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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세상을 보다 5월 3째주] 연구개발

생존의 언어가 된 혁신이라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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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의 함정
혁신의 함정
조슈아 거프
혁신의 함정조슈아 거프 · 2021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시민대로. 롯데웰푸드 중앙연구소 건물은 유리벽에 둘러싸여 있다. 2024년 5월 어느 날, 이곳 실험실에서 연구원들이 새로운 제품 개발에 몰두하고 있다. 하얀 가운을 입은 그들의 손끝에서 미래의 먹거리가 탄생한다. 회사는 올해도 연구개발 투자를 늘렸다. 전년보다 15% 증가한 금액이다.

기업들이 연구개발에 목을 매는 시대다. 롯데웰푸드만이 아니다. 대한민국 모든 기업이 RD를 외친다. 혁신, 미래, 성장. 이런 단어들이 기업 보고서마다 반복된다. 그런데 왜 하필 지금일까. 왜 모두가 같은 방향을 바라볼까.

『혁신의 함정』(2021)에서 조슈아 거프는 흥미로운 지적을 한다. 혁신은 원래 진보의 도구였는데, 어느 순간 생존의 조건이 되었다는 것이다.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공포가 사회 전체를 지배한다. 기업도, 개인도, 국가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기업 연구개발비는 2019년 89조 원에서 2023년 112조 원으로 늘었다. 4년 만에 26% 증가했다. 같은 기간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2%였다. 성장은 정체하는데 연구개발 투자는 급증한다. 이 간극이 말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거프는 묻는다. 혁신이 정말 우리를 구원할까. 아니면 혁신이라는 이름의 쳇바퀴를 돌고 있을 뿐일까. 그는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들을 연구했다. 혁신을 외치며 태어난 기업 중 90%가 5년 안에 사라졌다. 살아남은 10%도 대부분 원래 계획과는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

롯데웰푸드 연구소로 돌아가보자. 연구원들은 오늘도 새로운 제품을 만든다. 더 건강하고, 더 맛있고, 더 편리한. 그런데 소비자들은 정말 그것을 원할까. 아니면 기업이 만들어낸 필요일까.

한국의 식품산업 신제품 출시 건수는 매년 증가한다. 2023년에만 3만 2천 개가 넘는 신제품이 나왔다. 하지만 1년 후 살아남는 제품은 10%가 안 된다. 나머지는 조용히 사라진다. 혁신의 무덤이다.

거프의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이것이다. 진정한 혁신은 무엇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지 않을지 아는 것이라고. 멈출 용기가 없는 사회는 결국 스스로를 소진시킨다고.

2024년 5월, 한국 기업들은 여전히 달린다. 연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혁신이라는 구호 아래. 그들이 향하는 곳은 어디일까. 미래일까, 아니면 더 깊은 함정일까.

안양의 연구소 건물은 여전히 유리벽에 둘러싸여 있다. 밖에서는 안이 보이지만, 안에서는 밖이 보이지 않는다. 혁신의 역설이 그렇다. 모두가 미래를 보려 하지만, 정작 현재를 놓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국 기업 연구개발비 추이
출처: 과학기술정보통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