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청년이 작업장에서 종이컵을 포장한다. 하루 여덟 시간, 한 달이면 스물두 번. 그가 받는 월급은 10만원이다. 시급으로 따지면 568원. 누군가는 이 노동의 가치를 그렇게 매겼다. 청년에게는 발달장애가 있었고, 그것이 그의 노동을 최저임금 미만으로 만드는 이유가 되었다.
최저임금법에는 예외 조항이 있다. '정신장애나 신체장애로 근로능력이 현저히 낮은 사람'에게는 최저임금을 적용하지 않아도 된다는 조문. 2023년 기준으로 이 조항의 적용을 받는 장애인 노동자는 9,157명에 달한다. 그들의 평균 시급은 4,659원. 최저임금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문제는 '근로능력이 현저히 낮다'는 판단의 기준이다. 누가, 무엇을 근거로 한 사람의 노동 가치를 절반 이하로 평가할 수 있을까. 장애인 고용 전문가들은 이 제도 자체에 차별이 내재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생산성이 낮다는 이유로 임금을 삭감하는 것이 정당한가. 그렇다면 비장애인 중에서도 생산성이 떨어지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
마사 누스바움은 『역량의 창조』에서 인간의 존엄을 능력이나 생산성으로 환원하는 사고를 비판한다. 그는 '역량 접근법'을 통해 모든 인간이 품위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기본적 역량을 보장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할 수 있는 기회, 그리고 그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을 권리도 여기에 포함된다.
누스바움은 중증 지적장애를 가진 조카 세샤의 이야기를 자주 언급한다. 세샤는 말을 할 수 없고 일상생활에서 전적으로 도움이 필요하다. 그러나 누스바움은 묻는다. 그가 사회에 기여하는 것이 없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는가. 그의 존재 자체가 가족에게, 그리고 그를 아는 사람들에게 주는 의미는 어떻게 측정할 것인가.
장애인 최저임금 적용 제외 제도는 1989년 도입되었다. 당시에는 장애인에게라도 일할 기회를 주자는 선의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35년이 지난 지금, 이 제도는 오히려 장애인 노동을 착취하는 수단이 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일부 사업주들은 이 제도를 악용해 장애인을 값싼 노동력으로만 바라본다.
역설적인 것은 정부가 장애인 고용을 촉진하기 위해 다양한 지원금을 지급한다는 점이다. 장애인을 고용하면 사업주는 고용장려금을 받는다. 그런데 그 장애인 노동자에게는 최저임금조차 보장하지 않아도 된다. 국가가 한 손으로는 지원하고 다른 손으로는 차별을 용인하는 셈이다.
누스바움은 정의로운 사회란 가장 취약한 구성원의 역량을 어떻게 보장하느냐로 평가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노동의 가치를 폄하하는 것은 그 사회가 아직 정의롭지 못하다는 증거다. 생산성만을 잣대로 삼는 사회는 결국 모든 구성원을 불안하게 만든다. 누구든 사고나 질병으로 장애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일부 기업들이 장애인 노동자에게도 최저임금 이상을 지급하기 시작했다. 삼성물산은 2023년부터 협력업체 장애인 근로자들에게도 최저임금을 보장하도록 했다. 작은 변화지만 의미가 있다. 한 사람의 노동을 제대로 인정하는 것, 그것이 존엄한 사회로 가는 첫걸음이니까.
작업장의 그 청년은 여전히 종이컵을 포장하고 있을 것이다. 하루 여덟 시간, 성실하게. 언젠가 그의 노동이 제대로 된 가치를 인정받는 날이 올까. 그날이 오면 우리는 비로소 누스바움이 말한 '역량이 보장되는 사회'에 한 발짝 다가선 것일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