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고 답하다
교육

대학의 학과들은 모두 사라지는가?

차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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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학의 존재 이유?

최근 뜨거운 논란이 되고 있는 챗GPT(Chat Generative Pre-trained Transformer)에게 물었다. 대학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다음과 같은 일목요연(!)한 대답이 돌아온다. 1. 고등교육 제공 (Providing highereducation), 2. 연구수행 (Conducting research), 3. 미래의 리더 양성 (Developing future leaders), 4. 문화적·지적 교류 장려 (Encouraging culturaland intellectual exchange), 5. 지역 및 글로벌커뮤니티 강화 (Strengthening local and globalcommunities). 한 걸음 더 나아가 대학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에세이를 써달라고 요구했더니, 그야말로 순식간에, 일사천리로 그럴싸한 에세이를 작성해서 보여준다. 경이롭다 못해 소름이 끼칠 정도다.

대학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첫GPT가 내놓은 대답을 질문 형식으로 바꿔보자. 한국의 대학은 학생들에게 심도 있는 고등교육을 제공하고 있는가. 대학의 교수와 학생들은 독자적인 연구를 수행하고 있는가. 한국의 대학은 창의적이고 비판적인 미래의 리더를 양성하고 있는가. 한국의 대학은 문화적 지적 교류의 활성화에 기여하고 있는가. 한국의 대학은 지역 및 글로벌 커뮤니티의 강화에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가. 긍정적이고 구체적인 대답을 얻기는 어렵다. 광고 카피나 구호는 난무하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한국 대학의 존재 이유는 경쟁에서 살아남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안정적으로 돈을 벌어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생-소비자의 입맛에 맞는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고, 자본과 국가기구의 지령에 복종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을 못할 경우 대학은 퇴출이라는 위기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기업 마인드로 재무장하지 않으면 고사하고 말 것이라는 위기감이 대학사회에 팽배해 있고, 이에 편승하여 대학의 기업화가 가속화하고 있다. 기업화한다는 것은 대학이 끊임없는 생산을 추구할 뿐 아니라 생산과정을 사기업의 방식으로 관리한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이와 관련하여 서보명은 '자본에 함몰된 대학에 대한 성찰'이라는 부제가 달린 에세이 <대학의 몰락>에서 이렇게 말한다. "대학기업의 입장에서 교수는 생산관리직일꾼이고, 학생의 교육의 소비자이다. 소비자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교육의 내용은 품질 관리의 대상이 된다. 대학의 주체는 더 이상 교수와 학생 또는 그 사이의 지적인 교류가 아니다. 기업형 행정관리 체제가 교용인인 교수와, 상품화된 지식과, 소비자인 학생을 연결하여 대학을 형성하고 있다. 학문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공동체, 배움을 통해 스스로를 발견하려는 사람들의 공동체, 소비자가 아니라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공동체, 그런 공동체로서의 대학은 언제나 이상속의 대학이었다. 그러나 현대 대학은 그런 이상조차도 폐기 처분한 공동체가 되어버린 느낌이다."1) 구구절절 옳은 얘기다.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독립하여 우리가 사는 세상이 파국에 이르지 않도록 최소한의 비판적 기능을 수행하는 것마저도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대학의 길은 뻔해 보인다.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경쟁력을 확보하여 살아남는 길 말고 달리 어떤 길이 있겠는가. 말이 좋아 경쟁력이지 이는 철저하게 시장이 요구하는 노동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것을 뜻한다. 자본과 권력에 최적화된 교육서비스를 제공하여 유순한 인간을 대량생산하는 것 말고 현재 한국 대학이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은 달리 없는 듯하다. 사정이 이러할진대 시장 논리에 비판적이거나 권력에 질문을 던지며 '딴지를 거는 법'을 훈련시키는 인문사회학의 입지는 점점 더 좁아질 수밖에 없다. ‘돈 버는 데 아무짝에도 도움이 안 되는 공부를 해서 무엇에 쓰느냐’는 분위기가 지배적인 상황에서 문과 계열의 학과, 학부는 구차하게 명줄을 이어가는 애물단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학문'이 묻는 능력을 배우고 익히는 것이며, '대학'이라는 큰 배움터는 진리를 탐구함으로써 인류 정신의 진보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원론을 목이 쉬도록 외쳐봐야 돌아오는 것은 싸늘한 눈길이거나, 아니면 살려는 줄 터이니 자본의 잔치에 '기생' 노릇이나 잘하라는 '눈물겨운' 충고뿐이다. 과장이 지나치다고? 지나치게 냉소적이라고? 그랬으면 좋겠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한국 대학의 존재 이유는 너무나 분명하다. 자본 권력이 요구하는 인간을 대량생산하는 것 말고 다른 존재 이유를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시대착오적이거나, 좋게 말해 낭만적인 꿈에서 깨어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낭만적인 꿈을 현실화하기 위해 애쓰는 '바보'도 전혀 없지는 않겠지만...……….

2. 문과계를 위한 변명?

일본의 대표적인 문화연구자 중 한 사람인 요시미 슌야의 책 <문계 학부 폐지의 충격>을 읽다 보면 한국 대학의 현실, 그 가운데 구차하기 이를 데 없는 문과계 학과 학부의 현실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2015년 일본의 문부과학성 '통지'를 둘러싸고 벌어진 문과계 학부 폐지론을 다루고 있는 이 책은 일본 대학의 현실이 한국 대학이 처한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아울러 '문과계는 도움이 안 된다'는 일본 사회의 통념을 비판하고 대학이 작금의 위기를 돌파할 방법을 모색하고 있는 이 책은 한국 대학의 현재와 미래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의미 있는 실마리를 제시한다.

이보다 앞서 저자는 '대학이라는 미디어의 역사 그리고 재탄생'이라는 부제의 대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저서에서 세계 대학의 탄생과 그 역사를 조망하고 일본 대학의 형성과 정착 경로를 개관한 다음 이러한 결론에 도달한다. "실제로 더욱더 막대한 정보가 인터넷 공간에서 유통, 번역, 축적, 검색, 가시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대학에는 머지않아 새로운 세대가 등장하게 될 것이고, 그들은 지구상의 다양한 지식운동과 제휴하면서 새로운 지식을 편집하고 혁신적인 플랫폼을 만들어 나갈 것이다. 중세 이래의 명문대학이 근대에 살아남은 것과 마찬가지로 현대의 주요 대학 역시 포스트국민국가 시대에도 살아남겠지만, 이시대의 대학은 도시나 국가를 기반으로 하지는 않을 것이다. 디지털화된 지식기반 위에서 전혀 새로운 유형의 대학도 등장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지금 사는 곳은 이와 같은 새로운 시대를 향한 입구다. 그 자체로서는 공허한 미래형에 불과한 것일지라도 '수월성'의 대학은 앞으로도 새로운 의미를 계속 발견해갈 것이다. 의미의 발견이 가능하려면 대학은 '수월성'과 더불어 '자유'의 공간을 만들어내려는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 오늘날 대학에 부여된 실천적인 사명은 포스트 국민국가시대의 새로운 '자유=리버럴'에 형태를 부여하는 것이다“2). 미디어를 연구해온 학자답게 저자는 대학을 하나의 미디어로 보고, 유럽에서 인쇄혁명이 대학의 변화와 혁신을 이끌었듯이, 정보혁명 시대에도 대학은 자기혁신을 통해 수월성과 더불어 새로운 자유의 공간을 창출하려는 노력을 이어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에 따르면 결국 그 어떤 외부환경의 변화에도 대학은 혁신과 변화를 통해 '자유를 향한 의지'라는 대학 본연의 속성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요시미 슌야는 대학의 미래에 대해 그다지 비관적이지 않다.

대학이란 무엇인가가 대학의 역사와 존재 이유에 관한 총론이라면 <문계 학부 폐지의 충격>은 일종의 각론에 해당한다. 2015년 6월 8일 문부과학성이 각 국립대 총장에게 보낸 ‘국립대 법인 등의 조직 및 업무 전반의 재검토에 대하여’라는 통지는 일본의 언론계, 학계, 산업계 등에 큰 파문을 몰고 왔다. 대학 개혁을 성장 전략의 일환으로 받아들인 경단련은 이공계 강화 방침을 환영하고 나섰지만, 언론계와 학계 등에서는 정부가 대학 고유의 역할과 기능을 현저하게 축소하려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비판의 목소리 가운데 저자를 자극(?)한 것은 “문과계3)는 도움이안 될지는 모르지만 가치는 있다. 그러므로 버리는 것은 좋지 않다"4)라는 통념이었던 모양이다. 저자에 따르면 '문과계는 도움이 안 된다'는 통념='상식'을 뒤집지 않으면 신자유주의의 거센 흐름에 문과계 학부는 저항할 수 없다. 그래서일까, 저자는 "이과제 지식은 짧게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고, 문과계 지식은 오히려 길게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다"(65쪽)는 점을 공들여 '증명'하고자 한다. 대학의 역사, 교양을 둘러싼 인식의 변화, 가치에 대한 철학적 논구 등을 참조하면서 저자는 대학은 인류의 미래와 세계적 보편성에 봉사해야 한다는 '원론'을 확인한다. 이과계가 수단적 유용성의 차원에 '짧게' 도움이 된다면 문과계는 가치 창조성의 차원에서 '오랫동안' 도움이 된다. 과거의 대학이 그래왔듯이 끊임없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과계 대학이 본연의 존재 이유를 간직하고 있는 셈이다. 변화하는 환경에 따르는 새로운 가치의 탐색과 창조, 그것이 바로 문과계가 '오랫동안' 도움이 되는 이유이다.
요컨대, 문과계. 즉 인문사회계만큼 '가치'의 성립이라는 문제에 대해 긴 시간을 들여 논의해온 지식은 달리 없다. 그 궁극적인 이유는 인문사회과학의 대상이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질문한다는 것에는 우리가 당연하다고 믿고 있는 것을 되묻는 계기를 포함하고 있다. 자연과학의 대상은 기본적으로 우리의 외부에 존재한다. 예를 들면, 인문사회과학에서라면 말, 신체, 심성, 풍경, 자연과학에서라면 정보, 인체, 뇌, 환경이다. 실체적으로 같은 것이지만, 우리 자신의 내부로 보는가 우리의 외부로 보는가 하는 관점이 다르다. 우리 자신의 문제로 볼 때는 가치와 의미의 문제는 바탕을 이룬다. 이 점에 대해서 오랫동안 생각해온 학문이 인문사회과학인데, 그런 관점에서의 고찰이 도움이 되는 것은 우리가 역사 속에서 변하기 때문이다.(95쪽)

문과계 학문의 핵심적인 '방법론'은 인간 즉 '우리 자신'에 대한 질문이고, 그 질문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기존의 가치를 겨냥한다. 그리고 거듭되는 질문과 대답의 과정은 새로운 가치를 탐색하는 과정과 맞물린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자연의 관계 등을 역사적, 철학적, 윤리적 관점에서 되물음으로써 궁극적으로 지속 가능한 인류의 삶을 모색하는 것이 문과계 학문의 핵심적인 존재 근거이다. 인류를 파멸로 이끌어갈 작정이 아닌 다음에야 거시적으로 볼 때 도움이 될 수밖에 없는 문과계 학문을 홀대할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사정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은 듯하다. 경쟁을 인간의 본성으로 전제하고 경제적 욕망의 추구를 최선의 가치로 옹립한 자본주의 시스템하에서 공존의 가치를 내세우며 탐욕을 비판한다는 것은 얼마나 '무모'한가. 화폐-신이 육체와 정신을 장악해버린 판국에 당위론은 현실론 앞에서 얼마나 무력하기만 한가. 자본의 논리=시장의 논리에 포획돼 움쭉달싹하지 못하는 한국 대학의 현실을 생각하면, "문과계 지식은 기존 가치와 목적의 한계를 확인하여 비판. 반성함으로써 보다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수 있다"9/쪽는 당위론적 주장에 수긍하면서도 의심의 눈길을 거두기가 어렵다.

3. 대학의 미래?

저자 역시 "대학이 '지식을 탐구하는' 학문의 논리도 아니고 '사람을 기르는' 교육의 논리도 아니고, '자격을 판다' 혹은 수험료와 학비를 받는다는 마케팅의 논리로 움직인다"여쭈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시장에 잡아먹힐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의 대답은 명료하다. “사람, 지식, 자본의 모든 면에서 유동화, 탈경계화가 진행되는 세계에서 교육과 연구의 양면에서 고도의 질을 유지하는 조직상의 구조를 만들어야"(136쪽) 한다. 이를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대학을 지키는 다섯 개의 벽, 즉 입시라는 벽, 취업 활동이라는 벽, 학부의 벽, 학년의 벽, 언어의 벽을 넘어 '진화'해야 한다는 게 그의 판단이다.
그렇다면 대학의 진화 또는 혁신을 이끌 수 있는 방법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그는 에도시대 초기의 검객 미야모토 무사시(1584-1645)의 이도류(二刀流)에서 배우라고 조언한다. 변화하는 상황, 특히 위기 상황에서는 한 자루의 장검과 또 한 자루의 단검, 두 자루의 칼로 싸 워야 신축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이도류를 대학이 응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주전공, 부전공, 복수전공을 통해 다른 분야의 전문지식을 복선적으로 조합하여 배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공학과 철학, 의학과 철학, 경영학과 철학, 컴퓨터과학과 철학 등 '두 자루의 칼을 익힐 수 있는 장을 대학이 마련해야 한다는 말이다. 여기에 21세기형 미야모토 무사시를 육성하기 위해서는 "수업 상호 관계를 구조화하고 커리큘럼 전체의 질을 높여 조제남조품을 몸소 정밀한 공예품으로 개선할 필요가 있다"(51쪽)고 덧붙인다. 이어지는 그의 제안들, 예를 들어 학생의 수업평가, 강의규모 축소, 액티브 러닝과 팀 티칭, 열린 캠퍼스 등등은 한국의 대학에서 실시하고 있는 것들이어서 그다지 새로울게 없다.

이와 같은 제도적 개선 말고, 정원 미달, 질의 악화, 매력 상실이라는 악순환에 빠져 사양 산업이 되어가고 있는 대학의 활로는 정녕 없는 것일까. 한 사람이 인생에 세 번 대학을 다닌다면 어떨까. 저자는 이상할 정도로 동질적인 일본 대학생의 나이 구성을 비판하면서 희망을 담아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일본의 대학을 고교생과 '사회인의 중간에 있는 통과의례적 조직이 아니라, 인생의 다양한 단계에 참가할 전망과 경력의 선로 전환기로 구조 전환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환은 '입력'의 전환과 '출력'의 전환이라는 두 가지 전환으로 실현된다. '입력'의 전환이란 대학 입학자의 다수를 고졸자가 차지하는 방식으로부터의 전환이다. 나는 21세기 중반 일본에서는 사람들이 인생에 세 번 대학에 들어가길 바란다. 세 번이라는 것은 첫 번째는 대체로 18세부터 21세까지다. 두 번째는 대체로 30대 전반, 세 번째는 대체로 60세 전후다. (...중략...) 그것이 가능하다면 21세기 대학은 30대 사회인의 현장 지식, 60세 전후의 사회인의 깊은 경험과 관계 조정력, 거기에 20대 학생들의 지적 유연성과 논리적 분석력이 수직적으로 대화하고 거기서부터 새로운 가치와 지식이 창조될 자극이 풍부한 장이 될 것이다.(174쪽)

다양한 세대가 각각의 특장점을 공유하면서 대학에 활력을 불어넣고, 대학은 양질의 교육을 제공함으로써 가치축이 다원화, 복잡화, 유동화하는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인생의 전망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비전'에 선뜻 동의하기도 쉽지 않다. 다른 인생의 전망을 얻기 위해 자신의 직장을 그만두고 대학에 다시 들어갈 30대 전반이 얼마나 될 것이며, 60세 전후에 새로운 가능성의 지평을 열기 위해 수업료를 내면서 다시 대학에 들어갈 사람이 얼마나 될까. 미디어 환경이 급격하게 변화하는 시대에 대학이라는 고전적인 플랫폼미디어의 혁명적인 변화 없이는 이러한 제안은 적잖이 '낭만적'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평균적인 정보 선택 능력과 일정 수준의 자기조절 능력만 갖춘 사람이라면 유튜브를 비롯한 뉴미디어를 '캠퍼스' 삼아 얼마든지 지식을 쌓고 또 활용할 수도 있는 세상이 눈 앞에 펼쳐지고 있지 않은가.

일본이나 한국이나 대학이 위기에 처한 것은 분명하다. 위기가 곧 기회라는 말이 위안의 수사학 수준을 벗어나 실천적 의미를 지닐 수 있으려면 위기의 원인에 대한 냉철한 분석이 전제되어야 한다. 현재 대학이 겪고 있는 위기는 자본주의의구조적 위기와 긴밀하게 맞물려 있다. 그런 까닭에 자본주의를 근본적인 차원에서 비판하지 않고서는 대학 위기의 원인을 파악할 수가 없다. 하지만 이 책 어디에서도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찾아보기 어렵다. 대학의 혁신을 통해 위기를 돌파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들리지 않는 이유이다. 기후위기, 빈부격차, 저출산 고렁화 등등 자본주의가 낳은 전 지구적 규모의 위기를 외면하고 대학의 위기를 말할 수는 없다. 요컨대 대학은 자본주의라는 역사적 체제에 저항하는 최전선이 될 수 있을 때 비로소 미래를 끌어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지 못할 경우 대학은 자본과 권력의 시녀 상태를 벗어나기 어려울 터이고, 800년 이상의 역사도 대학의 존재 이유를 뒷받침해주지 못할 것 이다.

당장 다음 학기부터 챗GPT가 대학 현장에서 '상용화'할 조짐이다. 아직은 오류가 적지 않다고 하지만 1년이 지나지 않아 가공할 능력을 '과시'할 수준에 이를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에세이뿐만 아니라 논문까지 가볍게 해치우는 AI를 두고 4차 산업혁명의 도래 운운하며 환호작약할 것인가. 아니면 인류세(人類世, Anthropocene)의 종말을 알리는 묵시록적 징후로 볼 것인가. 자아, 인간, 세계, 자연에 대한 통찰을 배우면서 비판능력과 윤리감각을 벼려야 할 대학이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하위주체로 전락한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정녕 없는가. 문과계열 학과, 학부의 폐지를 둘러싼 논란에 출발한 이 책에서 저자가 제안하는 방안들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아쉬움을 떨칠 수 없는 것은 한국의 대학이 겪고 있는 위기가 몇몇 방책으로 결코 벗어날 수 없을 만큼 심각하다는 판단 때문이다. 나는 대학의 우울한 미래에서 얼핏 인간의 비극적 미래를 본다. 자본과 정치권력에 굽실대는 대학, 자본과 정치권력 앞에 무릎 끓는 고립된 인간 그 리고 전체주의라는 파국.

전체주의 운동은 원자화되고, 고립된 개인들의 대중 조직이다. 다른 모든 당과 운동을 비교할 때 전체주의 운동의 가장 뚜렷한 외적 특징은, 개인 성원에게 총체적이고 무제한적이며 무조건적이고 변치 않는 충성을 요구하는 것이다.5)

정선태
국민대학교 한국어문학부 교수. 저서로 <근대의 어둠을 응시하는 고양이의 시선>, <한국 근대문학의 수렴과 발산>, <지배의 논리 경계의 사상>, <시작을 위한 에필로그>, 편저로 <‘삐라’로 듣는 해방 직후의 목소리>, 역서로 <동양적 근대의 창출>, <일본문학의 근대와 반근대>, <가네코 후미코>, <일본어의 근대>, <쇼와 육군>, <도조 히데키와 천황의 시대> <괴제 나폴레옹 3세>, <속국민주주의론>, 공역서로 <검은 우산 아래에서>, "기타 잇키>, <사상과제로서의 아시아> 등 다수. 


1) 서보명, <대학의 몰락>, 동연, 2011, 39쪽.

2) 요시미 슌야, 서재길 역, '대학이란무엇인가, 글항아리, 2014,299쪽.

3) 이 책에서는 '문과계열', '이과계열'의 줄임말로 '문제', '이계'를 사용하고 있으나 이 글에서는 한국사회에서 익숙하게 사용하는 말인 '문과계', '이과계'로 바꾸어 인용한다.

4) 문계 학부 폐지의 충격.52쪽 이하이 책의 인용은 괄호안에 면수만 표기한다.

5) 한나 아렌트, 이진우• 박미애 역, <전제주의의 기원>, 2, 한길사, 2006, 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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