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남자가 휴대폰을 든다. 번호를 누른다. 신호음이 길다. 받지 않는다. 그는 다시 누른다. 석 달째 받지 못한 임금. 아내는 묻지 않는다. 아이들도 눈치만 본다. 건설현장에서 일한 대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 49% 늘었다는 뉴스를 본다. 숫자가 아니라 사람이다.
특수고용. 노동자도 사업자도 아닌 이들. 법의 바깥에서 일한다. 4대 보험도, 퇴직금도, 그 어떤 보호막도 없다. 건설현장만이 아니다. 택배 기사, 대리운전, 플랫폼 노동자. 이름은 다르지만 처지는 같다. 일하되 노동자가 아닌 자들.
버트런드 러셀이 1932년에 쓴 『게으름에 대한 찬양』을 펼친다. 그는 묻는다. 왜 인간은 일을 미덕으로 여기는가. 노동이 신성하다는 믿음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러셀은 차갑게 말한다. 부자들이 가난한 자들에게 주입한 관념일 뿐이라고.
그의 글은 거의 백 년 전 것이지만 지금 읽어도 날카롭다. 하루 네 시간만 일하면 충분하다고 주장한다. 기계가 인간의 노동을 대신할 수 있는데 왜 여전히 장시간 일하는가. 그 답은 간단하다. 일하지 않으면 먹고살 수 없는 구조 때문이다.
특수고용 노동자들은 러셀이 꿈꾼 여유와는 거리가 멀다. 하루 열두 시간을 일해도 최저임금에 못 미친다. 아프면 수입이 끊긴다. 다치면 자기 책임이다. 게으름을 찬양할 여유가 없다. 생존이 걸렸다.
디지털 전환이라는 말이 넘쳐난다. 플랫폼 경제가 미래라고 한다. 그런데 그 미래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과거보다 못한 조건에 놓였다. 앱으로 호출되고, 알고리즘에 평가받고, 언제든 계약이 끊길 수 있다. 기술은 진보했는데 노동 조건은 퇴보했다.
러셀은 노동 시간 단축이 실업이 아니라 여가를 만들어낼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줄어든 정규직 일자리를 특수고용이 메운다. 같은 일을 하되 보호받지 못한다. 노동은 여전히 신성하지만, 노동자는 점점 투명해진다.
통계는 2023년 특수고용 노동자가 253만 명을 넘었다고 말한다. 전체 취업자의 9%다. 10명 중 1명은 노동법의 사각지대에 있다. 이들이 만든 부가가치는 측정되지만, 이들의 삶은 통계에서 지워진다.
그 남자는 또 전화를 건다. 이번엔 연결됐다. 목소리가 들린다. 돈은 다음 달에 준다고 한다. 지난달에도 그랬다. 그 전달에도. 그는 끊고 나서 생각한다. 러셀이 말한 게으름은 사치다. 일하지 않을 권리보다 일한 대가를 받을 권리가 먼저다.
건설현장의 망치 소리가 들린다. 도시는 계속 지어진다. 하지만 짓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다. 특수고용이라는 이름 뒤에 숨는다. 법도, 통계도, 우리도 그들을 제대로 보지 않는다. 침묵 속에서 오늘도 그들은 일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