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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세상을 보다 3월 4째주] 액체생검

기술의 속도와 제도의 시차가 만드는 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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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균, 쇠
총, 균, 쇠
재레드 다이아몬드
총, 균, 쇠재레드 다이아몬드 · 1997

당신이 매년 받는 건강검진표를 펼쳐본다면, 거기엔 숫자들이 빼곡하다. 혈당, 콜레스테롤, 간수치. 피 한 방울로 읽어내는 몸의 신호들. 그런데 암을 미리 알 수 있다면 어떨까. 종양이 생기기 전에, 혹은 너무 작아서 영상검사로도 보이지 않을 때 말이다.

한국의 액체생검 시장은 2400억원 규모다. 일본은 7000억원을 넘었다. 같은 기술, 같은 시기에 출발했는데 왜 이런 격차가 벌어졌을까. 혈액 속을 떠다니는 암세포의 DNA 조각을 찾아내는 이 기술은 한국에서도 충분히 개발됐다. 문제는 따로 있었다.

의료기기 인허가, 보험 적용, 임상시험 규정. 제도의 벽은 높고 두껍다. 기업들은 기다린다. 심사를 기다리고, 승인을 기다리고, 고시를 기다린다. 그 사이 일본 기업들은 이미 병원에서 환자를 만나고 있다. 미국과 유럽은 더 멀리 갔다.

기술과 제도의 시차. 이 문제를 가장 날카롭게 파헤친 이는 재레드 다이아몬드다. 『총, 균, 쇠』에서 그는 묻는다. 왜 어떤 사회는 혁신을 받아들이고 어떤 사회는 거부하는가. 기술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수용하는 사회의 구조가 결정적이라고 그는 말한다.

다이아몬드가 주목한 건 중국의 정화 원정대였다. 15세기 초, 세계 최고의 항해술과 조선술을 가진 중국은 갑자기 바다를 등졌다. 기술은 있었지만 제도가 막았다. 반대로 분열된 유럽은 경쟁하며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였다. 콜럼버스는 여러 왕실을 전전하다 결국 스페인의 지원을 받았다.

액체생검도 비슷한 길을 걷고 있는 건 아닐까. 한국 기업들이 개발한 기술은 국내가 아닌 해외에서 먼저 인정받는다. 규제 샌드박스니 네거티브 규제니 하는 말들은 무색하다. 여전히 새로운 것은 일단 막고 본다. 안전이라는 이름으로.

물론 의료는 신중해야 한다. 생명을 다루는 일이니까. 하지만 지나친 신중함이 오히려 더 많은 생명을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다. 조기 진단으로 살릴 수 있는 암 환자들이 기다리고 있다. 제도가 기술을 따라잡지 못하는 동안, 시간은 누구 편도 아니다.

변화를 거부하는 사회는 결국 뒤처진다. 다이아몬드의 통찰은 여기서도 유효하다. 혁신은 기술 개발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제도와 문화가 함께 움직여야 한다. 한국의 액체생검이 일본에 뒤처진 건 기술력 때문이 아니었다.

당신이 다음 건강검진을 받을 때, 혈액검사 항목에 암 조기진단이 포함될 수 있을까. 그 답은 실험실이 아니라 회의실에서 결정될지도 모른다. 기술의 미래는 종종 기술 바깥에서 정해진다.

한국 의료기기 임상시험 승인 건수
출처: 식품의약품안전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