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후 집중 읽기 모드로 전환됩니다

[8월 3째 주 역사로 보는 세상] 원고는 타지 않는다

기사 듣기

 

1991년 8월 18일, 크림반도 포로스의 별장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고립되었다. KGB와 보수 강경파가 통신을 차단하고 사임을 종용한 뒤 ‘국가비상사태위원회’(GKChP)를 내세워 쿠데타를 개시한 것이다. 19일 비상사태가 선포되고 탱크가 모스크바로 진입했지만, 시민들은 의사당을 에워싸고 밤새 바리케이드를 쌓았다. 사흘 뒤 시도는 무너졌고, 이 반동은 소련 해체의 가속 페달이 되었다. 8월 18일부터 21일까지의 짧은 시간에, ‘현실을 지배하면 역사를 멈출 수 있다’는 신화가 무너진 셈이다. 

쿠데타의 핵심은 총보다 전파였다. 위원회는 첫날 결의로 방송과 통신을 중앙 통제 하에 두고, 지방 채널의 독자 편성을 금지해 공론장의 맥박을 동시에 멈추려 했다. 그러나 레닌그라드 TV를 비롯한 일부 방송은 현장 보도를 이어 갔고, 신생 독립 매체와 팩스·비공식 네트워크를 통해 정보는 틈새로 새어 나왔다. ‘현실’은 무대 뒤에서 지시·검열·금지를 외치는 목소리를 거부했고, 대중은 바로 그 틈새의 사실을 따라 움직였다. ‘권력은 얼마나 오래 허구를 유지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진실은 어떤 경로로 스스로를 양산하는가’라는 반문으로 되돌아왔다. 

이 질문을 책 한 권으로 깊게 비추려 한다. 선택한 작품은 미하일 불가코프의 『거장과 마르가리타』(초판 연재 1966–67, 완전판 1973, 장르: 풍자·환상·철학소설). 이야기의 외피는 간명하다. 한여름 모스크바에 악마 ‘볼란드’ 일당이 나타나 관료·문인·신흥 부르주아의 허위를 ‘마술’처럼 폭로한다. 바리예테 극장에서 열린 ‘흑마술 쇼’는 욕망과 환상을 한데 쓸어 담는 사회적 거울이 되고, 병행 서사인 ‘빌라도와 예슈아’의 장은 비겁과 책임, 진실의 대가를 신화적 스케일로 되묻는다. 검열에 찢긴 한 작가(거장)의 원고가 기적처럼 되살아나는 유명한 문장—“원고는 타지 않는다”—은, 권력이 불태우고 지운다고 믿었던 기록과 기억의 내구성을 선언한다. 

쿠데타의 ‘무대’와 불가코프의 ‘극장’은 정교하게 겹친다. 볼란드는 조명·세트·소품을 마음껏 조작해 관객의 탐욕과 공포를 드러내지만, 그가 드러내는 것은 조작 그 자체의 허술함이다. GKChP가 텔레비전과 라디오, 통신을 틀어쥐자마자 균열이 낫듯, 바리예테 극장도 ‘마술’의 쾌락이 지나가자 허위의 잔해만 남는다. 권력이 기록을 지워 현실을 되감으려는 순간, 진실은 다른 매체로 돌아온다—숨겨둔 사본, 타자기 필름, 사무실 팩스, 지방 방송, 광장의 인간 마이크. “원고는 타지 않는다”는 말은 검열을 뚫고 통해(通解)로 돌아오는 역사 인식의 속성, 곧 ‘사실은 복제되고 확장되며 되살아난다’는 경험칙을 압축한다. 따라서 1991년의 실패한 ‘텔레쿠데타’는 불가코프가 경고한 무대 장치의 한계를 현실에서 재연한 사건이었다. 

오늘의 세계에서 이 비유는 더 날카롭다. 플랫폼 추천 알고리즘은 관객을 개별 객석에 격리하고, 딥페이크와 국가·기업의 정보전은 ‘세트의 하늘’을 더 그럴듯하게 칠한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문화 전장에서는 『거장과 마르가리타』의 해석과 상영 자체가 논쟁의 불씨가 되었고, 권력은 작품을 통제하려 들지만 관객은 또 다른 방식으로 의미를 되살린다. 1991년 8월 며칠 동안 시민들은 텔레비전을 점유한 권력의 서사를 비활성화했고, 지지율 또한 쿠데타 편에 선 대중이 소수였음을 보여 주었다. 그 기억은 오늘 우리에게 검증 인프라·독립 미디어·시민적 연대의 갱신이라는 과제를 남긴다. 문학의 언어로 말하면, ‘원고’가 다시 읽히도록 보존·복제·배포하는 사회적 기술을 묻는 일이다. 

결국 불가코프가 남긴 문장과 1991년 광장이 교차하는 지점은 단순하다. 통제는 늘 ‘이야기’를 장악하려 한다. 그러나 이야기는 인물·사건·증언·문서·데이터라는 다양한 매체로 스스로를 증식한다. 그래서 권력이 무대를 덮을수록, 관객은 더 많은 통로를 통해 바깥 공기를 들이킨다. 『거장과 마르가리타』는 억압의 시대를 살았던 작가가 남긴 가장 아나크로닉한 희망—기록의 생명력—을, 1991년 8월은 시민이 증명한 가장 동시대적인 방법—참여와 연대—으로 확인시킨다. 독자에게 묻는다. 당신의 삶에서 ‘불타지 않는 원고’는 무엇이며, 그것을 오늘 어떤 경로로 되살리고 있는가. 

국내 역사 관련 도서 출간 현황
출처: 국립중앙도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