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신이 사는 동네 농협은행에 간 적이 있을 것이다. 통장을 만들거나 대출 상담을 받으러. 그곳에서 당신은 준조합원이 될 수 있다는 안내를 받았을지도 모른다. 출자금 몇 만원이면 된다고. 대출 금리도 조금 더 낮다고.
올해 1분기, 농·수·산림조합의 준조합원 대출 비중이 45.8%에 달했다. 절반에 가까운 대출이 농어민이 아닌 사람들에게 나간 것이다. 2019년 34.3%였던 수치가 5년 만에 10%포인트 이상 뛰었다. 특히 2021년 부동산 호황기를 거치며 주택담보대출이 급증했다.
협동조합은 원래 약자들의 연대체였다. 자본이 없는 농민들이 십시일반 모아 서로를 도왔다. 그런데 어느새 농협은 도시 중산층의 주택 구입 창구가 되었다. 정조합원인 농민보다 준조합원인 도시민이 더 많은 혜택을 누리는 역설. 이것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구별짓기』(1979)에서 문화자본의 작동 방식을 파헤쳤다. 겉으로는 모두에게 열려 있는 것처럼 보이는 제도가 실제로는 특정 계급에게만 유리하게 작동한다는 것. 농협의 준조합원 제도도 마찬가지 아닐까. 농민을 위한다는 명분 아래 도시 중산층이 더 많은 금융 혜택을 가져간다.
부르디외는 이렇게 썼다. 지배계급은 자신들의 이익을 보편적 이익인 것처럼 포장하는 데 탁월하다고. 준조합원도 조합원이니 차별할 수 없다는 논리. 농협도 경쟁력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 그 사이에서 정작 농민들의 자리는 점점 좁아진다.
당신도 어쩌면 준조합원일지 모른다. 나도 그렇다. 우리는 농협의 낮은 대출금리를 누리면서도 농민은 아니다. 이 모순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혜택을 포기하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누리는 것이 누군가의 자리를 대신 차지한 결과일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시작 아닐까.
상호금융의 본래 정신은 연대였다.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서로를 돕는 것. 그런데 이제는 다른 처지의 사람들이 그 틀을 빌려 쓴다. 이름만 남고 내용은 바뀌었다. 우리 사회의 많은 것들이 그렇듯이.
농협 창구에서 준조합원 가입 안내를 받을 때, 당신은 무엇을 떠올릴까. 낮은 금리일까, 아니면 이 제도가 원래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지일까. 어쩌면 둘 다 떠올리는 것이 정직한 태도일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모순을 안고 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