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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의 ‘빈 의자’가 묻는다… 기후위기의 청구서는 누가 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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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8일, 인천 송도국제도시에 위치한 녹색기후기금(GCF) 사무국으로 워싱턴발 통지문 한 장이 날아들었다. 미국 재무부가 GCF의 즉각적인 탈퇴와 이사회 의석 사임을 공식 통보한 것이다. 국제기구의 예산표에서 한 줄이 지워지는 이 사건은, 단순히 달러의 공백을 넘어 세계가 약속한 미래의 보증인이 사라졌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번 결정은 트럼프 행정부의 ‘국제 연대 이탈’ 기조가 기후 금융의 심장부까지 밀려왔음을 보여준다. 지난 1월 7일 트럼프 대통령은 유엔 산하 및 비유엔 기구 66곳에서 탈퇴하겠다는 대통령 각서에 서명했고, 이튿날 재무부는 유엔기후변화협약 탈퇴와 연동해 GCF에서도 손을 떼겠다고 선언했다. 미국은 탈퇴의 명분으로 에너지 가격 안정과 자국 경제 성장을 앞세웠다. 이는 빈곤 완화와 기후 위기 대응이라는 국제적 가치보다 자국의 단기적 이익을 우선순위에 두겠다는 노골적인 선언이다.

 

녹색기후기금은 2010년 유엔기후변화협약 체제 아래 출범해, 2013년 인천 송도에 둥지를 튼 기후 재정의 핵심 플랫폼이다.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이 동수로 참여하는 24인 이사회 체제는 기금이 설계 단계부터 ‘균형’과 ‘대표성’을 생명으로 여겨왔음을 증명한다. 그러나 미국의 이탈로 이 균형추는 급격히 흔들리게 됐다. GCF 측은 규정에 따라 공석을 채우겠다며 운영 중단 가능성을 일축했지만, 유엔기후변화협약 회원국 지위가 이사회 대표권의 전제라는 점을 고려하면 미국의 복귀는 요원해 보인다.

지금 송도의 GCF 본부 건물은 거대한 ‘단절’을 마주하고 있다. 기후 금융은 파리협정 이후 국제사회가 합의한 ‘공동의 목표’와 ‘차등의 책임’을 현실의 송금과 투자로 치환하는 장치다. 이 장치의 최대 주주 격인 미국이 방향을 틀면서, 2차 재원 보충 기간에 31개국이 약속한 128억 달러의 무게감도 달라졌다. 한국 역시 난처한 입장에 섰다. 2013년 1억 달러를 시작으로 2023년 3억 달러 추가 공여를 약속하며 ‘신뢰 자산’을 쌓아온 호스트 국가로서, 동맹국의 이탈과 기후 리더십 사이에서 정교한 외교력을 발휘해야 할 시험대에 올랐다.

킴 스탠리 로빈슨의 소설 <미래의 사역>(The Ministry for the Future)은 이 사태를 읽는 유효한 독법을 제공한다. 소설은 치명적인 기후 재난 이후, 국제기구와 금융 시스템이 정치적 저항 속에서 어떻게 자본의 흐름을 바꾸려 안간힘을 쓰는지 묘사한다. 소설 속 문장 “충분함은 있다(There is enough)”는 자원 부족의 공포를 조장하는 정치가 아니라, 존재하는 자원을 어떻게 정의롭게 배분할 것인가가 문제의 본질임을 꿰뚫는다.

미국의 탈퇴는 기후 금융이 도덕적 선의가 아닌, 철저한 ‘이익과 계약’의 영역임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한 국가의 주권적 선택이 국제 공공재의 존립을 흔들 때, 남은 국가들은 새로운 생존법을 찾아야 한다. 민간 자본의 동원을 가속화하고, 특정 국가에 의존하지 않는 다변화된 재정 구조를 설계하는 일이 발등의 불이 됐다.

결국 송도의 빈 의자가 던지는 질문은 명확하다. “기후위기의 비용을 누가 대신 서명할 것인가.” 연대는 감상적인 구호가 아니라 결제 가능한 약속이어야 한다. 미국이 찢어버린 청구서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 비용은 이제 남은 국가들과, 기후 재난의 최전선에 선 사람들에게 더 무거운 이자로 청구될 것이다. 협력은 쟁취하기보다 유지하기가 훨씬 어렵다는 냉혹한 진실만이 송도의 겨울바람 속에 남았다.

녹색기후기금(GCF) 주요국 기여금 현황
출처: 녹색기후기금(GC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