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광화문 정부서울청사 기획재정부 브리핑룸. 매달 이곳에서 발표되는 재정동향 자료는 언론사 기자들의 노트북 화면을 가득 채운다. 숫자들이 빼곡히 들어찬 표와 그래프, 그리고 전년 대비 증감률을 설명하는 담당자의 목소리. 4월 재정적자 31조 2000억 원이라는 숫자가 발표되자 기자들의 손가락이 분주해진다. 누군가는 추경 탓이라 쓰고, 누군가는 세수 부족을 지적한다. 하지만 정작 이 숫자가 만들어진 구조적 배경에 대해선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가 쓴 『불확실성의 시대』는 1977년 출간 당시 경제학이 현실을 설명하는 데 얼마나 무력한지를 보여줬다. 그는 경제학자들이 만든 정교한 모델들이 정작 중요한 질문들을 회피한다고 지적했다. 부는 어떻게 분배되어야 하는가. 성장의 과실은 누가 가져가는가. 이런 근본적인 물음들 말이다.
재정적자 31조 원이라는 숫자 뒤에는 또 다른 숫자들이 숨어 있다. 법인세 최고세율은 2017년 25%에서 2023년 22%로 내려갔다. 종합부동산세는 완화됐고, 금융투자소득세 도입은 계속 미뤄지고 있다. 이런 감세 정책들이 누구에게 이익이 되는지는 명확하다. 그런데 왜 이 연결고리는 브리핑룸에서 언급되지 않는가.
갤브레이스는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을 세 가지로 나눴다. 처벌의 권력, 보상의 권력, 그리고 조건화의 권력. 현대 사회에서 가장 교묘한 것은 세 번째다. 사람들이 특정한 사고방식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것. 재정적자는 나쁘고 긴축은 불가피하다는 믿음처럼.
한국의 소득 상위 10%가 전체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22년 기준 48.3%에 달한다. OECD 평균보다 높은 수치다. 그런데 이들이 내는 세금 비중은 그에 미치지 못한다. 자본소득에 대한 과세는 근로소득보다 훨씬 관대하고, 상속·증여세 회피 방법은 갈수록 정교해진다.
브리핑룸의 기자들은 다음 달 재정동향 발표일에도 같은 자리에 앉아 있을 것이다. 또다시 적자 규모를 받아적고, 전년 대비 증감을 계산할 것이다. 하지만 왜 이런 구조가 반복되는지, 누가 이 구조의 수혜자인지는 여전히 묻지 않을 것이다.
갤브레이스는 불확실성의 시대에 필요한 것은 확실한 답이 아니라 올바른 질문이라고 했다. 재정적자 31조 원이라는 숫자 앞에서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무엇인가. 적자를 줄일 방법이 아니라, 왜 특정한 방법만이 고려되는지가 아닐까.
정부서울청사의 유리창 너머로 광화문 광장이 보인다. 수많은 시민들이 오가는 그곳에서 재정정책의 영향을 직접 체감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브리핑룸의 침묵은 단지 소리의 부재가 아니다. 그것은 선택된 침묵이고, 의도된 무관심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