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고 답하다
메타버스

메타버스와 메트릭스 그리고 유행병에 대하여

차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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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낙원인가 사막인가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Welcome to the desert of real)."세기말, 1999년 영화 <매트릭스>의 주인공 네오는 꿈 같은 가상현실에서 벗어나 피부와 근육으로 실감하는 진짜 세계로 넘어온다. 네오는 빨간 약과 파란 약 중 하나를 선택할 것을 요구받는다. 푸른 약을 선택하면, 이야기는 끝나고, 네오가 “침대라고 믿는 그 위에서 다시 눈을 뜨게 될 것이라고 말해 준다. 다만 붉은 약을 선택하면, 여전히 “원더랜드"에 남게 된다. 우리가 현실이라고 믿었던 게 꿈이고, 진짜 현실은 원더랜드라 불리는 미지의 세계이다. 결국, 네오는 빨간 약을 선택하고, 실재 세계로 간다. 그리고, 이 대사는 네오가 실재 세계로 가자마자 듣게된 환영사이다. 말은 환영사이지만 누더기를 걸친 네오는 그동안 단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극심한 고통을 마주하고 있다. 그가 선택한 실재의 세계라는 게 사막보다 더 고통스러운 공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09년 워쇼스키 자매에게 있어 현실은 그런 고통을 감내하고라도 찾아야 하는 진실이다.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택해야 할 것. 진짜의 가치는 그랬다. 20세기 말의 상상력 속에서 꿈처럼 정교한 가상 세계를 만들어, 이게 꿈인지, 아니면 현실인지 모르게매트릭스 안에 인류를 가둔 쪽은 가해자이고 악이다. 인류를 꿈꾸는 배터리로 만들었으니 말이다. 당연히, 그에 대항해 자유를 쟁취하고자 하는 반군이 선이다. 누더기를 입고 쓰레기 같은 음식을 먹고 있지만 시상하부를 속이는 가짜 영양분을 공급받느니, 치아를 쓰고, 턱을 움직여'진짜'를 먹는 게 낫다고들 말한다. 가상현실은 속임수이고, 실재 세계가곧 진실이라는 커다란 '믿음'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매트릭스는 언제 어디에나 있다"는 모피어스의 말은일종의 경고이다. 우리가 각성한 채로 살아가지 않으면 매트릭스의 노예로 살아갈 수 있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각성한 자들은 모두 꿈을 깨고 황무지 같은 현실로 나아간다. 그런데 이쯤되면 한 가지 질문이 가능해진다. 왜 '진짜'가 더 나은 것인가? 어쩌면 위장된 행복보다 진짜 고통이나 불행이 낫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실재의세계를 우위에 둔 채 만들어진 이데올로기적 프로그래밍 아닐까? 그 역시도, 하나의 허상, 허구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라는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매트릭스>는 하나의 전제 없이는 불가능한 체계이다. 그 전제는 바로 자유의지, 가상 세계의 삶이 사람들의 선택이 아닌억지로 부여된 것이라는 전제 말이다. 문제는 '진짜'가 아니라 자유다. 그리고 이는 진짜, 가짜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것을 선택하는 인간의 행위, 그 의지에 우리가 소위 인간의 가치 및 인간성이라 부르는 것의 요체가 담겨 있다고 믿는 인본주의 사상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인간성은 물리적 쾌락이나 감각적 행복감을 넘어서는 어떤 정서적 고양과 향유 가운데서 형성된다는 믿음, 소위 마음'이라 부를 수 있을 인간의 자유의지를 통해 선택한 삶의 방식만이 진짜라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가상현실의 삶과 사막과 같은 진짜 삶 중에 선택할 권한이 주어진다면 그건 어떨까? 기계에 에너지를 제공하는 배터리지만 인큐베이터 안에서 아름다운 인생을 영화처럼 만끽하다 죽기를 만약, 누군가 스스로 선택한다면 말이다. 영화 <매트릭스>에선 이런 선택을 한 인물 사이퍼가 배신자로 지칭된다. 인간성을 포기한 노예이며 속물이고 자신의 쾌락을 위해 동료를 팔아먹은 배신자다. 하지만 그의 고백은 계속 머리 속 한구석에 남아 있다. “이 달콤한 와인과 육즙 가득한 스테이크가 그저 뇌에 전송된 신호에 불과할지라도, 진짜 세계의 형편없는 음식보단 이쪽을 선택하겠다"라고 말이다.
뇌과학자들과 신경생리학자들은 우리가 느끼는 감각이라는 게 실상전기신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사과, 당근, 배추, 소고기 등을 우리가 실제 만지고, 씹는다고 해도 맛은 신체적 반응과 연결된 전기 신호에 불과하다. 사랑은 호르몬의 작용이며 두려움도 생존 반응 중 하나이다. 이에 많은 과학자는 굳이 탄소 발자국을 남기며 환경 재난의 주범이 되느니 오히려 뇌를 속여 가짜를 소비하는 게 지구, 우주를 위해선더 윤리적일 수 있다는 제안까지 한다.
그러니까, 이런 문제가 생긴 것이다. 가상 세계가 우리를 속여서 거길 데려가는 게 아니라 우리의 선택을 통해 접속한다면 그건 억압이나 강제가 아닌 자유의지의 결과물 아닌가? 거지 같은, 사막과 같은 현실보다 오히려 가상현실 속에서 더 나은 삶을 느낄 수 있다" 라면 누더기를 걸치고, 빈민촌에서 나쁜 환경이나 차별, 폭력과 범죄 위협 속에서 살아가느니 차라리 가짜라도 평등하고 안전한 가상현실 속 세계가 더 나은게 아닌가?
이런 가치의 중심이동은 이미 영화 <아바타> 에서 제안한 바 있다. 제임스 캐머런의 영화 <아바타, 2009 > 의 주인공은 신체적 장애를 가지고 있다. 그는 신경망 접속을 통해 아바타로 움직인다. 그는 최종적으로 사랑하는 피조물과 자유로운 육체가 있는 접속된 세계를 선택한다. 우리가 보기에 그는 잠을 자며 꿈꾸고 있지만, 그에겐 그 꿈이 곧 현실인 셈이다. 영화 <아바타>는 주인공이 아바타와 현실적 육체 사이 선택하는 순간을 클라이맥스에 배치했다. 선택이 문제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데, 어느새 세월이 흘러, 2018년 <레디 플레이어 원 > 쯤 되면 선택은 고민할 여지가 없는 디폴트값으로 제시된다. 이미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은 문제도 아니다. 가상현실 속 세계가 더 낫다면 시궁창 같은 현실보다 훨씬 더 낫다가 이미 정언명제가 된 세계인 셈이다. 이를 입중하듯 가상현실 세계의 이름은 "오아시스", 즉, 낙원이다. 사막으로 불렸던 가상현실이 어느새 낙원으로 불린다. 아니 우리는 이제 더 이상 가상현실 세계를 사막이라 여기지 않는다. 사막이 아니라 낙원으로 여기니 그 이름이 오아시스인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이름은 곧 우리의 태도와 자세, 그것에 대한 반응을 압축한 결과물이다. 이제 가상현실은 진짜를 참칭하는 위조된 세계가 아니라 현실의 결핍을 메워주는 낙원이다. 자, 사실 우리는 이미 메타버스 이야기를 다했다. 새롭게 등장한 용어 같지만 이미 우리는 이름은 가지진 않았으나 존재했던 '어떤 것을 충분히 경험하고, 접촉하며 살아왔다. 메타버스란다만 그렇게 경험했지만 아직 이름이 없었던 어떤 개념, 그 개념에 대한 새 이름일 뿐이다.
메타버스는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미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의 상상과 허구 속에 존재해왔다. '메타버스'라는 이름을 부여받지 못했을 뿐, 이미 존재해왔던 것이다. 김만중 <구운몽>의 꿈도, 복숭아나무가 풍성하게 자란 도원도, 샹그릴라나 유토피아도 사실 다 메타버스였다. 다만 가장 큰 차이가 있다면 우리가 기술적 도움을 통해 그것을 마치 사실처럼 감각하고 재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때론 악당처럼 때론 구원처럼, 때론 악덕 업자이기도 때론 구세주이기도 했던 허구적 가상의 세계가 메타버스로 우리 눈앞에 재현되기 시작했다. '메타버스, 그것은 사실 우리가 사막이자 낙원으로 그려 온 아주 오래된 미래이다. 문제는 그것을 여전히 낙원으로 보느냐 아니면 사막으로 보느냐일 뿐이다.

2. 메타버스 혹은 페르소나의 세계

메타버스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92년 닐 스티븐슨의 SF 소설 스노우 크래시 (snow crush)」였다. 닐 스티븐슨이 발명한 용어는 메타버스 뿐만이 아니다. 영화 제목으로 더 잘 알려진 '아바타'라는 개념 역시 닐 스티븐슨의 소설에 먼저 등장했다. 아바타는 원래 힌두어로 '하강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Avatara에서 기원했다고 한다. 신이 하강한 무엇,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아이돌이나 성상을 뜻하는 이미지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신은 개념은 있되 그 실체는 없다. 우리가 감각으로 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이 하강해 무언가로 나타나야만 한다. 그게 바로 아바타이다. 즉, 진짜 개념, 이데아를 대신하는 실재, 이미지 등을 내포한 개념이 바로 아바타인 것이다. 한편 메타는 '넘어서, 위에 있는, 초월하는 등의 의미를 가진 접두사이다. 형이상학이 metaphysics인 것도 아마 물리학을 초월하는 무엇이기 때문일 것이다. 문학전공자나 영화전공자들에게는 메타소설, 메타영화 등 그 매체 자체에 대한 자기 반영성의 장르를 의미하는 접두어로 이해되기도 한다. 메타버스는 그 meta와 우주, 세상을 뜻하는 universe의 합성어이다. 메타버스란 물리적 현실을 초월하는 개념적 현실, 현실의 이데아와 유사하다.
여러 영화들에서 메타버스 개념이 사용되고 있듯이 메타버스는 우리에겐 온라인 혹은 가상현실 세계로 이미 체감되고 있다. 용어가 일반화된 게 요즈음이지 개념은 이미 우리 주변에 상재해 있었던 셈이다. 메다버스라는 용어가 학술 용어가 소설적 용어가 아닌 일반적 상식 개념이 될 만큼 이미 메타버스가 우리 생활 속에 깊숙이 침투해 있다. 그렇다면, 우리 생활 속의 메타버스란 어떤 것일까?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다양한 인터넷, 온라인 공간 속 정체성이 곧 상용화된 메타버스라고 보면 된다. 이를테면, 최근 다시 부활할 것으로 주목받고 있는 싸이월드가 그렇다. 2000년대 초반, 인터넷 공간에 홈 (집)을 만들고, 도토리라는 가상화폐로 음악을 구입하고 공간을 꾸미는 인테리어를 하며, 거기서 새로운 사교유형인 일촌관계를 형성했다. 일상생활 속 인간관계와 연장되는바도 많았지만 싸이월드에만 존재하는 새로운 사회적 관계들도 있었다. 그게 바로 우리가 지금 경험하는 메타버스의 한 예이다.
싸이월드가 사랑받았던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스스로 원하는 이미지를 연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제한적이었지만 음악이나 별명, 인테리어 등을 통해 원하는 제2의 자아를 만들어 꾸밀 수 있었다. 진짜 세계만큼이나 중요한 온라인 사회관계도 마련되었다. 아바타를 사용하는 인터넷 채팅 프로그램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는 1인 미디어, 개인 미디어의 기반 역시 이 다른 혹은 자아의 확장 및 창조력과 연결된다. 메타버스는 말하자면 인류가 아주 오랜 기간 동안 갖고 살아가던 질문, 진정한 자아란 무엇이고 타자에게 보이고 싶은 자아는 어편 것인가의 질문과 직결되어 있다. 메타버스 공간 안에선 우리가 원하는 자아, 그리고 원하는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
스티븐 스필버그에 의해 영화화된 소설 〈레디 플레이어 원>의 공간도 그렇다. 비록 현실에선 컨테이너 빈민촌, 15명의 식구와 함께 작은 트레일러를 나눠 쓰는, 자기 공간이라곤 작은 침낭 하나 밖에 없는 인물 파르지팔이지만 에물레이터를 통해 오아시스에 접속하면 무적의 레이서가 된다. 영화 속 세계는 현실이 아니라 주로 오아시스 속 세계를 재현하고 있다. 오아시스 안에는 학교, 클럽, 도서관, 백화점 등 현실에 있는 모든 게 다 있다. 그런데, 오아시스 속 학교에 등교하는 학생들은 자기 이미지를 스스로 선택해 제시할 수 있다. 그래서, 피부색이 검은 친구는 자신의 아바타를 백인으로 설정한다. 몸이 불편한 소녀가 남자처럼 연출하기도 하고, 왜소한 아이가 어마어마한 거구로 자신을 설정해놓기도 한다. 오아시스 속에 연출된 자아는 현실의 자아를 고스란히 반영하는 이미지가 아니라 되고 싶은 모습. 이상적 모습에 더 가깝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그 세계가 현실의 실감을 빼앗은 사막이었다. 면 레디 플레이어 원>에서의 오아시스는 현실의 결핍을 채워주는 낙원이다. 그 보충은 현실에서는 거의 불가능하지만 메타버스 세계 오아시스에서는 쉽게 해결 된다. 이 낙원은 인류가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의 다른 자아를 상상함으로써 현실의 결핍을 보상하던 것과 다르지 않다. 유발 하라리가 그의 '호모 데우스에서 말했듯이 이야기하는 자아는 경험하는 자아가 느끼는 결핍을 허구적 재구성으로 메꾸고자 한다. 이야기하는 자아란 그런 점에서 상상과 재구성을 통해 현실적 자아의 모자란 부분을 부지런히 설득하는 그런 완충작용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메타버스는 그런 의미에서 인류가 아주 오랫동안 관리해왔던 대안 세계의 다른 이름에 불과할 수도 있다.
연극에서 가면을 뜻하는 페르소나 (persona)는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며 가질 수밖에 없는 다양한 상황적 자아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메타버스는 기술적으로 온라인 혹은 가상현실에서의 경험이 가능한 세계에서의 다양한 상황적 자아의 구체적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다양한 자아가 추상적인 의미였다면 메타버스에서의 페르소나는 구체적으로 구현된다.
유형화된 방식으로 말해보자면, 메타버스는 크게 네 가지 유형으로 경험될 수 있다. 증강현실, 라이프로깅, 가상 세계, 거울세계가 그것이다. 증강현실은 한국에서도 한동안 유행했었던 포켓몬 채집과 같은 형태라고 보면 된다. 카메라를 어떤 장소에서 켜면, 어떤 대상이 마치 존재하듯이 시각화되는 것이다. 가상 세계는 우리가 게임체험 장소에서 고층 건물에서 케이크 자르기, 잠수함 타고 해저로 내려가는 것을 해 보는 그런 경험을 생각해보면 된다. 말 그대로 가상의 세계를 VR 안경 등의 도움을 통해 진짜처럼 체감해 보는 것이다. 거울세계는 우리가 거울을 통해 스스로를 보면 나를 비롯한 세계가 반영되는 현상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가 거울 속에도 고스란히 존재한다. 우리가 흔히 메타버스라고 이야기할 때 대안세계를 생각한다면 이 거울세계를 연상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마지막이 더 흥미로운데 바로 라이프로깅 (liferlogging)이다. 우리는 어느새 기계, 온라인, 빅데이터 아카이브에 나의 하루일과, 체형, 라이프스타일, 건강패턴 등의 자기 정보를 자발적으로 제공하고 있다. 페이서 (pacer) 같은 앱에 하루의 동선과 걸음 수를 남기고 심박수를 기록하며, 생리 주기도 꼬박꼬박 제공한다. 어마어마한 빅데이터를 우리 스스로 제공하고 있는데, 그 데이터를 통해 거꾸로 '나'라는 사람을 한 명 재구성 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 공간 역시 메타버스이다.
복잡한 이야기 같지만 쉽게 말해서, 나의 다양한 페르소나들의 기록, 그게 바로 메타버스이다. 문제적인 것은 이 오래된 페르소나에 대한 욕망이 코로나 19라는 변수와 만나 매우 빠르게, 그리고 놀라운 흡수력으로 일상의 근간을 바꿔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메타버스 학교 온라인 클래스에 출석해서 수업을 듣고, 메타버스 입학, 졸업식이 이뤄지며 온라인 회의나 강연은 어느새 일반화되어 버렸다. 이젠, 메타버스가 우리 삶의 일부가 되었고, 메타버스 속 페르소나가 이상적 재현이라기보다. 그냥 현실적 나, 아이디 카드와 주민등록번호를 가진 나의 연장 선상인 경우가 발생한 것이다. 2년 전만 하더라도 낯설게 여겼던 메타버스를 지금 매우 친숙하게 느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터넷 접속을 통해 일상생활 특히 반드시 대면으로 이뤄져야만 했던 '일' 혹은 '공적 영역'까지 빠르게 대체해 나가고 있다. 자연스러운 시간의 흐름에 맞춰졌던 변화의 속도가 코로나 19로 인해 거의 멀미가 날 정도로 급속하게 변화하고 있다. 오프라인, 대면 생활이 빠른 속도로 메타버스로 이주 중이다. 문제는 방향이 아닌 속도다.

3. 대안의 힘 - 코비드 19의 출구

"메타버스의 시대가 오고 있다. NVIDIA의 창립자 겸 CEO인 잰슨 황이 2020년 메타버스 시대의 도래를 선언한 이후, 메타버스는 일상에서도 사용되는 용어가 되었다. 메타버스의 세계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SF 영화나 소설에서 보던 가상 세계의 일상화라고 할 수 있다. 아직은 낯설고 황당해 보이는 메타버스가 일상에 성큼 다가오게 된 실질적 이유는 바로 CONID 19, 코로나 19의 대유행 때문이다. 그전까지만 해도 메타버스는 앨런 머스크나 마크 저커버그 등 IT 업계의 괴짜 CEO들이 자주 사용하던 선언적 문구에 불과했다. 현실화되긴 했지만 아직 일상적이라고 하긴 어려운 앨런 머스크의 우주 왕복선처럼 미래에 더 적합한 단어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메타버스 세계에서의 경험이란 대개 간접체험이다. 고글을 끼고 경험하는 가상현실은 시각에 의존한다. 테슬라 햅틱으로 대표되는 착용 기구들이 촉각 등 다른 감각들을 조금씩 끌어들이고 있기는 하지만 지금 현재 가능한 체험은 거의 시각에 의존하고 있다. XR(extended Reality) 도구인 오큘러스 프라임도 마찬가지이다. 훨씬 실감 나는 체험을 주지만 착시를 기반으로 한 시각적 체험이지 영화 속 아바타나 매트릭스 접속처럼 누워만 있어도 전신의 감각이 접속되는 수준은 아니다. 레디 플레이어 원 > 처럼 모든 감각을 동원해서 완전히 접속하는 풀다이브 형태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이 체험은 3D 영화가 우리 영화 생태계를 완전히 바꿔줄 것이라 기대했던, <아바타> 등장 이후의 들뜸과 닮아있다. <아바타>가 전 세계적인 홍행과 성공을 거둔 이후 많은 영화들이 3D 영화가 영화의 미래라고 선언했다. <슈렉>과 같은 대표적인 애니메이션 성공작들이 3D로 후속편을 냈고, 게임을 원작으로 한 영화들이 어마어마한 제작비를 동원해 3D로 제작되어 개봉되었다. 그러나 결과는 기대 이하였다. 사람들은 아직은 완벽하지 않은 3D 글래스가 영화에 대한 몰입감을 훼방한다고 하소연했고, 심지어 양안의 시력차로 인한 울렁거림이나 두통을 호소하기도 했다. 2D 흔히 우리가 보는 영화의 몰입감은 시각적인 것이 주가 아니라 바로 이야기를 통해 이뤄진다. 우리가 흔히 서사라고 부르는 내러티브 구성은 인류가 오랜 기간 동안 몰입감을 높이기 위해 발명하고, 개발하고, 수정해서 성취한 공감의 결정체이다. 공감은 우연한 산물이 아닌 기술적 결과물인 셈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미학서 『시학』을 보면 공감이 얼마나 정교하게 건축된 감정의 결과물인지 알 수 있다. 극작가는 관객, 독자의 공감을 얻기 위해 매우 계산된 방식으로 인물을 형성하고, 그 인물의 행동과 선택을 조율한다. 볼거리를 의미하는 스펙터클 즉 시각적 자극은 서사적 몰입감을 최고조로 높이는 일종의 향신료나 악세사리일 뿐이다. 볼거리로서의 놀라움은 자극을 줄 뿐 진정한 공감으로 이끌진 못한다. 순간적 놀람이라는 것이다.
이는 곧 이제 막 상용화되기 시작한 메타버스 산업이 어떤 방식으로 가야 하는지 암시를 준다. 코로나 19 이후 영화관 방문객은 줄었지만 OTT 플랫폼 가입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이야기를 소비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 중 하나이다. 나는 이를 가리켜 호모 내러티브, 서사본능이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단순히 흩어져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몰입하고 집중할 수 있는, 구성력을 갖춘 이야기를 원하고 빈 틈을 불편해 하며 채우고자 하는 것이다. 개연성이나 필연성은 훈련받은 스토리텔러에게 요구되는 기본 덕목이지만 독자, 관객을 비롯한 서사 소비자들 역시 이미 알고 있고, 적용하는 기본적 능력이다. 종교도, 국가에 대한 사랑도, 이데올로기적 모든 것들은 사실 바로 다 네러티브다. 사람들이 매료되는 것은 박람회 급으로 새로운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바로 내러티브와 결합한 기술이다.
실감 나는 기술이야 과학자들이 제공하겠지만 내러티브는 인문학적 역량과 결부될 수밖에 없다.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면서 전폭적 호기심과 두려움이 폭발하지만 캐즘(chasm)을 지나 결국 서사와 결합하지 못한 기술은 사라지고 만다. 여기서 다시 한번 돌아보자. 메타버스는 어떻게 기술로 상용화 될 수 있었나? 세상에 없던 메타버스라는 개념을 창조한 자는 누구인가? 바로 닐 스티븐슨과 어니스트 클라인이었다. 그들의 소설을 통해 사람들은 메타버스를 상상하고 그 상상이 현실로 하나씩 기술적 실현에 성공한 것이다.

4. 범죄 인권, 사회의 문제 - 여기의 문제가 곧 거기의 문제

메타버스를 통해 상용화된 것 중 매우 주목할 만한 점은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하나는 디지털 문화에서 점점 사라져 가는 원본성의 부활이다. NFTINon-Fungible Token) 기술이라 불리는 블록체인 기반의 인중기술은 복제기술이 일반화되고 난 이후 사라진 작품의 원본성, 아우라(aura)의 복원을 시도하고 있다. 발터 벤야민이 말했듯이 대중 예술의 도래 이후로 사라진 아우라는 작품에 대한 소유권과 연관되어 있다. 유일무이한 작품의 분위기인 아우라는 그 작품이 단 하나일 때 가능하다. 차이가 있다면 아우라의 원본성이 손과 눈, 감각을 통해 만질 수 있는 실체를 상정하고 있다면 NFT는 말그대로 '약속'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백만개의 아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디지털 복제본이 있더라도 어느 하나가 NFT를 가지고 있다면 그게 원본 대접을 받는다. 화폐처럼 과정과 시스템을 통해 하나 밖에 없는, 유일무이한 원본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이는 매우 흥미로운 장난이자 약속 같은 것인데, 만약, 뱅크시가 온라인에 작품을 게재하고 이것이 원본이다라며 한 사람이 가진 단 한 작품에만 NFT를 부여한다고 해 보자. 우리가 온라인 상에서 모두 똑같은 작품을 다운로드해서 소유한다고 해도, 토큰이 없으면 나 사본으로 취급된다. 마치, 전자거래를 할 때 우리의 공인인증서가 단 한 사람만 신분을 증명하듯이 무형의 자산입에도 정체성과 차별성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 이는 수많은 아바타, 대안자아, 이미지를 통해 현실적 자아의 무한한 확장성을 추구하던 근본적 꿈과 거리가 있다. 인류의 근대 문명은 개인이라는 가치 위에서 성립되었다. 개인을 뜻하는 단어 inctividual은 둘로 나눌 수 없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여러 자아로 나뉘는 걸 긍정하는 게 아니라 그 중심이 되는 아이덴티티(identity)를 찾는 게 근대 문명의 핵심이다. 의심할 수 없는 나, 나를 나일 수 있게 하는 정체성, 언제 어디서나 나 임을 인지하는 자기동일성, 결국 이 단단한 자아 위에 근대의 문화가 펼쳐진 것이다.
메타버스의 자아 개념은 그런 점에서 애당초 원본성이나 둘로 나눌 수 없는 것과의 결별로부터 가능해질 수 있다. 이는 한편, 현실 세계에 만연한 양극화나 계층적 이원화와 차별성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여겨지던 메타버스가 소유권의 등장과 함께 결국 똑같은 현실의 반영에 그치는 것은 아닐지 우려가 커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첫 번째는 이미, 상용화된 메타버스 공간 '제페토'에는 그 세계 안에서 유통되는 화폐를 갖고 있다. 그것을 가져야만 꾸미고, 이동하고, 사회적 존재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물론 매일 출석을 열심히 해서 벌어들이는 기본 자금도 있지만 그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가지고 있는 혹은 구입한 스톤에 따라서 헐벗은 아바타와 명품으로 꾸민 아바타가 구분된다. '제페토'는 사진 같이 찍기라는 사회적 행위로 그 메타버스 내 영향력이 결정되는데, 당연히 화려하고 사치스럽게 꾸민 아바타에게 촬영의 요구와 기회가 넘친다.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 같은 메타버스, 소셜 미디어에서 이미 경험했던인플루언서의 힘, 영향력의 양극화가 여기에서도 반복적으로 재현된다.
두 번째는 현실에서의 차별 혐오가 대안 세계인 메타버스에서도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온라인 게임에서는 게임 능력이 곧 그 존재의 가치가된다. 인간은 둘 이상 모이면 사회적 활동을 하며 자연스럽게 위계를 나눈다. 현실에서의 위계와 메타버스에서의 위계가 다를 뿐이지 위계는엄연히 존재한다.
세 번째는 성폭력과 같은 문제가 온라인에서도 발생할 뿐만 아니라 더지독하게 발생한다는 점이다. 디지털 정보의 특성상 완전한 삭제나 소각이 불가능하기에 온라인 기반 메타버스 속 범죄의 피해는 훨씬 더 영구적이며 치명적이다. 디지털 자료 특성상 누군가 다운로드를 한다면그 자체가 또 하나의 원본이 되어 파생의 기원이 된다. 2020년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N번방 사태도 메타버스 범죄의 일종에 해당한다.그들은 메타버스 공간에서 한 개인을 수치심을 주면서 성적 노예를 만들고 범죄에 이용했다. 현실적 자아와는 다른 '박사'와 같은 아바타를 만들고 경제적 수익과 불합리하고 왜곡된 성적 욕망을 채운 것이다. 메타버스에서의 피해는 개념적이며, 이념적인 것에 멈추지 않는다. 몇 명의피해자는 목숨을 잃었고, 심각한 후유증에 지금까지도 시달리고 있다.온라인 가해자들은 실제 피와 살을 가지고, 주민등록번호로 일상을 영유하던 실제 인물의 삶을 파괴했다.
영화 <바닐라 스카이>에는 자기 스스로 가상현실 세계와 결별하는 한 남자가 그려진다. 현실 세계에서 파괴적 교통사고를 겪은 그는 얼굴과 몸 전체에 회복 불가능한 상처를 입는다. 그러자 그는 완전히 사실처럼 느껴지는 꿈을 제공해 주는 프로그램사와 계약한다. 하지만 결국, 그는 행복한 꿈의 세계로부터 탈출하고자 한다.
메타버스는 이미 다가와 있는 미래이다. 지금 많은 기술자, 과학자, 경영인 들이 메타버스에 화폐, 돈, 이익과 기회가 있다며 달콤하게 속삭이고 있다. 그러나, 메타버스는 더 나은 삶을 체험하기 위한 기술적 도구일테다. 그 자체가 삶이 아니다. 메타버스, 돈과 이윤의 문제와 좀 떼어놓고 생각해 볼 일이다.

강유정

비평가, 강남대 교수. 저서 「타인을 앓다」, 「영화 글쓰기 강의』 등

19) 프랭크 코트럴 보이스 글, 칼 헌터 · 클레어 레니 사진, 이유림 옮김, 『잊을 수 없는 외투』(논장, 2017)에서 이 문장의 힌트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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