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고 답하다
SF

SF적 상상력과 여성주의는 어떻게 함께 하는가

차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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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SF는 어떻게 여자들의 놀이터가 되었는가?

국내에서 SF의 독자층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교보문고 판매 집계에 따르면 2017년 이래 국내 SF의 인기가 급등하는 추세다. 2017년에는 9.6퍼센트였던 SF 판매점유율이 2019년에는 35.7퍼센트로 치솟았다. 2020년부터 지속되고 있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강제된 재택근무와 자가격리는 아이러니하게도 생각할 시간을 선물했다. 독서량은 증가했다. SF는 베스트셀러 대열에 가세했다. SF적 상상력은 문학뿐만 아니라 예술/기술 분야 전반을 휩쓸고 있다. SF가가한 충격으로 보수적인 '순수'문학의 방화벽은 무너지고 있다. 진화신화의 작가 김보영이 무려 2015년까지 SF라는 이유만으로 문예지의 지면을 얻기 힘들었다고 토로한 점을 기억한다면 격세지감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오랫동안 '순수 문학의 입장에서 SF는 변방의 장르물에 불과했다. 독서시장에서 인기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싸구려 취급을 받는다. 과거 멜로물을 즐겼던 젊은 여성 독자들이 무시의 대상이었던 것처럼,SF의 수요자는 앞을 추구하는 '고급' 독자라기보다 자극과 재미에 중독된 대중적인 소비자로 치부되었다. 이처럼 B급 장르물로 취급받았던 SF가 문학의 지형도를 변화시키면서 급부상한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겠지만 무엇보다 4차산업 시대 '테크노사이언스'의 대중화와 접근성이다. 그런 현상은 SF의 수용에 자극제가 되었다. SF 작가 김보영은 꼬집어 2016년 이세돌과 인공지능 알파고의대국이 전환의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조류독감, 기후위기, 코로나 팬데믹에 이르기까지 과학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예외적인 비상사태가 빈번히 등장한다. 시공간의 압축으로 이윤을 채굴하다가 주기적으로 공황발작을 일으키는 자본세가 몰고 온 기후재앙, 인수공통감염병과 같은 비상상태는 예외가 아니라 이제 뉴노멀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SF의 주요 소재인 유스토피아 (유토피아+디스토피아)1)는 지금이 아닌 언젠가, 여기가 아닌 어딘가에 대한 '다른' 상상을 하도록 해준다. 만약if이라는 가정 아래 진행되는 SF의 '낯설게하기'와 독자들의 관심사가 서로 부합하게 된 것도 SF의 부상과 무관하지 않다.
영미권에서 SF가 여성들의 놀이터가 된 것은 페미니즘의 영향력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사실 기존 SF(과학소설)는 여자들의 놀이터가 아니라 남자들의 전유물이었다. 테크노사이언스 분야에 열등한 여자들은 SF를 쓸 수도, 즐길 수도 없다는 편견이 심지어 20세기 말까지 잔존했다.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SF는 작가가 남성 필명을 썼던 만큼당연히 남성 작품으로 간주되었다. 한 남성 비평가는 팁트리가 여성작가라면 자기 손에 장을 지지겠다고 호언장담하기도 했다.

제2물결 시기에 쏟아져 나왔던 SF들을 분석한 책이 조애나 러스의 《SF는 어떻게 여자들의 놀이터가 되었나》2)이다. 기존 SF(과학소설)는 유사 과학이란 이름 아래 외계 식민지 개척, 외계인과의 전쟁 등, 낭만화된 남성 영웅들의 정복 서사를 되풀이했다. 마초 남성적 SF 서사들은 대체로 계급, 인종, 젠더, 종교, 종 차별 등을 노골적으로 노출했다는 점에서 일종의 포르노그래피였다. 우주행성으로 공간만 옮겼을 뿐 기존 SF들은 테크노사이언스를 활용한 백인남성인간 중심주의, 제국주의 기획의 상투적인 반복에 다를 바 없었다는 것이다.
온갖 차별에 바탕한 가부장제를 자연화하고 테크노사이언스를 전능한 신처럼 물신화하는 기존 SF는 페미니스트들의 신랄한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제2물결 페미니즘 이후, SF 영토를 두고 치열하게 다툰 결과 SF는 남성들의 전쟁터에서 여성들의 놀이터로 운신의 폭을 넓혀갔다. 페미니스트 작가들은 차별로 넘쳐나는 기존의 SF와는 다른 페미니즘적인 SF를 상상하게 되었다. 탁월한 SF 작가임에 틀림없는 마거릿애트우드가 자신의 소설이 SF로 분류되는 것에 거부반응을 보인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슐러 르 귄은 마거릿 애트우드가 ‘문학계의 게토’에 속하고 싶지 않아서 SF 작가임을 거부한 것으로 비판했다. 그런 비판에 대한자기 변론이 마거릿 애트우드의 《나는 왜 SF를 쓰는가》다. 이 에세이에서 애트우드는 공상과학소설로서 SF와 사변소설을 구별 짓는다. 과학소설이라는 미명 아래 허황하고 터무니없는 SF와 페미니스트 사변소설은 다르다는 것이다. 애트우드에 의하면 사변소설은 아무리 기괴하기 짝이 없는 사건일지라도 그런 일들이 실현 가능하며, 심지어 이미 실현되었을 수도 있는 사건을 다룬다. 그 점에서 현실과는 무관하게 황당무계한 일들이 벌어지는 공상과학소설과는 구별된다고 애트우드는 주장한다. 그런 측면에서 자신이 말하는 사변소설과 르 귄이 말하는 SF는 별반 다르지 않다면서 르 귄을 오마주한다.

2. 과학소설Science Fiction에서 사변소설Speculative Fiction로

페미니스트들이 SF를 사변소설로 개념화한 것은 기존의 지구남성인간이성 중심주의의 억압에서 벗어나려는 해방 기획에 대한 열망과 다르지 않았다.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는 체체파리의 비법>에서 한 남성이 한 여자를 죽이면 살인에 해당하지만 한 사회 전체가 여성을 살해한다.면, 그런 페미사이드는 문화가 된다고 신랄하게 지적한 바 있다. 또 다른 단편 〈보이지 않는 여자들>에서 지구를 탈출하려고 외계인을 따라 나서는 모녀를 보면서 두 여자 모두 자신의 남성적 매력에 빠져들었다고 줄곧 착각해 왔던 마초 남성 기장 돈Don은, 위험한 외계인을 선택하면서 지구인 남성의 보호의 손길을 떨쳐내는 여자들에게 분노한다. 그러자 나이 든 여자가 외계로 떠나면서 답한다. '이 지구상에서 남성인간보다 더 위험한 존재가 있을까?'라고. 그녀들은 젠더 평등은 현재의 지구상에서가 아니라, 미래의 다른 행성에서나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사변소설은 과학이란 이름의 하드코어 테크노사이언스에 엄격하게 구속되지 않으면서도 인간 종의 삶에 대한 성찰과 사고실험을 확장하는 소설을 의미한다. 그것은 세계에 대해 성찰하는 사변적인 학문으로서 과학소설이다. 그렇게 말한다면 기존의 SF는 사변소설에서 추방되는 것이 아니라 사변소설의 넓은 우산 아래 포함된다. 기존 SF를 낯설게 만들어서 고쳐 사용하고 재활용함으로써 문화적인 쓰레기를 만들어 내지 않는 것 또한 사변소설의 세계 짓기 방식의 하나다. 우산 개념으로서 사변소설은 엄격한 과학소설에 방점을 찍지 않으면서 기존의 문화를 낯설게 볼 수 있는 출구를 페미니스트들에게 열어주게 된다.
과학적 사실 허구적 이야기의 경계를 허물고 있는 다 해러웨이 식으로 말하자면 사회주의 페미니즘 또한 사변소설인 셈이다. 역사의 발전 법칙을 사회주의 과학우화로 삼는 것이 해러웨이 식 사회주의 페미니즘이라고 한다면, 그것[Socialist Feminism: SF] 또한 SF로 표현된 이야기의 정치경제와 다르지 않게 된다. 그런 맥락에서 해러웨이는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사변소설이라고 주장하게 된다.
SF가 '문학 차별주의자'들에 의해 문학의 변방으로 밀려난 것은 근대적 정화 작업의 하나로 볼 수 있다. 근대적 문학 장르인 리얼리즘은 문학의 순수성, 자족성, 총체성을 위해 싸구려 혼종 장르들의 침투에 단단한 방어벽을 설치했다. 순수 문학으로서 리얼리즘은 잡다한 장르물, 고딕, 판타지, 공상과학소설이 침투하는 것을 막아냄으로써 문학텍스트가 혼종 바이러스로 인해 오염되는 것에 저항했다. 그런 오염원들은 근대적 합법칙성/총체성/자족성을 교란시키는 혼돈, 우연성, 무질서, 비합리가 범람하도록 만든다. 근대 계몽주의 이후 미신으로 몰려난 것들, 애니미즘, 샤머니즘, 범신론, 주술, 마술, 페티시, 환각, 환상이 넘쳐나는 SF 장르는 리얼리즘'만'이 역사의 객관적 진리를 포착할 수 있다는 독점적 진리 주장을 근본에서부터 붕괴시킬 소지가 다분하다.
순수가 아니라 난잡을 선호하는 페미니스트들은 평가절하된 SF에 대한 관심을 여성들의 이해관계와 연결시켜 새로운 놀이터로 삼는다. 테크노사이언스와 결탁한 가부장제 사회를 낯설게 만드는 데 사변소설만큼 탁월한 장르도 드물다. 가부장제적 이성애가 자연의 질서로 군림하고 과학 만능주의가 무소불위의 인간 중심주의로 치닫는 것을 변혁시킬 만한 장치들을 페미니스트들은 사변소설에서 찾았던 셈이었다. 출판 이후 싸구려 고딕으로 취급되면서 망각되었던 메리 셸리의《프랑켄슈타인 박사를 SF의 효시이자 SF의 고전으로 만든 것도 이런 노력의 하나다.
반다나 싱은 사변소설 선언에서 사변소설은 인류가 상실한 경이감을 회복하고, 비인간 동물, 자연, 우주 등 모든 행위자들 사이의 관계망을 회복하려는 소설이라고 정의한다. 그것은 인간들 사이의 관계뿐만 아니라, 자연의 행위자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자연은 기꺼이 인간의 손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의 상호관계성 속에서 작동하는 행위자가 된다. 이렇게 본다면 지상의 모든 존재는 관계의 그물망에 얼기설기 걸린 그물코들이다. 그런 관계의 사슬에 주목하는 사변소설은 앞에서 실천으로, 인식에서 존재들의 윤리로 나아갈 수 있는 변혁적 잠재력을 가진 문학적 장치가 된다. 단지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세계의 변혁 가능성에 열려 있다는 점에서, 사변소설은 사실 힘이 세다. '순수 문학이 인정하는 인정하지 않는.

3. 불구의 시간성에 대한 다른 상상

사변소설은 과학사가 밝혀낸 시공간에 대한 페미니즘적인 탐색의 장이기도 하다. <시간의 화살, 시간의 순환>에서 스티븐 제이 굴드는 진화의 시간은 균질적이고 점진적인 시간의 축적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돌연변이와 같이 비균질적으로 비약하는 우연적 시간성과 영향을 주고받는다고 말한다. 진보적 시간이 시간의 화살처럼 불가역적이고 직진하는 시간이라고 한다면, 순환적인 시간은 뫼비우스 띠처럼 시간의 선후가 혼재된 심원한 시간에 대한 은유다. 인류의 역사가 진보한다는 믿음은 인간이 역사의 우연성을 통제할 때라야만 가능해진다. 하지만 순환적 시간의 관점에서 역사의 진보는 우연성에 지배받는 우화와 다르지 않다.
김보영의 <7인의 집행관>은 직선적 시간성을 비틀어서 불구화하는데 능란한 사변소설이다. 흑영은 형벌로서 여섯 번 사형집행을 당한다. 그는 매번 전생의 기억과 경험을 망각하고 나의 정체성으로 규정할 만한 모든 것을 잃고서 여섯 번 다른 차원에서 여섯 번의 죽음을 맞이한다. 매번 변주되는 서사와 더불어 다른 시간대가 반복된다. 이런 서사들은 우연성의 개입에 의해 예정된 영겁의 인연과 운명이라 할지라도 불확실성 속에서 어떻게 전개될지 예측 불가능해진다.
불구의 시간성'은 휘어지고 구부러진 시간성에 대한 은유다. 휘어지고 구부러진 불구의 시간성 자체가 SF의 서사를 추동하는 추진력이 된다. SF는 타임루프, 타임워프, 타임리프, 평형세계 등과 같은 시공간의 실험이 자유로운 장르다. 그렇다면 불구의 시간성으로 사변소설은 어떤 이야기들을 하고 있을까? 이야기는 시간의 전개와 더불어 진행될 수밖에 없는데 그런 이야기의 시간을 불구화하면 당연한 현실을 낯선고 징후적인 것으로 읽어내는 것이 가능해진다. 옥타비아 버틀러의 <킨>은 앤터벨룸(미국 노예해방전쟁 이전 시기)과 현재가 상호침투함으로서 역사적 과거를 현재의 관점에서 낯설게 만든다.
사변소설이 시간의 불구성이라는 은유에 기대는 것은 장애와 질병을 둘러싼 자본주의적 현재에 담겨 있는 생산, 건강, 젊음, 면역에 대한 강박신경증을 폭로함으로써 어떤 존재는 서로 다른 '속도'로 살고 있음을 드러내려는 욕망과 연관되어 있다. 이른바 비장애인들의 기계적 규범적 시간성'에서 볼 때 자신들의 속도에 따라 사는 자들은 부적절한 부적격자들이 된다. 각각의 개인들이 경험과 환경에 따라 고유한 시간성을 가진다는 사실은 무시되어 버린다. 이런 맥락에서 불구의 시간성이란 다름의 시간성 속에서 전개되는 '다른' 서사에 대한 은유다.
그것에 주목한 사변 서사들은 다른 인지 세계이자 다른 운영체계로서 차이와 다름을 포용한다. 어떤 사회에 속하는가에 따라 불구는 장애가 되지 않을 수 있다. 장애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불편의 축적으로 고착된 불평등에 의해 발명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김보영의 <지구의 하늘에는 별이 빛나고 있다>는 다른 행성에서 지구별로 여행 온 누나가 고향 행성에 남아 있는 남동생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이다. 화자인 '나'는 특수기면증자다. 자신들의 행성에서 그것은 질병이다. 부모님들은 '넌 고칠 수 있어, 포기하지 마'라고 끊임없이 말한다. 서른이 넘을 때까지 넌 고칠 수 있다는 소리 때문에 자신이 고쳐야 할 질병과 장애에 시달리는 비정상적인 상태임을 '나'는 오히려 매번 확인받는다. 하지만 지구별에 당도해 보니 지구인들은 저녁이면 적어도 여덟 시간씩 의식을 잃는다. 모든 지구인은 기면증자였다. 그런 지구인들에게 기면중은 병이 아니다.
이처럼 건강 질병, 장에 비장애, 정상/비정상이 상황적인 맥락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면, 불구는 하나의 ‘정상성’을 목표로 끊임없이 고쳐나가야 하는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게 된다. 다른 감각지각으로 살아가는 신경다양증자들은 비정상이 아니라 하나의 신경증으로 고착된 둔감한 신경전형증자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감각 지각하는 자들이다. 그들이 자기만의 움벨트 속에서 사는 자들임을 보여주는 자가 <어둠의 속도>에 등장하는 아스퍼그 청년 루이다.
김보영의 단편 <우수한 유전자>는 불구의 시간성을 통해 반전 플롯을 전개한다. <우수한 유전자>에서 전개되는 미래 세계는 공간의 계급화에 따라 철저히 분할되어 있다. 우수한 유전자 집단으로서 지배계급의 특권을 맘껏 누리는 스카이돔 거주자들은 바로 그 우수한 유전자, 완벽한 환경으로 인해 퇴보한 것으로 뒤집히게 된다. 이 단편에서 전통적인 민간요법처럼 낙후된 시술들은 스카이돔의 가장 선진적인 의료기술을 이미 능가한 것으로 묘사된다. 그런 현상은 뫼비우스 띠처럼 꼬인 불구의 시간으로 인해 가능해진다.

스카이돔 출신 사회복지사 지훈과 동일시하도록 배치된 시점을 따라서 읽다보면 독자는 키바인들의 무지몽매와 노예근성에 치를 떨게 된다. 그들은 노예로 착취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훈이 알려주는데도 억울해하지도 분노하지도 않는다. 착취당한다는데도 우린 행복하다니까, 라고 안주하는 키바인들의 태도에 분개하는 사람은 오히려 지훈이다. 21세기에 이미 해결된 질병과 장애(스카이돔에서는 더 이상 농인이 없다)를 불결한 위생환경 속에서 원시적인 민간요법과 미신과 무속으로 치료하고자 하는 키바인들을 스카이돔 출신인 지훈(그리고 독자)은 견딜 수 없다. 지훈은 우수한 유전자 성형으로 가난, 질병, 무지가 없는 세상에 이를 수 있다고 역설하지만 키바인들은 그럴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그들을 계몽하려다가 지친 지훈은 "계몽은 위를 올려다볼 수 있는 최소한의 눈이라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나 가능한 것"이라면서 좌절한다.
하지만 마지막 편지에 이르면 이 편지를 보낸 사람이 지훈이 아니라 키바인으로 드러나게 된다. 여태껏 지훈의 시선과 동일시하면서 그의 시선으로 키바인들을 보았던 독자들은 뒤통수를 얻어맞는다. 정신이 번쩍 든 독자는 지훈의 시선에서 어느새 키바인의 시선으로 뫼비우스 띠처럼 꼬여 들어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키바 촌장의 손녀인 나영은 농인이다. 나영은 농인이지만, 목소리가 필요 없는 환경에서 농인은 장애인이 아니다. 나영의 눈에 지훈이야말로 성대의 울림이 아니라 텔레파시로 통화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장애인이다. 이 행성의 시공간에서 우수한 유전자/열등한 유전자, 장애/비장애, 엘리트 남성/농아인 여성, 자연/문화, 미개인/문명인, 전근대적 민간요법/현대적인 의료과학, 전통 탈근대, 순결/오염 등의 경계는 플롯의 반전으로 전복된다. 빗금으로 나눠진 이분법적 경계는 불구의 시간성을 따라 안팎으로 넘나든다. 이 단편은 낙후되고 후진적인 것이 고도로 발달한 테크노과학 사회의 산물이 되고, 가장 선진적인 것이 후진적인 것으로 뒤집히게 되면서 서로의 시간성을 성찰하도록 만든다. 키바에서 장애는 그저 다름일 따름이다. 장애는 결핍, 부재, 손상, 수치가 아니라 상황과 맥락에 따라 다르게 적응하기 위한 진화의 한 형태이자 차이가 된다.
능력주의의 획일적인 속도전은 과거를 뒤돌아보거나 눈길을 옆으로 돌려서 곁에 누가 있는지 쳐다보느라 멈추거나 서성거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오로지 빨리빨리 앞만 보고 달리도록 강제된 사회에서 경쟁하는 사람들은 탈락, 낙오, 배제될지 모른다는 공포와 공황에 시달리게 된다. 불확실한 미래를 장악하려는 욕망은 아이러니하게도 불안과 불편dis-ease으로 귀환한다. 그런 불안과 불편은 비장애 능력 중심주의ableism에서 파생되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근대적 프레임에 미달하는 자들은 부적격자로 처리된다. 그들은 사회에 부담을 주는 집으로 간주된다. 건강하고 장애가 없고 능력 있는 남성 이성애자에 속하지 못하는 여성, 아이들, 이주민들, 트랜스젠더퀴어, 동성애자, 장애인들에게 경멸, 혐오, 시샘, 증오의 짐을 부려놓음으로 재, 능력주의 사회의 정상성은 유지된다. 그런 정상성과 거리를 유지하면서 낯설게 하는 데 SF보다 경제적인 장르를 찾기 힘들다. 그로 인해 우화적이고 교훈적인 페미니스트 사변소설들이 부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다.
사변 서사에서 근대적인 인간이성능력 중심주의에 따라 기획된 이분법적 경계는 허물어지고 있다. 코로나 비상사태는 인간의 취약성과 각자도생의 불가능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인간은 자신의 취약성으로 인해 상호의존적이며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감염되고 변이되는 혼종적 존재다. 인간은 존재의 연쇄사슬 중 하나의 고리에 불과한 종이다. 이 지구상에서 인간만이 가치 있고 인간만이 지구행성의 모든 자원을 독점해야 할 어떤 이유나 명분을 찾기 힘든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세계의 중심이라는 오만이 아니라 타자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취약한 존재라는 겸손한 존재 인식을 기본가로 하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요청되고 있다.

4. 페미니즘의 공유화폐로서 이야기의 힘

사변소설은 취약하고 비체화된 존재들이 함께할 수 있는 공유 서식지가 될 수 있다. 김성종의 <화성의 아이들>은 1957년 우주선 스푸트니크 2호에 실려 우주 미견이 된 실험동물 시베리안허스키 라이카, 불구가 된 화성탐사 로봇 데이모스, 열두 명의 클론이 탔던 우주선에서 유일한 생존자인 '나'가 화성에서 서로의 도움으로 살아남는 이야기다. 클론인 나는 우주로 출발할 때 심지어 임신 중이었고, 어떤 혼성종이 태어날지 알 수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지구 인간들이 실험하다 내버린 우주탐사 실험동물, 임신한 클론, 장애로봇 등의 공생공존은 서로 공감할 수 있는 통로이자 태아-이야기가 있어서 가능해진다. <화성의 아이들>은 미래의 약속을 생물학적 재생산이 아니라 괴상하고 혼종적인 재생산에서 찾는다. 이 단편은 괴상한 친족들을 몬스터 가족으로 묶어주는 기본 통화가 태아임을 보여주는 구원서사다.

김초엽의 지구 끝의 온실에서 지구는 유독한 더스트폴로 절멸의위기에 처한다. 돔시티는 계급적으로 철저히 공간 분할된 사회다. 소수 특권계급은 정화된 공기로 숨 쉴 수 있는 바이오스피어 같은 완벽한 돔시티에서 거주한다. 돔시티 바깥의 거주자들 중에는 유독한 공기에도 불구하고 내성이 생겨 살아남는 자들이 간혹 있다. 내성종들은 돔시티가 진행하고 있는 실험용 사냥감이 될 위험을 피해 말레이시아의 열대우림 속 비밀 정원인 프림 빌리지에 모여든다. 지구 끝 온실에서는 사이보그 식물과학자 레이첼이 더스트폴을 정화시키는 식물을 제작한다. 생존자들은 절멸 위기에 처한 지구행성을 구하기 위해 레이첼이 만든 인조식물인 모스바나를 들고 위험한 세계 속으로 흩어진다. 지구 재건은 특권적인 소수가 아니라 지구 끝으로 내몰린 다양한 국적의 다양한 여자들의 협상과 생존 전략에 의해서 가능해진다. 그 사실은 후세대 연구자 아영에 의해서 밝혀진다.
지구별은 모스바나 식물과 소통할 수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구원이 가능해진다. 모든 생명의 물질적 인프라는 식물이다. 지구의 지속 가는 것은 최악의 상황에서도 내성종이 된 나이지리아 자매 나오미와 아마라, 기노의 마녀들, 약초학자, 아프리카의 식물의 지혜를 축적한 늘은 여자들, 소녀들, 비인간 동물, 여자 기계공 지수, 사이보그 장애식물과학자 레이첼을 묶어주는 공유화폐인 모스바나를 통해 가능해진다.
마무리하자면, 사변소설은 경이로운 존재 인식론적 세계 인식이 가능하도록 해준다. 레이첼처럼 식물의 언어로 세계와 대면하게 된다면, 그것은 하나의 정상성에 따른 획일적인 세계 인식을 넘어서는 페미니즘의 사변적 지평을 열어주는 것이다. 그곳에서 불구의 시간성은 자연적인 질서로 기능하는 가부장제적 정상성을 낯설게 만든다. 둔감한 생존의 기술이 심각한 곤경과 장애에 처하기 전까지 불구의 시간성과 시간의 불구화는 사실 의식되기 힘들다. 페미니즘이라고 하여 하나의 페미니즘은 아니다. 사변소설의 영토에서 다양한 글로컬 페미니즘의 목소리들은 경합하면서도 공감하는 공통의 언어를 발견할 수도 있다. 그런 시공간에서 몫 없는 주체들과 홈 없는 타자들과의 경계 없는 ‘난잡한’ 축제에 함께하는 것. 그것은 중독에 빠져들고, 쾌락에 파괴되고, 감염에 노출되고, 변혁으로 상처 입는 다공성, 혼종성의 지대에 뛰어드는 것이다. 그처럼 불화하고 갈등하면서도 공생을 모색하는 공유화폐가 페미니스트 사변소설이다. 괴상하고 낯설고 경이로운 예술/기술의 혼종 가능성에 주목해 본다면, 다른 이야기들이 가능해진다. 그것이야말로 페미니즘적인 사변소설이 보여주는 응답-능력이자 유쾌한 소란이 되지 않을까 한다.

임옥희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에서 가르쳤고, 현재는 여성문화이론연구소에서 연구원들과 함께 페미니즘에 관한 이론실천공부를 하고 있다. 미래엔 페미니스트 이야기 공동체를 만들고 싶다. 저서로 《페미 - 스토리노믹스》, 《메트로폴리스의 불온한 신여성들》, 《젠더, 감정, 정치》 등이 있다.

1) 마거릿 애트우드는 SF가 유토피아에 많이 의존하지만, 유토피아 안에 디스토피아가 있고, 그곳이아무리 끔찍한 디스토피아라고 하더라도 일말의 희망이 있다는 점에서, 유토피아적인 파편을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양자의 혼성 장르로서 유스토피아Ustopia라는 신조어를 사용한다. <나는 왜 SF를 쓰는가>(양미래 옮김, 민음사, 2016) 참조.

2) 원제는 <여자처럼 글쓴다는 것 페미니즘과 SF에 관한 에세이>다. 원제보다 번역의 제목이 조애너러스의 저술 의도를 더 명료하게 반영한 것처럼 보인다. Joanna Russ, To Write like a Woman.Essays in Feminism and Science Fiction, Indiana University Press, 1995,

3) 여기서 구태어 ‘불구crip’라는 개념을 가져온 것은 손상이나 장애를 얼룩, 수치만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자긍심'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다. 혐오가 실렸던 '퀴어'라는 표현을 그대로 사용함으로써 자긍심으로 만들어 낸 것과 같은 의미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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