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빚이 빚을 낳는다. 기업이 살아남기 위해 선택하는 전환사채는 미래의 가능성을 현재의 자금으로 바꾸는 일종의 도박이다. 데이비드 그레이버가 『부채, 그 첫 5000년』에서 추적한 부채의 역사는 단순히 경제적 거래를 넘어선다. 부채는 권력관계이자 도덕적 의무이며, 때로는 폭력의 다른 이름이기도 했다.
7월 15일, KR모터스가 25억원 규모의 전환사채 발행을 결정했다. 부동산을 담보로 내걸고 미래의 주식 전환 가능성을 약속하며 당장의 자금을 확보하는 방식. 이는 한국 중소기업들이 선택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생존 전략 중 하나다. 그런데 왜 기업은 이런 선택을 해야만 할까?
그레이버는 부채가 평등한 관계에서 출발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채권자와 채무자 사이에는 이미 기울어진 권력관계가 존재한다. 전환사채를 발행하는 기업 역시 마찬가지다. 은행 대출이 어렵고, 증자는 더 어렵다. 남은 선택지는 높은 이자율과 전환권이라는 프리미엄을 얹어 투자자를 유혹하는 것�n 2024년 상반기 한국 기업들의 전환사채 발행 규모는 전년 동기 대비 크게 늘었다. 금리가 높아지고 경기가 불확실해질수록 기업들은 더 많은 부채를 짊어진다. 이 역설적인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시장경제가 합리적이라면, 위험이 커질 때 부채는 줄어야 하지 않을까?
부채는 시간을 거래하는 행위다. 미래의 수익을 현재로 당겨오는 대가로 이자를 지불한다. 하지만 전환사채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 건다. 바로 기업의 소유권이다. 채권이 주식으로 전환되는 순간, 채권자는 주주가 된다. 부채가 지배구조를 바꾸는 도구가 되는 것이다.
그레이버가 지적했듯 부채의 역사는 곧 인간관계의 역사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부채 탕감령이 주기적으로 선포된 이유는 무엇일까? 부채가 사회를 파괴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너무 많은 사람이 노예가 되면 국가도 무너진다.
현대 기업의 전환사채도 비슷한 딜레마를 안고 있다. 단기적으로는 생존을 보장하지만, 장기적으로는 경영권을 위협할 수 있다. KR모터스가 내건 부동산 담보와 우선수익권은 실패했을 때 잃게 될 모든 것을 보여준다. 성공하면 주주가 늘어나고, 실패하면 모든 것을 잃는다.
이런 구조는 개별 기업의 문제로만 볼 수 없다. 한국 경제 전체가 부채에 의존하는 성장 모델을 유지해왔다. 기업부채비율이 GDP 대비 110%를 넘는 현실에서, 전환사채는 증상일 뿐이다. 문제는 왜 우리가 이런 시스템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점이다.
그레이버는 부채가 도덕의 언어로 포장된다고 했다. 빚은 갚아야 한다는 당위는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기업이 생존을 위해 미래를 저당 잡히는 현실이 과연 도덕적일까? 시스템이 만든 부채를 개인이나 개별 기업의 책임으로만 돌리는 것이 정당한가?
전환사채 발행 소식은 단순한 기업 뉴스가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경제 시스템의 모순을 드러내는 신호다. 부채 없이는 성장할 수 없고, 성장하지 않으면 부채를 갚을 수 없다. 이 순환 고리 속에서 기업도, 개인도 숨 쉴 틈을 찾기 어렵다. 과연 다른 길은 없는 것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