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만원. 한국 장애인의 월 평균 임금이다. 2024년 최저임금을 시급으로 환산하면 9860원, 월 206만원인데 그 5분의 1도 안 된다. 숫자는 때로 현실을 너무 날것으로 드러낸다.
장애인 고용 의무가 있는 기업들이 고용 대신 부담금을 택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고용하는 것보다 부담금이 더 싸기 때문이다. 경제적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배제는 정당화된다. 시장은 늘 그래왔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노동력이 상품이 되는 순간을 포착했다.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을 팔 자유와 그것 외엔 팔 것이 없는 자유를 동시에 갖게 될 때,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시작된다고 봤다. 그런데 노동력조차 상품이 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장애인의 노동은 생산성이라는 잣대로 먼저 평가받는다. 비장애인과 같은 생산성을 낼 수 없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래서 최저임금 적용 제외라는 예외 조항이 만들어진다. 노동의 가치를 생산량으로만 환산할 때 벌어지는 일이다.
최근 10년간 장애인 고용률은 제자리걸음이다. 2014년 2.54퍼센트에서 2023년 2.91퍼센트로 0.37퍼센트포인트 올랐을 뿐이다. 의무고용률 3.1퍼센트에도 못 미친다. 기업들이 부담금을 내고 마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마르크스가 본 것은 노동력의 상품화였지만, 우리가 보는 것은 상품조차 되지 못하는 노동이다. 시장에서 거래될 자격을 얻지 못한 노동. 그것이 월 37만원이라는 숫자에 담긴 의미다.
농가인구가 전체의 3.8퍼센트라는 통계도 눈에 띈다. 최저임금을 지방자치단체가 결정하게 하자는 주장도 나온다. 중앙의 획일적 기준이 지역 현실과 맞지 않는다는 논리다. 하지만 최저임금의 지역화가 과연 답일까. 오히려 더 낮은 임금을 정당화하는 수단이 되지 않을까.
노동의 가치를 누가 정하는가. 시장인가, 국가인가, 아니면 우리 모두인가. 37만원이라는 숫자는 이 물음 앞에 우리를 세운다. 『자본론』을 쓴 지 150년이 지났지만, 노동의 존엄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2024년의 봄, 우리는 여전히 노동의 가치를 묻고 있었다. 장애인의 월 평균 임금이 37만원이라는 통계가 발표되던 그날, 누군가는 아침 출근길에 커피 한 잔을 사 들고 지하철에 올랐을 것이다. 그 커피값이 5천원이었다면, 장애인 노동자는 하루 종일 일해야 겨우 그 커피 두 잔을 살 수 있는 셈이었다.
기업들은 장애인을 고용하는 대신 부담금을 택했다. 계산은 간단했다. 사람을 쓰는 것보다 돈을 내는 것이 더 쌌다. 노동의 가치가 벌금보다 가벼운 사회, 그것이 2024년 대한민국의 풍경이었다.
폴 라파르그가 『게으를 권리』를 쓴 것은 1880년이었다. 산업혁명의 열기가 유럽을 뒤덮던 시절, 그는 노동이 신성시되는 시대를 거스르며 인간의 게으름을 옹호했다. 하지만 그가 진짜 말하고자 했던 것은 게으름 자체가 아니었다. 노동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가, 아니면 인간이 노동을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이었다.
라파르그는 하루 3시간 노동을 주장했다. 기계가 인간의 노동을 대신할 수 있는 시대가 왔는데도 왜 여전히 긴 노동시간에 매여 있느냐고 물었다. 그로부터 140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어떤가. 인공지능이 글을 쓰고 로봇이 물건을 나르는 시대에도 누군가는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돈을 받으며 하루를 보낸다.
장애인 고용률이 낮은 이유를 물으면 기업들은 생산성을 말한다. 하지만 생산성이란 무엇인가. 시간당 얼마나 많은 물건을 만들어내는가로만 측정되는 것일까. 한 사람이 일터에 존재함으로써 만들어내는 변화, 동료들이 배우는 다양성의 가치, 그런 것들은 어떻게 계산할 것인가.
최저임금위원회가 매년 여름 회의를 열 때마다 노동계와 경영계는 팽팽히 맞선다. 몇 퍼센트를 올릴 것인가를 두고 밤을 새우며 싸운다. 그런데 정작 최저임금조차 받지 못하는 이들의 목소리는 그 회의장에 닿지 않는다.
라파르그는 노동자들이 스스로를 노동의 노예로 만든다고 비판했다. 일하지 않으면 먹고살 수 없다는 공포가 인간을 옭아맨다고 보았다. 그러나 월 37만원의 현실 앞에서 그의 비판은 사치처럼 들린다. 게으를 권리를 논하기 전에 먼저 인간다운 노동의 권리부터 보장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통계는 때로 잔인하다. 장애인 의무고용률은 3.1%지만 실제 고용률은 절반도 안 된다. 나머지는 부담금으로 대체된다. 사람의 자리를 돈이 채우는 것이다. 이것이 합리적 선택이라고 말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무엇을 합리라고 부르는가.
2024년 봄, 농가인구가 전체의 3.8%라는 소식도 들려왔다. 100명 중 4명도 안 되는 사람들이 우리의 먹거리를 책임진다. 최저임금을 지방자치단체에 위임하자는 목소리도 있었다. 각자의 사정에 맞게 정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노동의 가치가 지역마다 다를 수 있는가. 서울에서 일하는 사람과 지방에서 일하는 사람의 시간이 다른 무게를 가져야 하는가.
라파르그의 책은 결국 이런 질문으로 귀결된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일하는가. 단지 생존을 위해서인가, 아니면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인가. 월 37만원이라는 숫자 앞에서 그 질문은 더욱 무겁게 다가온다. 노동의 신성함을 말하기 전에, 먼저 노동하는 인간의 존엄부터 지켜야 하는 것 아닐까.
장애인의 월 평균 임금이 최저임금의 5분의 1에 불과한 실태를 보여줌으로써 이들의 처우 개선이 시급함을 알린다.
기업들이 부담금을 내는 것이 장애인을 고용하는 것보다 경제적으로 더 유리하다는 사실을 통해 장애인 고용률 향상을 위한 대책이 필요함을 제기한다.
생산성 중심의 평가로 장애인 노동이 상품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을 드러냄으로써 장애인의 사회적 배제 문제를 향한 성찰이 필요함을 시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