니다. 신자유주의는 인간을 정의하는 여러 특성 중에서 시장에서 경쟁하며 스스로를 기업화한 인적 자본으로서의 특성, 즉 호모 에코노미쿠스적 측면을 전면화한다. 호모에코노미쿠스로서 개인은 스스로를 통제하고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지지만 자본에 봉사하는 한 요소로 도구화되면서 시장에서의 경쟁에서 밀려나면 가차 없이 버려진다. 신자유주의적 기업의 노동유연화는 고용 불안정의 다른 이름이다. 한국에서 기간제 및 단시간 노동자, 파견직 노동자 등 정규직이 아닌 노동자들을 통칭해서 부르는 비정규직이란 명칭은 서양에서도 단일한 명칭을 갖고 있지 않다. 최근에는 불안정(precarious)이라는 표현이 주목받고 있다. 프레카리아트(precariousproletariat)는 실업자, 노숙자, 시간제 노동자들을 포함해 불안정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포괄적으로 지칭하기 위해 고안된 용어이다. 이 말을 제안한 가이 스탠딩은 프레카리아트의 감정 상태를 '4A', 즉 불안(anxiety), 분노(anger), 소외(alienation), 아노미(anomie)라고 말한다. 스탠딩은 프레카리트를 지배하는 감정을 이 네 가지라고 말했지만 그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감정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 불안이라 할 수 있다. 나머지 세 감정은 불안에서 파생되거나 불안과 연계된 이차적 감정으로 볼 수 있다. 공포의 극복과 관리는 근대 초 개인들이 권력을 국가에 양도하는 협약을 통해 얻고자 한 것이었지만, 신자유주의 자본주의는 그것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 이제 개인들은 생존이 위협받는 극심한 공포와 불안에 시달린다. 안전에 대한 욕구는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지만 불안정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불안과 공포를 누그러뜨려 줄 사회 안전망과 국가의 기능은 약화되었다.

 

문제는 안전의 위협과 경제적 박탈감에서 비롯되는 공포와 불안이 그 발생 원천에서 분리되어 초점을 찾지 못한 채 유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우만이 지적하듯이, 중심 없이 흘러 다니는 공포와 불안은 쉽게 추적할 수 있고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대체표적을 찾는다. 이민자, 난민, 여성, 성적 소수자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하에서 항시적 고용 불안에 시달리는 하층 백인 남성들이 발생 원천에서 떨어져 나온 불안을 처리하는 손쉬운 대체물이다. 경제적 박탈감에 그 원천을 둔 불안은 문화적 영역으로 이동하여 백인으로서, 남성으로서, 기독교도로서 자신들이 누려왔던 권한과 우월감을 무너뜨리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사회적 소수자들에게서 대체표적을 찾는다. 인종차별주의, 여성 혐오, 이슬람 공포증, 반이민 정서 등은 상처 입은 중하층 백인 남성들의 원한과 분노에서 에너지원을 공급받는다.

 

상처 입은 권력에 대해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을 제시한 철학자는 니체이다. 원한(resentment)은 다른 세계에 대한 열림이 차단된 채 과거의 상처에 고착되어 버린 감정이다. 니체가 말한 원한은 마음에 오래 품게 된 앙심으로서 특정 사건에 대한 분노가 지속되어 인격적 손상의 느낌이 되고, 그것이 다시 자신의 열등감과 결합하여 타자에 대한 시기심과 함께 긍정적 가치에 대한 거부로 나타나는 부정적 감정이다.” 니체는 원한을 부당한 체제에 대한 반작용 그쳐 주체의 자기 원인적 흘러넘침으로서의 능동적, 창조적 자유를 가로막는 반동적 감정이라 본다. 원한은 백래시의 시대에 상처받은 사람들이 매달리는 감정이다. 자신들이 누려왔던 권력과 권한이 박탈당하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그것을 빼앗아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원한을 표출한다. 이 원한이 에너지가 트럼프와 브렉시트를 지지했던 우파 포퓰리즘을 추동하는 정통적 힘이다.

 

문제는 이 원한의 감정과 정동이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차별과 적대로 나타날 뿐 아니라 권위주의적 정치 지도자에 대한 추종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아니, 소수자 차별과 권위주의적 추종 사이에는 긴밀한 상관성이 존재한다. 권위주의는 경제적 자유와 시장적 합리성을 삶의 전 영역으로 확산시켰던 신자유주의의 다른 모습이다. 시장의 자유와 합리성을 지키려면 그것을 위협하는 세력들을 물리쳐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강력한 힘과 권력을 동원해야 한다. 이제 민주적 토론과 심의가 아니라 장벽과 접근금지 명령이 자유를 보증하는 정치적 기표가 되며, 사법기관과 경찰이 그 실행자가 된다. 신자유주의의 폐해에 대해 지속적 성찰을 보여주었던 웬디 브라운에 따르면, 신자유주의는 자유의 이름으로 수행되는 21세기 권위주의이다. 권위주의는 신자유주의의 프랑켄슈타인이다. 공포와 원한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원초적 리비도와 승화되지 못한 권력에의 의지는 이 신종 권위주의를 작동시키는 강력한 에너지원이다. 권위주의적 자유는 사회적인 것에 대한 윤리적 배려와 도덕적 양심에서 풀려난 원초적 자유이다. 그것은 다른 인간, 다른 생명체,

 

그리고 지구 행성이 처한 곤경과 취약성과 운명에 대해 어떤 관심도 보이지 않는 자유, 자신의 원초적 쾌락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라면 이 모든 것들을 희생할 수 있는 자유이다. 이 자유는 광폭하고, 열정적이며, 파괴적이다. 이 자유는 인민의 자기 통치를 긍정하는 근대 민주주의의 역사적 유산을 파괴하고, 칸트의 도덕적 정언명령을 위반하며, 지구 행성의 존속 가능성을 위협한다.

 

4. 최소한의 민주주의와 취약성의 윤리

웬디 브라운은 신자유주의적 권위주의의 출현에서 데모스’ (demos)의 해체 징후를 읽어낸다. 최소 의미에서 민주주의란 데모스(인민)에 의한 정치적 자기 지배를 가리킨다. 민주주의는 인민이 함께 공동의 삶을 관리하고 지배하는 이상을 대변한다. 인민의 지배를 실천하는 체제, 규정, 제도는 특정되지 않는다. 인민이 자신의 권한을 대표자들에게 위임할 것인지, 직접 실행할 것인지는 정해지지 않았다. 다만, 민주주의는 인민이 다른 이에 의해 지배되어서는 안 되며 각자가 정치적 목소리를 내어야 한다는 최소한의 원칙을 담고 있다. 브라운에 따르면 이것이 최소한의 민주주의가 보장하는 최소한의 약속이다. 그런데, 신자유주의는 이 최소한의 민주주의의 토대를 허문다. 신자유주의는 데모스라는 개념 자체를 제거함으로써 호모 폴리티쿠스를 호모 에코노미쿠스로 대체한다. 신자유주의는 공유하는 시민, 권력에 대항하는 시민, 참여하는 시민을 이해자 간 중재, 팀워크와 모범사례, 거버넌스라는 경제적 인간으로 대체함으로써 스스로 통치하는 인간의 역량을 위축시키거나 무력화한다. 반경치와 탈정치는 신자유주의가 민주주의에 가한 파괴적 결과이자 민주주의의 위기의 증상이다. 현재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싸움에서 힘의 균형추는 전자로 기울었다. 그러나 이 기울어진 균형추를 바로 잡지 않는 한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권위주의적 굴종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원한의 정치, 적대의 정치, 희생의 정치를 막아낼 방법을 찾기는 힘들 것이다. 민주주의는 분명 더디고 소란스러운 제도이지만 공동의 삶을 기획하고 주체의 자기 통치 역량을 키워나가는 데 지금까지 인류가 개발한 그 어떤 제도보다 유용하고 유연하다.

 

주디스 버틀러는 20019·11 사태 이후 미국이 전 지구적 공동체의 일부로 스스로를 재정의할 기회를 놓쳐 버렸다고 아쉬워한다. 안전하다고 믿었던 국경이 뚫림으로써 국가의 취약성이 드러났을 때 미국은, 인간은 누구나 상처 입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함으로써 타자와 공존할 수 있는 더 바람직한 길로 나아가기보다는 국수주의 담론을 강화하고 감시 기제를 확장하고 헌법이 보장하는 권리를 유예하고 명시적 · 암묵적 검열의 여러 방식을 만들어냈다.”(8) 당시 미국이 선택한 길은 피해를 봤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내부의 공격성을 외부로 투사함으로써 안전을 도모하는 길이었다. 버틀러가 피해 가능성''공격성'을 정치적 삶을 사유할 두 출발점으로 삼고자 한 이유는 미국이 선택한 이 비민주적 길에 대한 비판적 인식에서 기인한다. 그녀가 레비나스로 돌아가 윤리의 문제를 진지하게 성찰하고 윤리와 정치를 연결시켜 사유하게 된 것도 이 국가적 트라우마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자신을 위협하는 타자의 얼굴을 마주하면 인간은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자신을 방어하려는 충동을 즉각 발동하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타자를 해쳐야 할지 모른다는 또 다른 불안감에 휩싸인다. 이 위급한 순간 자기보존 충동과 살인 충동은 서로 싸우는 형제간처럼 맞부딪친다. 레비나스는 폭력을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폭력을 가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사이의 '긴장'에서 윤리가 발생한다고 말한다. 미국의 국경이 뚫리는 위태로운 순간 미국인들은 자신들이 가해자로 의심되는 사람들에게 폭력을 가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앞에 잠시 몸을 떨었지만, 긴장을 유지하지 못하고 공격성을 억제하는 데 실패했다. 그 결과 미국은 폭력이 최소화될 수 있고 불가피한 상호의존성이 전 지구적 정치 공동체의 기반으로 인정받는 세계를” (10) 만들어갈 기회를 잃어버렸다.

 

그러나 상처를 입고 난 뒤 개인과 집단이 취할 수 있는 선택이 9·11 이후 미국이 걸어간 길만 있는 것은 아니다. 버틀러는 상해를 입은 뒤 할 수 있게 된 한 가지 생각은 내 삶이 저 밖의 타인, 내가 알지 못하고 또 절대로 알게 되지도 않을 사람들에게 기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통찰(9)이라고 말한다. “이름 모를 타인에 대한 이 근원적 의존은 내 의지로 벗어날 수 있는 조건이 아니다. 이 의존을 폐지할 수 있는 안전장치는 없다. 주권이 행사하는 어떤 폭력행위도 이 사실을 세상에서 지울 수는 없을 것이다” (9) 물론 삶의 취약성에 대한 인식이 폭력적 공격성으로 표출되지 않고 상호의존적 공생의 윤리로 나아가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상충하는 이해집단들이 서로 충돌하고 경합하는 정치의 장에서 윤리적 명령을 실천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실현 불가능한 이상으로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윤리가 정치에 부단한 압력을 가해 정치의 자기 혁신을 요구하지 않는다면, 정치가 정치 공학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을 길은 없을 것이다. 그 경우 민주주의는 형식적 절차만 남은 형해화된 제도에 불과할 것이고, 공론장에 정치 기술자들과 열에 들뜬 대중들의 시끄러운 소음만이 울려 퍼질 것이다.

 

이명호 경희대학교 교수, mhlee@khu.ac.kr

묻고 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