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문학의 갈길
내가 읽은 노동문학 작품이나 관련 평론에서 발견하는 주된 흐름은 노동 현실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것이다. 위의 인용문에도 시간을 다투면서 배달하지 않으면 급여가 깎이는 새로운 노동구조에서 힘들어하는 가족의 모습이 그려진다. 나는 노동 현실과 거기서 겪게 되는 사람들, 특히 노동자 가족의 생활을 르포르타주에 가깝게 묘사하는 것의 가치를 유보 없이 인정한다. 예컨대 노동자 가족의 삶을 세밀하게 담은 이수경의 “자연사 박물관”이나 조선소 용역 • 파견업체의 적나라한 노동 현실을 조명한 김숨의 “제비심장”이 그런 예다.10) “한국 사회의 노동자가 겪고 있는 노동의 현실은 앞서 몇 작품에 나타난 사례에서 살펴볼 수 있듯, 신자유주의 글로벌 자본주의 체제 아래 한층 정교화 · 중층화·다원화된 제도적 범주 안에서 노동자들은 새로운 노동의 모순과 억압의 21세기 현대판 노예노동으로 전락해가고 있다.”11) 경청할 주장이다. 그런데 노동문학에서 독자가 기대하는 것이 “노동의 모순과 억압”을 재현하고 고발하는 데만 있는 것일까? 문학이 사회과학이나 다른 담론과 다른 점이 있다면 문학은 사건이나 행동의 액션 자체가 아니라 그 사건으로 영향을 받는 사람들의 리액션(reaction, 반응)에 주목한다는 것이다. 리액션은 일차적으로 캐릭터들의 심리와 감정으로 표현된다. 노동소설만이 아니라 좋은 소설에서 독자가 감흥을 얻고 새로운 감각과 인식의 지평을 발견하는 것은 리액션의 실감과 깊이다. 위에 인용한 이서수 소설에서 내가 주목하는 지점도 그런 대목들이다. 이 소설이 제시하는 플랫폼 노동에 대한 다양한 정보는 나름대로 생생하지만 신문 등에서 얻게 되는 정보와 비교하자면 특별한 건 없다. 소설은 정보로 경쟁할 수 없다. 『헬프』의 힘은 수경 가족이 돈을 벌기 위해 쉽지 않은 노동을 하면서 각 인물이 겪는 내면의 격동과 인물 간의 충돌을 날카롭게 포착한 데서 발생한다.
다만 이 소설만이 아니라 최근 노동소설이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아쉬움은 있다. 노동을 노동자 가족의 이야기만으로 제시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 노동을 강제하는 자본의 메커니즘을 다루는 소설을 찾기 힘들다. 여기에는 자본과 자본가들의 생활과 의식, 감각, 내면을 다루기 힘든 점이 작용했을 것이다. 한마디로 작가들이 자본(가)을 그리는 과제 앞에서 담대하지 못하고 주저한다. 그 결과는 일종의 피해자주의를 되풀이하는 것이다. 노동문학도 일종의 정체성 정치에 갇힌 형국이다. 오직 이윤만을 추구하는 자본의 욕망으로 고통받는 노동자와 그 가족의 삶이 겪는 피해를 가능한 한 사실적으로 전달하는 것에만 머문다. 되풀이 말해 그런 작업이 의미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요는 그게 다가 아니라는 것이다. 좋은 노동소설은 곧 좋은 자본(가)소설을 함축한다. 노동과 자본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노동소설에서는 인상적인 자본(가)의 형상화를 찾기가 어렵다. 노동소설은 넓은 의미의 사회소설이 되어야 한다고 내가 판단하는 이유다.
이런 상황에서 젊은 작가들이 찾은 돌파구는 무엇일까? 주어진 현실을 긍정하고 그 안에서 자잘한 기쁨을 얻으려고 하는 '소확행'의 삶이다. 송지현, 장류진, 박상영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계속해서 실패하는 대신 경쟁 구도 자체에서 잠시 이탈하는 길을 선택한다. 어떤 자책이나 왜곡 없이 자신의 욕망을 부정하지 않는 일, 불안을 안정이라는 국면에 미달된 양태로 여기지 않고 다만 그 불안이 자신의 욕망과 정체성을 재단하여 잘라내지 않게 방어하는 일. 그것이 요즘 애들의 삶의 자세이며, 이들이 처한 트릴레마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삶의 자세가 만들어낸 고유의 궤적이다.12) 전승민 평론가는 젊은 세대가 처한 현실을 세 가지 어려움이 얽혀있는 트릴레마라고 솜씨 있게 정리한다. 그 세대가 현실을 대하는 태도를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삶의 자세"라고 요약한다. 그렇게 평가할 수도 있지만 내가 보기에 이런 시각은 자칫 세태소설에 그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여기서 길게 논할 수 없지만 노동문학의 협소한 시각은 작품이 다루는 노동자를 한국인 노동자로 한정하는 데서도 드러난다. 짐작건대 작가들이 이주노동자들의 생활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신중함이나 조심스러움도 작용할 것이다. 그러나 이미 한국노동 시장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주노동자는 “한국의 노동자보다 열악한 노동조건 아래 놓여있다. 특히 조선족 여성 노동자처럼 한국인과 결혼을 한 경우 문제의 양상이 그리 간단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조선족 여성 노동자에게 오직 궁극의 관심은 국경을 초월한 사랑을 통해 행복한 가정을 한국 사회에 꾸리는 게 아니라 한국인과 결혼함으로써 획득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신원이 보증되는 것을 최대한 이용하여 돈을 벌어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 행복한 삶을 누리는 것이다. 때문에 조선족 여성 노동자로부터 우리는 민족, 국가, 국민, 성 등의 문제들이 중층적으로 포개져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고명철, 23쪽). 나는 이런 부분이 한국문학의 구멍이라고 본다. 노동문학이 다루는 노동자의 삶은 노동현장에만 제한되지 않는다. 노동자의 생활에는 무엇보다 다양한 형태의 노동자 가족이 포함된다. 예컨대 이주노동자의 가족이 한국에 적응하면서 생기는 어려움, 한국인과 결혼하게 된 이주노동자의 아이들이 겪는 문제 등 다양한 쟁점이 부각된다. 그러나 오래전 읽은 조선족 작가 금희가 쓴 “세상에 없는 나의 집” 정도가 이 문제를 다뤘다는 점이 아쉽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