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34년 어느 여름날, 우리는 그때를 기억할 것이다. 대만이 원전을 다시 돌리기로 결정한 2024년 10월을. TSMC 하나가 대만 전체 전력의 9퍼센트를 삼켜버리던 시절을. 기업에 전력을 우선 배정하는 정책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때를.
그러나 정말 당연했을까. 반도체 공장 하나가 도시 하나만큼의 전기를 쓰는 것이. 원전을 멈췄다가 10개월 만에 다시 돌리는 것이. 누군가의 생산라인이 멈추지 않기 위해 누군가의 에어컨이 먼저 꺼지는 것이.
기후위기 시대, 에너지는 곧 권력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권력을 누가 쥐고 있는지 묻지 않는다. 전기요금 고지서의 숫자만 볼 뿐, 그 뒤에 숨은 배분의 정치학은 보지 못한다. 아니, 보려 하지 않는다.
애런 시메츠의 『에너지와 문명』은 인류 역사를 에너지 전환의 관점에서 다시 쓴다. 불의 발견부터 화석연료, 원자력까지. 그는 묻는다. 에너지 전환이 단순히 기술의 문제일까. 아니면 누가 무엇을 위해 에너지를 쓸 것인가를 결정하는 정치의 문제일까.
산업혁명 시대 영국의 탄광을 보자. 증기기관이 돌아가려면 석탄이 필요했다. 그 석탄을 캐는 것은 아이들이었다. 10살 남짓한 아이들이 하루 16시간씩 땅속에서 일했다. 공장의 불은 환했지만 탄광은 어두웠다. 누군가의 진보는 늘 누군가의 희생 위에 서 있었다.
지금은 다를까. TSMC의 반도체가 전 세계 AI 혁명을 이끈다. 그 생산라인은 단 1초도 멈춰선 안 된다. 255억5천만 킬로와트시. 숫자가 너무 커서 실감이 나지 않는다면 이렇게 생각해보자. 대만 인구 2천3백만 명 중 2백만 명이 쓰는 전기와 맞먹는다.
물론 반도체는 중요하다. AI 시대의 쌀이라 불린다. 하지만 실제 쌀을 키우는 농부의 전기료가 오르고 있다면. 무더위에 에어컨을 켜지 못하는 노인들이 늘어난다면. 우리는 무엇을 위한 진보를 말하고 있는 것일까.
시메츠는 에너지 밀도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같은 양의 에너지를 얻기 위해 필요한 공간과 자원의 크기. 원자력은 밀도가 높다. 작은 공간에서 많은 에너지를 낸다. 그래서 효율적이라 말한다. 하지만 후쿠시마를 기억하는가. 체르노빌을 잊었는가. 효율의 이면에는 늘 위험이 도사린다.
대만이 원전을 다시 돌리기로 했다. 불과 10개월 전에는 탈원전을 외쳤건만. TSMC가 전기를 더 필요로 한다는 이유 하나로 정책이 뒤집혔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런 결정이 어떻게 가능할까. 아니, 우리는 정말 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일까.
2024년 10월, 우리가 목격한 것은 단순한 에너지 정책의 전환이 아니다. 21세기 권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는 적나라한 현실이다. 전기 콘센트 뒤에 숨은 거대한 불평등. 우리는 과연 이 불평등 앞에서 얼마나 더 침묵할 수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