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1월 4일 밤, 시카고 그랜트파크에는 ‘Yes We Can’ 플래카드와 성조기가 뒤섞인 인파가 모여 있었다. 개표 막판, 네트워크들이 일제히 승리를 선언했을 때, 미국은 건국 이후 처음으로 흑인 대통령을 갖게 되었고, 전 세계 방송들은 “역사적인 밤”을 실시간으로 중계했다. 버락 오바마는 365대 173의 압도적 선거인단 표로 존 매케인을 꺾었고, 1억 3천만 명이 넘는 유권자가 투표에 참여해 40여 년 만의 높은 투표율을 기록했다. 무엇보다 상징적인 것은, 미국 양대 정당 가운데 어느 쪽에서도 한 번도 나오지 못했던 흑인 대선 후보가 마침내 백악관 문턱을 넘었다는 사실이었다. 선거 다음 날, 세계 주요 도시의 신문 1면에는 “미국이 달라졌다”는 제목과 함께, 검은 피부의 대통령 가족이 손을 흔드는 사진이 나란히 실렸다. 인종차별과 노예제의 유산 위에 세워진 국가가, 그 최고 권력을 흑인에게 위임하는 장면은 분명 하나의 문명적 사건이었다. 문제는, 이 상징이 실제로 얼마나 많은 벽을 허물었느냐는 질문이 곧이어 뒤따랐다는 점이다.
오바마의 당선은 “대표되는 몸”과 “변하지 않는 구조” 사이의 간극을 잔인할 정도로 선명하게 드러냈다. 선거는 분명 인종적 대표성의 확장을 보여주었다. 흑인 유권자 비율은 2004년 11%에서 2008년 13%로 뛰어올랐고, 일부 주에서는 흑인 투표율이 백인을 넘어섰다. 그러나 그 이후의 10여 년 동안 미국의 인종별 부(富) 격차는 좁혀지기는커녕 더 벌어졌다는 분석이 반복해서 나온다. 2016년 기준 백인 가구의 중위 자산은 흑인 가구의 10배에 달했고, 2020년대 들어서도 백인·흑인 간 자산 격차는 여전히 80% 이상 수준에서 고착돼 있다. “흑인 대통령이 나왔으니 미국은 더 이상 인종차별 국가가 아니다”라는 선언은, 아이러니하게도 구조적 불평등을 가리는 새로운 장막이 되었다. 대표성은 전례 없이 눈에 띄게 확대됐지만, 주택·교육·노동시장에 축적된 차별의 층위는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 결국 11월 첫째 주의 이 역사적 밤은 “누가 권력을 잡았는가”보다 “그 권력을 둘러싼 구조는 달라졌는가”라는 질문을 세계에 던졌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오바마 시대를 직접 다룬 전기 영화 대신, 흑인 리더십과 상상된 흑인 국가를 다룬 슈퍼히어로 영화 한 편을 떠올려볼 수 있다. 라이언 쿠글러 감독의 〈블랙 팬서〉(Black Panther, 2018, 134분, 슈퍼히어로·액션, 아카데미 미술·의상·음악상 수상)는 마블 유니버스 안에서 드물게 정치와 역사를 전면에 내세운 작품이다. 이야기는 식민지 지배를 한 번도 겪지 않은 가상의 아프리카 국가 와칸다에서 시작한다. 진보된 과학기술과 전통적 왕권이 공존하는 이 나라의 왕 티찰라는 아버지의 죽음 뒤 왕위에 오른 젊은 흑인 지도자다. 그러나 곧 유배된 친척 킬몽거가 돌아와 “와칸다가 숨겨온 힘을 전 세계 흑인 해방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왕권에 도전한다. 영화의 표면은 화려한 액션과 슈트, 블록버스터의 쾌감으로 가득하지만, 그 이면에는 ‘안전한 흑인 국가’와 ‘전 지구적 흑인 연대’ 사이에서 갈등하는 정치적 딜레마가 자리한다. 와칸다는 단지 상상 속 왕국이 아니라, 흑인이 스스로를 지배하는 최초의 강대국이라는 꿈의 형상화다.
11월 첫째 주의 백악관과 스크린 속 와칸다는 나란히 놓을 때 흥미로운 대비를 이룬다. 오바마의 승리는 기존 백인 엘리트 질서를 유지한 채 “정점의 얼굴만 흑인으로 바꾼 체제”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반면 〈블랙 팬서〉의 와칸다는 애초에 서구 제국주의의 지배를 받지 않은 세계, 즉 구조 자체가 다르게 설계된 상상 공간이다. 오바마는 미국이라는 기존 정치·경제 시스템 안에서 ‘존중받는 첫 흑인 대통령’이 되는 길을 택했다. 이에 비해 킬몽거는 그 시스템 바깥에서 식민주의에 맞선 폭력적 해방을 주장한다. 둘 사이의 간극은, 흑인 정치가 백인 다수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 감수해야 했던 ‘존경 받는 온건함’과, 그 온건함이 결국 무엇을 바꾸지 못했는지를 동시에 비춘다. 학자들이 와칸다를 아프로퓨처리즘의 상징으로 읽어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현실에서 막혀 있던 흑인 주체성의 가능성을, 가상의 왕국에 투사해 실험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가 여전히 “희망의 밤”과 “구조의 벽” 사이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세계 불평등은 일부 지표에서 개선됐다는 분석도 있지만, 국가 내부의 소득·자산 격차는 오히려 심화되었고, 인종·성별·국적에 따른 격차는 여전히 견고하다. 미국에서도 흑인 가구의 중위 자산은 백인의 10분의 1 수준에 그치고, 교육 수준이 같아도 흑인 가구의 부는 백인보다 현저히 낮다는 보고가 이어진다. 한편, 〈블랙 팬서〉의 구호였던 “와칸다 포에버”는 전 세계 티셔츠와 머그컵에 찍힌 상업적 문구가 되었다. 상상 속 해방의 언어가 시장에서 소비되는 사이, 실제 세계의 인종·계급 위기는 팬데믹과 기후재난, 인공지능 기술의 불평등한 확산 속에서 새로운 형태의 긴장을 낳고 있다.
결국 11월 첫째 주의 오바마 당선과 〈블랙 팬서〉는, 대표성을 둘러싼 우리의 기대와 현실 사이의 간격을 측정하는 두 개의 자처럼 보인다. 상징의 힘은 분명 중요하다. 백악관에 흑인 대통령이 앉는다는 장면, 세계 박스오피스 10억 달러를 넘긴 흑인 히어로 영화의 성공은 수많은 소수자에게 “나도 거기에 설 수 있다”는 상상력을 허락했다. 그러나 상징이 곧 구조를 바꾸지는 않는다. 핵심은 “누가 그 자리에 앉았는가”를 넘어 “그 자리가 누구를 위해, 어떤 규칙으로 작동하는가”를 묻는 일이다. 독자에게 묻고 싶다. 만약 당신이 2008년의 그 밤, 혹은 와칸다의 왕좌 앞에 서 있다면, 단지 ‘다른 얼굴’을 세우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무엇을 더 바꾸자고 말할 것인가. 대표성을 넘어 구조를 바꾸기 위해, 우리는 어떤 상상을 더 과감하게 밀어붙여야 할까.

![[11월 1째 주 역사로 보는 세상] 희망의 밤과 구조의 벽](https://pltpjrfdfxxbnivrtoew.supabase.co/storage/v1/object/public/films/the_hurt_locker_backdrop.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