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노원구의 한 다가구주택 앞. 김모씨는 문 앞에 붙은 경매 안내문을 멍하니 바라본다. 여섯 달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그의 보금자리였다. 2억원의 전세보증금, 그것은 15년간 모은 전 재산이었다. 집주인이 사라진 것은 석 달 전.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전세사기 특별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피해 주택을 LH가 경매로 매입하는 내용이 골자다. 그러나 김씨에게 이 소식은 너무 늦었다. 이미 집은 경매로 넘어갔고, 그는 길거리에 나앉았다. 법은 언제나 사건 뒤를 쫓는다. 피해자들의 시간은 이미 멈춰 있는데.
후쿠야마는 1995년 『트러스트』에서 한국을 저신뢰 사회로 분류했다. 가족 밖의 타인을 신뢰하지 못하는 사회. 그로부터 30년이 지났지만 무엇이 달라졌을까. 오히려 신뢰의 기반은 더 약해진 것 아닐까. 전세라는 독특한 주거 형태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도 최소한의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신뢰마저 무너지고 있다.
한국의 전세사기 피해 규모는 2022년 1,083건에서 2023년 3,268건으로 3배 이상 증가했다. 피해액은 1조원을 넘어섰다. 숫자 뒤에는 수천 개의 가정이 있다. 수천 명의 김씨가 있다. 그들에게 집은 단순한 부동산이 아니었다. 삶의 안정이었고, 미래였다.
후쿠야마가 말하는 고신뢰 사회란 무엇인가. 낯선 이와도 계약할 수 있는 사회다. 서로를 속이지 않으리라는 기본적 믿음이 작동하는 사회다. 그런데 우리는 왜 여전히 가족과 연고에만 의존하는가. 제도가 개인을 보호하지 못하기 때문 아닌가.
전세사기는 단순한 사기 사건이 아니다. 사회적 신뢰의 붕괴를 보여주는 징후다. 피해자들은 집주인 개인에게 속은 게 아니다. 시스템에 배신당했다. 등기부등본도, 확인서도, 그 어떤 서류도 그들을 지켜주지 못했다. 믿을 건 오직 운뿐이었다.
신뢰는 한 번 무너지면 회복하기 어렵다. 후쿠야마의 통찰처럼, 저신뢰 사회는 거래비용이 높다. 모든 계약에 의심이 따라붙는다. 변호사를 고용하고, 보증을 서고, 담보를 잡는다. 그럼에도 불안하다. 이 모든 비용을 개인이 감당해야 한다.
법 개정이 이뤄졌다고 문제가 해결될까. 김씨는 여전히 고시원에 산다. 다시 전세를 구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한 번 무너진 믿음은 쉽게 돌아오지 않는다. 그는 이제 누구도 믿지 않기로 했다. 저신뢰 사회의 또 다른 구성원이 된 것이다.
신뢰할 수 있는 사회. 그것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법과 제도만으로는 부족하다. 속이면 손해라는 인식, 정직이 최선이라는 문화, 그런 것들이 쌓여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지 않은가.
김씨는 오늘도 부동산 앱을 들여다본다. 월세 매물들을 훑어본다. 전세는 이제 그의 선택지에 없다. 한국 사회가 잃은 것은 단지 전세제도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서로를 믿고 거래할 수 있다는, 그 오래된 약속을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