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로 보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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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5째주 · 2026
[1월 넷째 주 역사로 보는 세상] 겨울 궁전 앞, 멈춰선 청원의 행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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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넷째 주 역사로 보는 세상] 겨울 궁전 앞, 멈춰선 청원의 행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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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1월 22일 일요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새벽은 뼛속까지 스미는 추위였다. 러시아 정교회 사제 게오르기 가폰을 앞세운 노동자 수만 명이 성상과 차르 초상화를 들고, 찬송가와 국가를 부르며 겨울 궁전 쪽으로 발을 옮겼다. 손에 쥔 청원서에는 15만 명이 넘는 노동자의 이름이 빼곡했다. 왕정을 뒤엎겠다는 외침이 아니었다. 하루 여덟 시간만 일하게 해달라, 제대로 된 품삯을 달라, 일터에서 다치지 않게 해달라, 투표할 권리를 달라는 간절하고도 소박한 부탁이었다. 청원서 맨 끝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만약 폐하께서 명을 내리지 않으시고 우리 목소리에 귀를 막으시면, 우리는 폐하의 궁전 앞 이 광장에서 죽겠습니다." 그러나 차르 니콜라이 2세는 전날 교외 별궁으로 떠나고 없었다. 빈 궁전 둘레에는 만여 명의 근위대와 코사크 기병이 총구를 세우고 서 있을 뿐이었다. 나르바 문 앞에서 첫 사격이 터졌다. 넵스키 대로에서는 근위연대가 나팔 한 번 불고 곧바로 네 차례 일제사격을 퍼부었다. 일요일 오후 나들이에 나선 시민까지 그 총탄 속에 뒤섞여 쓰러졌다. 공식 집계로는 사망 약 130명, 부상 약 300명이었으나, 온건한 추산으로도 사상자가 1,000명 안팎에 이른다(Sablinsky, 1976). '피의 일요일'이라 불리게 된 이 학살은 1905년 러시아 혁명에 곧바로 불을 붙였고, 역사학자 라이오넬 코찬은 이날을 1917년 왕조 붕괴로 가는 길목의 결정적 분기점으로 꼽았다.

피의 일요일이 남긴 물음은 백이십 년이 지나도 빛이 바래지 않는다. 먼저, 권력과 민중 사이에 대화 통로가 끊기면 무슨 일이 벌어지느냐 하는 문제다. 러시아 민중은 오랫동안 차르를 '작은 아버지'라 불렀다. 지방 귀족이나 관료가 아무리 못되게 굴어도, 차르만큼은 백성 편이라는 뿌리 깊은 믿음이 있었다. 청원이라는 행위 자체가 바로 그 믿음 위에 서 있었다. 그런데 백성이 궁전 문 앞까지 걸어왔을 때, 차르는 자리를 비웠고 그 빈자리를 총구가 대신 채웠다. 사건 뒤 민중 사이에서 가장 많이 떠돈 말은 "이제 우리에게 차르는 없다"였다. 한 체제의 정당성이 하루아침에 뿌리째 뽑히는 순간이었다. 이어지는 물음은, 억눌린 사람들이 체제의 틀 안에서 평화롭게 변화를 이끌어내는 일이 과연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가폰이 이끈 행진은 처음부터 혁명을 거부했다. 볼셰비키도 멘셰비키도 이 행진을 못마땅해했고, 가폰은 오히려 추종자들에게 혁명 전단을 찢으라고 당부했다. 그런데도 체제는 합법적 탄원에 총알로 답했다.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에게 총을 겨누는 체제 앞에서, 남은 선택지는 무엇인가. 이 딜레마는 그 뒤로도 되풀이되었다. 피의 일요일 이후 1905년 10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농민과 노동자 약 15,000명이 처형되거나 총살당했고, 20,000명이 다쳤으며, 45,000명이 유배형을 받았다(Blom, 2008). 양보 대신 더 큰 폭력을 택한 체제가 치른 대가는 12년 뒤 왕조의 소멸이었다.

이 사건의 뼈대를 이루는 주제들, 곧 닫힌 체제 안의 계급 억압, 밑바닥에서 솟아오르는 저항, 혁명이 품은 딜레마를 은유로 가장 날카롭게 빚어낸 영화로는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를 말할 수 있겠다. 2013년 개봉, 감독 봉준호, 러닝타임 126분, 장르는 포스트아포칼립스 SF 액션 스릴러다. 제34회 청룡영화상 감독상, 제33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작품상·감독상·촬영상을 받았다. 기후 실험이 빗나가 지구 전체가 얼어붙은 세계가 무대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설국열차'라는 영구 순환 열차 속에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다. 앞칸에는 호사를 누리는 상류층이, 꼬리칸에는 어둡고 비좁은 칸에 내몰린 하류층이 산다. 꼬리칸의 커티스(크리스 에반스)는 정신적 지주 길리엄(존 허트)을 따르며 앞칸을 향한 봉기를 꾀한다. 칸을 하나씩 뚫고 나아갈 때마다 새로운 폭력과 감춰진 진실이 얼굴을 드러낸다. 마침내 엔진실에 닿은 커티스 앞에서 열차 설계자 윌포드가 내민 진실은 잔인했다. 꼬리칸의 봉기란 인구를 조절하려고 미리 짜놓은 각본이었으며, 길리엄마저 윌포드와 손잡고 있었다는 것이다. 끝내 열차의 보안 전문가 남궁민수(송강호)가 폭약으로 열차 벽을 날려버리고, 살아남은 두 아이가 빙하 밖으로 나와 북극곰을 마주하는 장면에서 영화는 막을 내린다.

피의 일요일과 《설국열차》가 만나는 지점은 여러 겹이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공간이 곧 계급'이라는 은유다. 겨울 궁전은 차르 권력이 응축된 건물이고, 노동자들은 그 문턱에 닿기도 전에 총을 맞았다. 설국열차에서 꼬리칸 사람들이 앞칸을 향해 한 칸씩 밀고 나아가는 여정은 이 수직적 위계를 옆으로 눕힌 것이라 하겠다. 칸과 칸 사이의 철문은 곧 계급의 벽이요, 그 문을 열 때마다 쏟아야 하는 피는 궁전 앞 광장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두 번째 겹침은 '배신당한 믿음'이라는 서사 틀에 있다. 러시아 노동자들은 차르가 자기편이라 믿었기에 한겨울에 궁전까지 걸어갔다. 커티스는 길리엄을 아버지처럼 따랐기에 목숨을 내걸고 앞칸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차르는 자리를 피했고, 길리엄은 적과 한통속이었다. 아래에서 올려보낸 충성이 위에서 돌아올 때 총구나 배반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 이것이 두 서사가 나란히 안고 있는 비극의 뼈대다. 세 번째이자 가장 깊은 겹침은 '체제 바깥'이라는 선택지 문제다. 피의 일요일 이후 러시아 민중에게 체제 안에서의 개혁이란 길은 사실상 닫혔다. 남궁민수 역시 앞칸도 뒤칸도 아닌 열차 바깥을 택했다. 기존 체제의 판 자체를 뒤엎는 것만이 유일한 출구라는 인식, 그리고 그 선택이 끌고 오는 거대한 파괴와 불확실성이라는 대가. 두 이야기가 함께 짊어진 무게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오래된 비극이 지금 여기서 남의 이야기가 아닌 까닭은 숫자가 보여준다. 시민사회 감시 네트워크 시비쿠스(CIVICUS)의 2024년 보고서를 보면, 세계 인구의 72.4퍼센트가 시민 공간이 '폐쇄' 또는 '억압' 상태인 나라에서 살고 있다(CIVICUS Monitor, 2024). 약 30퍼센트는 시민 공간이 아예 잠겨버린 나라의 주민이다. 국경 없는 기자회(RSF)의 같은 해 보고서는 전 세계에서 550명의 언론인이 감옥에 갇혀 있으며, 전년보다 7퍼센트 늘었다고 밝혔다(RSF, 2024). 평화로운 시위대에 최루탄과 실탄이 날아오는 풍경은 1905년 상트페테르부르크만의 것이 아니다. 설국열차가 보여준 '설계된 저항'이라는 섬뜩한 상상도 오늘의 현실과 묘하게 맞닿아 있다. 일정한 불만 표출은 허용하되 구조 자체에는 손대지 못하게 하는 통제 기술은, 윌포드가 꼬리칸 봉기를 미리 짜놓은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면서도 역사는 설국열차와는 다른 결말도 가능하다는 걸 보여준다. 피의 일요일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체제가 총으로 막을 수 있는 것은 한 번의 행진이지, 행진이 품고 있던 열망까지는 아니었다.

겨울 궁전 앞에서 쓰러진 노동자들과 설국열차 꼬리칸 사람들은 결국 같은 물음 앞에 서 있었다. 닫힌 문 앞에서 주먹으로 두드릴 것인가, 문을 부술 것인가, 아니면 문 너머의 세계를 아예 새로 그릴 것인가. 가폰의 청원서는 문을 두드리는 손이었고, 커티스의 전진은 문을 부수는 어깨였으며, 남궁민수의 폭파는 문째로 벽을 걷어내는 선택이었다. 백이십 년이 흐른 오늘, 우리가 사는 세계에도 수많은 닫힌 문이 있다. 어떤 문은 제도의 이름으로, 어떤 문은 관행의 이름으로, 어떤 문은 안전의 이름으로 잠겨 있다. 그 문 앞에 선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어떤 몸짓으로 그 문 앞에 설 것인가. 그리고 문이 열렸을 때 당신이 마주하고 싶은 세계는 어떤 모습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