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고 답하다
기후위기

환경문제에 대해 재현의 시작

차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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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리 스나이트 마그나손은 <시간과 물에 대하여>라는 책에서 기후정상회의 문제로 모인 어느 과학자들의 모습을 기술하고 있다. 회의에서 한 해양생물학자는 우리의 목표가 지구의 온도를 '1.5도' 이상 상승시키지 않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꺼낸다. 근미래에 지구의 온도가 2도 이상 상승하면 실로 어마어마한 파국이 일어날 터이기에, 1.5도라는 목표만 달성해도 상당히 의미 있는 싸움이 될 거라는 것이 그의 조심스런 주장이다. 유달리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어조로 다짐했던 그의 목표가 다소 충격적인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협력과 전 세계적인 노력 끝에야 달성할 수 있는 그 1.5도의 상승치만으로도 지구 전체 산호의 70~90퍼센트가 사라진다는 점이다. 할 말을 잃게 만드는 이 기후 위기와 미래의 재난 앞에서 마그나손은 다음과 같이 묻는다. '나는 쌍둥이 빌딩이 무너졌을 때,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죽었을 때를 선명히 기억한다. 나의 어머니는 케네디가 총에 맞았을 때 본인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기억한다. 그렇다면 지구의 산호들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졌을 때 당신은 어디에 있었는가?

바다 생명체의 실질적인 터전이 대부분 사멸하게 되리라는 끔찍한 소식이 전해졌음에도 그것은 왜 쌍둥이 빌딩이 무너지고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서거했을 때와 같은 충격적인 '사건'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지 못하는 것일까. 저자는 그 기후 위기가 너무나도 거대하고 근본적인 것이어서 우리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실로 느리고 거대한 시공간의 단위로 진행되어 쉽게 체감되지 않고, 그렇게 직접 감각하지 못하는 일에 대해 우리는 당연하게도 별도의 윤리적 판단을 내리거나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 이미 도처에 '빙하 해빙', '배출가스증가', '지구 온난화', '해수 산성화' 같은 끔찍한 경고음들이 울리고 있지만, 이는 많은 이들에게 의미가 표백된 '백색 잡음'으로 다가오는 듯하다. 분명히 소리는 들리고 그 뜻은 알고 있지만 우리들의 감각과 행동을 급격히 전환시키진 못하는 언어들이기 때문이다.

마그나손은 방치와 부작위로 수많은 산호초를 희생시키자는 결정을 내린 우리들의 폭력에 대해 '생태 학살'이라는 끔찍한 이름표를 붙인다. 노예, 유대인 등을 한 명의 온전한 권리 주체로 인지하지 못했던 권력 집단들의 제노사이드를 떠올려 보면, 자연이나 동물에 새로운 권리를 부여할지도 모를 미래 세대 입장에서는 우리의 행위가 비유가 아닌 실제의 학살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 많은 산호를 희생시키자는 결정을 직접 내린 적 없기에, 학살자들이라는 명명에는 다소 억울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혹 우리 중 누군가는 그런 말을 할 법도 하다. 우리는 정말로 몰랐다고, 그것이 왜 모두 우리의 탓이냐고, 그렇게까지 생각하는 건과잉 반응이라고 지금 당장은 해결해야 될 더 중요한 문제가 산적해 있다고 말이다. 그러나 최근의 문학을 읽으며 우리가 배웠던 일들 중 하나는 모를 수 있다는 것 또한 권력의 일종이며, 그 속에는 순수한 무지보다는 '적극적 무지에의 열망이 자리 잡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미래 세대를 아우르는 이 생태 공동체 안에서 어쩌면 우리는 그토록 싫어하던 어떤 권력 집단의 언어와 인식을 닮아 있는 것은 아닐까.

해양 환경 보호와 관련하여 다채로운 활동을 펼치고 있는 '오션카인드'라는 팀을 섭외한 적이 있다. 오션카인드는 스쿠버다이빙 일을 하던 김용규, 문수정 부부가 눈앞에서 훼손되어가는 바다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단체의 이름이다. 혹자는 '회복하는 힘'을 모토로 내건 한 피로회복제의 광고 영상에서, 바다에서 주운 쓰레기뭉치를 손에 들고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으로 그들을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커다랗게 다가오는 전 지구적 위기와 재난 앞에서 그에 상응하는 거대 담론을 이야기하는 것은 물론 유의미한 일이지만, 나를 포함한 해당 기획의 참여자들은 스스로 삶의 감각을 바꾸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나가는 그들의 목소리를 먼저 듣고 싶었다. 어쩌면 본인의 자리에서 행하는 작은 행동과 그로 인해 조금씩 변화하는 주변의 모습을 애써 체감하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 속엔 지구 단위로 진행되고 있는 거대한 위기와 쉬이 움직이지 않을 무거운 인식의 관성 앞에서 이미 작아질 대로 작아진 문학이 과연 무엇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낯익은 무기력과 질문이 자리 잡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희미한 실마리 역시 늘 그래왔듯 낱낱의 작품들에서 발견되는 듯하다. 가령 이러한 시편들이다.

카페에서 친구를 기다린다 커피향이 고소하다 불에 볶은 과테말라, 케냐, 오사카 원두

수익의 일부는 정당하게 현지에서 일하는 농부들에게 돌아간다

많이 살수록 할인율은 높아진다 최저가의 최저가 에코백은 덤이다

(...중략...)

각 호선이 막힘없이 연결된다 이렇게 늦은 밤까지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는 나라는 없을 거야 사거리를 지나다 총 맞을 일도 없잖아? 살인율이 가장 높다는 멕시코, 멕시코를 곱씹다가

스스로를 가장 잘 죽이는 나라와 타인을 가장 쉽게 죽이는 나라 중 어느쪽이 좀더 나은 곳일까 생각하다가

내려야 할 곳에서 내리지 못했다 다음 열차를 기다리며 에코백을 버렸다 원하지 않는 물건을 처치하는 데 돈을 쓰는 일은 무척 아까운 일이다 게다가

친환경 소재 에코백은 잘 썩어 어쩌면 좋은 비료가 될 수 있고

질 좋은 비료는 비옥한 토양이 되어 훌륭한 열매를 맺을 수도 있다

빈 열차가 플랫폼을 빠르게 통과한다 달리는 기차의 소음은 시원하게 갈리는 원두 소리 같구나

쇠 타는 냄새

불합리한 구조조정에 항의하던 사람이 서울 한복판에서 칼을 휘둘렀으나 부상자는 0.사상자는 단 한 명뿐이었다고 한다

정다연, <에코백>, <웹진 비유> 2020.11.

「에코백」이라는 제목을 지닌 이 시의 서두는 “과테말라, 케냐, 옥사카산 원두”의 향을 음미하며 친구를 기다리는 '나'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구매한 커피 수익의 일부가 "정당하게 현지에서 일하는 농부들에게 돌아간다"는 진술로 미루어보건대, 아마도 나는 '공정무역'으로 유통된 커피를 마시고 있는 듯하다. 공정무역이란 커피 원두, 코코아 등을 재배하는 개발도상국의 농가에게 정당한 가격을 지불하여, 불공정한 무역 구조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하는 사회적 운동을 말한다. 공정무역 나름의 제도적 공과는 잠시 차치해 두고서라도 여기에서 손쉽게 지적될 수 있는 것은 이 제도를 단편적으로 인식하는 이들의 어떤 윤리적 제스처일 것이다. 그것은 글로벌 커피 기업이 공정한 판매라는 명목을 내세워 자신들의 자본소득을 감추는 것처럼, 조금 더 올바른 소비를 하고 있다고 여기며 스스로에게 윤리적 면죄부를 부여하는 선한 착취의 태도이다. 이는 사은품으로 제공된 "친환경 소재 에코백"에서도 잘 드러난다. "친환경소재 에코백은 잘 썩어 어쩌면 좋은 비료가 될 수 있고" “질 좋은 비료는 비옥한 토양이 되어 훌륭한 열매를 맺을 것”이라는 상상처럼, 그것은 최소한의 실천을 최선의 것이라 여기며 이 세계에 가해지는 근본적인 폭력에 대한 사유와 고민을 안일하게 무마시키는 태도에 가깝다.

하지만 더욱 커다란 문제는 그 모든 윤리적 고민과 책임, 행동들이 사회가 아닌 구성원 개인의 몫으로 할당되어 있다는 점이다. 백영경은 <기후위기 해결, 어디에서 시작할까>라는 글에서 생태학자 안드레아스 말름과 알프 호른보리의 논의를 인용하며, '인류세Anthropocene'라는 단어 대신 '자본세Capitalocene'라는 단어를 사용할 것을 주장한다. 인류세라는 명칭은 그 유용함에도 불구하고 인류 구성원 모두에게 책임을 전가함과 동시에 생태 위기의 주범인 자본주의 구조에 의도치 않은 면죄부를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희덕 또한 같은 기후 이슈를 다룬 '자본'에 시인들의 몸은 어떻게 저항하는가」라는 글에서 도나 해러웨이를 인용하며, 인류라는 막연한 가해자를 상정하는 일은 경쟁적으로 환경을 착취해온 자본의 책임을 은폐하고 그 문제를 희석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부와 성장의 비대칭에 기대고 있는 글로벌 자본주의 체제가 변화하지 않는 한, '환경파괴'와 '노동착취'는 같은 구조 아래 심화되어 갈 수밖에 없음을 그는 날카로이 지적하고 있다.

이 같은 논의들의 문제의식을 잠시 빌린다면, 우리는 위 작품에서 친환경 에코백을 사용하는 '나'의 발화와 겹쳐 있는 또 다른 이야기 하나를 감지할 수 있을 듯하다. 인용된 시의 후반부에는 세계에서 "살인율이 가장 높다는 멕시코"의 이야기가 언급된다. 그에 비하면 "사거리를 지나다 총 맞을 일도 없고 "늦은 밤까지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는 한국은 상대적으로 안전한 치안을 지닌 곳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주지하다시피 이곳은 OECD 가입국가 중 자살사망률 수위권을 십 년 넘게 공고히 지키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나는 고민하듯 묻는다. 과연 "스스로를 가장 잘 죽이는 나라와 타인을 가장 쉽게 죽이는 나라 중 어느 쪽이 좀 더 나은 곳일까. 나의 목숨을 위협하는 가장 무서운 존재가 나 자신이 되어버린이 기이한 세계의 구조 속에서, 개인들이 행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먼나라의 불행을 보며 상대적인 위안을 느끼는 것뿐이다.

그리고 이 작품은 “불합리한 구조조정에 항의”하며 “서울 한복판에서 칼을 휘둘렀”던 사람의 뉴스로 마무리된다. 앞선 맥락을 참조한다면 그 사건의 유일한 사상자 한 명은 아마도 칼을 휘두른 본인이었던 듯싶다. 매끄럽고 합리적인 제도의 승복 과정을 모두 거친 뒤, 그가 실패를 탓하는 칼날을 내밀 곳은 결국 자기 자신밖에 없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이 시편 속에 그려진 세계는 기차의 소음과 나란히 놓인 "시원하게 갈리는 원두 소리처럼 구성원들을 부속품으로 마모시키며 전진하는 세계, 재난과도 같은 삶의 파국과 실패의 결과를 모두 자신의 탓으로 돌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세계, 세계의 부조리를 수정하기 위한 고민과 책임 모두를 개인의 몫으로 할당한 세계, 그러한 구성원들의 선행으로 스스로의 구조적 결함을 덮으며 새로운 착취의 원동력을 작동시키는 세계이다.

슬라보예 지젝은 <폭력이란 무엇인가>라는 저서에서 그 주체가 눈에 명료히 보이는 폭력을 주관적 폭력(subjective violence)으로, 주체가 보이지 않는 비가시적인 폭력을 객관적 폭력(objective violence)으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그는 다보스포럼의 참여자들을 사례로 든다. 기존의 자본주의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전 세계적인 기후 문제 등을 해결할 수 있다고 여기는 그 ‘자유주의적 좌파’들은 착한소비와 선함을 내세워 부의 비대칭과 노동의 착취를 가리는 다국적 커피 기업처럼 객관적 폭력을 자행하고 있는 것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이 같은 비가시적 폭력에 대응하는 지젝의 해결책은 다소 급진적인데, 그는 벤야민의 신적 폭력 개념을 가져오면서 그 은밀한 자본의 '폭력적인 구조 자체를 깨부수는 적극적인 폭력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지적은 전 세계에서 기부의 선행과 자본의 착취를 동시에 가장 많이 행한 이로 빌 게이츠를 꼽으며 그에게 아래와 같은 시를 헌사한다.

이제 우리의 말을 들으라, 우리는

그대가 우리의 적임을 안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이제 그대를 벽 앞에 세우리라. 그러나 그대의 미덕과 장점들을 고려하여

우리는 그대를 좋은 벽 앞에 세우고 그대를

좋은 총의 좋은 탄환으로 쏠 것이며 그대를

좋은 삽으로 좋은 땅에 묻어 주리라.

베르톨트 브레히트, <선한 자에 대한 심문> 부분

선행에 어울리는 좋은 총과 탄환으로 결국 그들을 쏘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브레히트의 시와 지젝의 과격한 주장을 있는 그대로 다 받아들이지는 못할지라도, 비판적인 총과 칼의 방향은 애초부터 우리 자신이 아니라 그렇게 최소의 방식으로만 선함을 행사할 수 있도록 구조화된 이 세계를 향해 있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는 충분히 공감의 뜻을 표할 수 있을 듯싶다. 관성적인 인식을 깨부수고 새로운 감각의 언어를 넓혀가는 일이 현대시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라는 점을 상기해볼 때, 이는 그리 낯선 이야기도 아닐 것이다.

사실 문학 내에서 기후나 환경 문제와 관련하여 인식적 충격을 선사하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것은 여러 장르 서사에서 그러하듯 기후 위기가 현실화된 참혹한 디스토피아를 직접 보여주는 일일 것이다. 가령 조예은의 <스노볼 드라이브>라는 작품은 가히 재난이라 불릴 만한 이상기후 현상을 배경에 두고 자신의 서사를 전개해 나간다. 그곳엔 녹지 않는 눈이 주기적으로 내린다. 그 눈은 피부에 닿으면 발진을 일으키고 심하면 죽음에 이르는 환경 재난으로 사람들에게 다가온다. 방부제가루처럼 쌓여 있는 하얀 눈과 미래가 동결되어버린 스노볼 같은 세계에서 주인공들은 서로의 손을 맞잡고 그 암담한 삶을 헤쳐 나간다. 물론 암울한 디스토피아적 배경은 인물들에게 고난과 시련을 배치하기 위한 장르적 문법의 소재로서 클리셰처럼 반복되어 활용되는 면도 없지 않다. 그럼에도 근미래의 위기와 재난을 핍진하게 형상화하는 이 같은 텍스트들은 그 자체로 미래의 일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듯하다. 그것은 미학적 상상을 통해 아직 가시화되지 않았던 어떤 위험의 감각을 미리 당겨오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잠재된 시간의 재현은 시에서는 과연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질까.

그곳은

우리가 커다란 새를 감추어둔 곳

마지막까지 잊어둔 곳

떨어져나온 자1)의 자식들이 침묵의 철책을 치고

조상의 조상이 그 할머니의 할머니에게서 들었다는

돌들이 곧게 절망을 세우고

그 뒤에 다시 노을과 나무 기둥을 허락한 곳

달이 차고 기울고 다시 차고 기울어 350마일을 걷고

버려진 자동차들과 무너져내린 콘크리트 벽 부서진 타일 조각

팔이 없는 인형과 사람이 없는 마을을 지나

물고기가 살지 않는 호수를 건너고

물이 없는 강을 지나면 다다르는 곳

강철의 근골을 가진 거대한 둥지

(...중략...)

우리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내 마음이 네 언저리에 닿았을 때

불이 켜지는 것이 나라는 것을 알았을 때

발을 멈추고 손바닥을 펴자 출발할 때 손에 쥐었던 타일 조각이 그대로 남

아 뾰족한 끝으로 그곳을 가리킬 때

우리는 가시철조망에 볼이 뜯기는 줄도 모른 채

둥지 안으로 발을 들인다

멀리서 한발씩 다가오는 정전처럼

가시 끝에서 중력을 향해 기우는 핏방울처럼

이원석, <Long walks>, <문학동네>, 2020년 여름호 부분

이원석의 <Long walk>라는 작품은 게재된 문예지 지면을 20페이지가량 차지할 정도로 방대한 분량으로 구성되어 있는 작품이다. 위는 상당부분 잘라내어 인용할 수밖에 없었던 이 작품의 서두와 결말의 일부에 해당한다. 시의 첫 구절은 나바호족 원주민의 노래이다. 각주에도 설명되어 있듯, 작품의 표제인 'Long walk'는 원주민 섬멸 작전에 의해 강제로 사회적인 집단 이주를 당한 나바호족의 일원들이 뉴멕시코 사막까지 맨발로 걸어야 했던 '머나먼 여정' 그 자체를 의미한다.

처음 등장하는 것은 '둥지'라고 불리는 장소이다. 그곳은 “버려진 자동차들", "무너져내린 콘크리트 벽", "침묵의 철책” 등 세계의 문명이 멈춘 듯한 종말의 풍경들을 지나면 닿을 수 있는 "강철의 근골을 가진 거대한 둥지"이다. 오래전 “할머니의 할머니에게서 들었다는” 언급으로 미루어보아 그곳의 탄생은 이미 몇 세대 이전의 사건인 듯싶다. 이 구형의 강철 이미지는 작품 속에서 크게 두 번 정도 차용되어 등장한다. 하나는 '아르카'라는 이름의 방호벽으로서 1986년 무너진 체르노빌의 원전을 다시 덮은 3만 6천 톤의 강철 돔이고, 다른 하나는 소련의 마지막 우주왕복선 '부란'이 방치되어 있는 반구의 격납고이다. 한쪽이 과거 인류의 끔찍한 실수를 봉인해 둔 곳이라면, 다른 한쪽은 미래를 향했던 낡은 꿈이 방치된 곳인 셈이다.

제목만큼 기다란 발자취를 그리고 있는 이 시편은 나바호 원주민들의 여정과 소련의 조각난 흔적으로 시작되어, 유인원의 언어능력 연구를 위해 인간 생활을 하다 결국 철창 속에 방치된 챈텍, 외계 생명체에게 전달될 골든 레코드를 싣고 아직도 성간 우주 내 자신의 위치를 알려오고 있는 보이저 1호, 히로시마에 떨어졌던 원자폭탄 'Little Boy'와 프로이트가 열어보았던 불쌍한 꼬마 한스의 기억들을 지나, 2017년 자신들만의 언어를 사용하여 대화를 나눈 AI 챗봇, 과거의 기억을 메모리로 업로드하려는 무녀 업로드된 인간의 뇌를 삭제한 '편안한 잠'이라는 단체와 그것을 살인죄로서 금지한 2058년의 국가기관, 2067년 홀로 살아남아 우리에서 풀려난 마지막 코끼리 조지의 이야기들을 덧대어 놓는다.

그리고 미래와 과거가 교차하는 이 기다란 이야기는 원을 그리듯이 다시 처음의 강철 둥지로 돌아온다. 결국 "우리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맞이하게 된 미래는 약속된 디스토피아의 풍경이다. 나바호 원주민들의 자리를 빼앗은 터에서 시작된 자본축적의 그릇된 첫걸음처럼, 봉인해두었던 끔찍한 과거의 씨앗이 예정된 미래가 되어 발아한 것처럼, 혹은 "출발할 때 손에 쥐었던 타일 조각이 그대로 남아 뾰족한 끝으로 그곳을 가리"키듯 처음부터 방치된 과거를 향하고 있었던 실패한 미래의 나침반처럼, 그것은 '우리'에게 이미 예견된 미래의 풍경이었고 인류가 걸어온 머나먼 여정 역시 변함없는 실패의 제자리걸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지금 이곳에 남겨진 미래가 잠시 파국이 미뤄진 “유예의 시간”일 뿐이라면, “잠시 미뤄둔 종말<Long walk>"의 재현 앞에서 우리는 장르적인 쾌감과 기분 나쁜 공허함 외에 과연 무엇을 건져 올릴 수 있을까.

앞서 자본의 '구조적 폭력에 대한 폭력'을 이야기했던 슬라보예 지젝은 종말이 예견된 미래가 지니고 있는 힘을 이야기하며, 서구의 붕괴를 예견했던 비관주의자들의 사례를 든다. 그들은 공산주의의 위협에 대응할 만한 윤리적 강인함도 결단의 용기도 지니지 못한 서구 체제가 결국 파국을 맞이할 것이라는 절망스러운 운명을 믿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역사 속에서 가파른 몰락의 길을 걸어간 것은 소련 및 동구권 세력이었다. 지젝은 이 비관주의자들의 태도야말로 서구 대신 실질적인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미래를 현실로 앞당겨 가져온 그들의 비관주의적인 예견 자체가 그 예정된 운명을 뒤바꾸었거나 혹은 지연시켰다는 것이다. 그는 장피에르 뒤피의 글을 인용하면서 이 같은 비관주의들의 시간을 기획의 시간'이라는 이름으로 지칭한다. 미래의 재난을 현재의 정해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일은 역사의 시간성을 파괴하는 행위이자 선형적인 시간의 지평 안에서 생각할 수 없는 일이라고 지적은 말한다. 새로운 인식의 출현이 과거의 양태와 진술들을 소급적으로 다시 배치하고 그 의미를 새롭게 부여하듯, 미래에 대한달라진 인식들이 방치되었던 현재를 뒤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최악의 공멸은 막을 수 있다는 희망, 선행을 행함으로써 지구의 위기는 조금씩 해결되리라는 안일한 예견은 기존의 인식과 시간에 아무런 변화도 가져오지 못하기에, 미래의 재난과 위기를 현실의 정해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일이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기획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이 논지를 빌려 정리해본다면 극한의 위기와 재난, 파국을 반복적으로 재현하고 있는 앞서의 작품들은 현재의 지반에서는 상상할수 없는 미래의 인식을 미리 차용하듯 당겨 가져오고 있는 중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현재 또한 미리 재현된 그 상상의 넓이와 깊이만큼 달리 쓰이게 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조대한 2018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을 통해 비평 활동 시작. 

1) '카자흐'는 터키어로 ‘떨어져나와 자유를 취한 자’라는 뜻이다. 현재 카자흐스탄 사막의 버려진 격납고에는 구소련의 마지막 우주왕복선 '부란(Buran)'이 먼지를 맞으며 방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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