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의원이 법안 하나를 들고 국회 복도를 걷는다. 2023년 5월에 처음 제출한 강력범죄 특별법 개정안이다. 네 번째 상정이다. 그는 안다. 오늘도 심사는 받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걷는다. 18개월째다.
법안 하나가 통과되기까지 얼마나 걸릴까. 강특법 3차 개정안은 발의 후 18개월 만에 법안소위를 통과했다. 4차례 상정됐지만 3번은 심사조차 받지 못했다. 누군가는 이것을 민주주의의 신중함이라 부를 것이다. 다른 누군가는 무능이라 할 것이다.
미국의 클래리티법도 비슷한 운명이었다. 가상자산 규제 법안이 급물살을 탔다는 소식이 들린다. 변수는 페어셰이크라는 정치자금후원회다. 1억9300만 달러, 한화로 약 2600억 원의 정치 지원금을 쥐고 있다. 법안의 운명이 돈의 무게에 달렸다는 것인가.
정치학자 로버트 달은 『민주주의와 그 비판자들』에서 절차적 민주주의의 딜레마를 다뤘다. 1989년 출간된 이 책은 묻는다. 민주적 절차가 정당한 결과를 보장하는가. 달은 말한다. 절차는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아니라고. 과정의 정당성이 결과의 정당성을 담보하지 못한다고.
그런데 우리는 절차조차 제대로 작동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공소시효청구법 개정으로 특별사법경찰관의 검찰 지휘 조항이 삭제됐다. 전체 특사경의 82퍼센트인 1만6478명이 경력 3년 미만이다. 공소시효를 몰라 기소를 놓치는 일도 있다고 한다. 법을 집행할 사람들이 법을 모른다.
달은 민주주의의 다섯 가지 기준을 제시했다. 효과적 참여, 투표의 평등, 계몽된 이해, 의제 통제, 성인의 포함. 이 중 '계몽된 이해'가 눈에 띈다. 시민이 자신의 이익이 무엇인지 알고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법을 만드는 사람도, 집행하는 사람도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한국의 법안 가결률은 2022년 기준 약 35퍼센트다. 발의된 법안 10개 중 3.5개만 통과된다. 나머지 6.5개는 어디로 가는가. 임기 만료로 폐기되거나 무한정 계류 중이다. 누군가의 18개월이 그렇게 묻힌다.
경기도교육청이 논술평가 확대를 추진한다는 소식도 들린다. 사고력을 키운다고 한다. 하이러닝 AI 논술진단 서비스도 개통했다고 한다. 그런데 사고력이란 무엇인가. 법안 하나가 18개월 동안 표류하는 이유를 묻는 힘인가, 아니면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순응인가.
달은 이렇게 썼다. 민주주의는 이상이 아니라 현실이며, 현실은 늘 불완전하다고. 그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것이 출발점이라고. 하지만 불완전함과 무능함은 다르다. 18개월과 82퍼센트라는 숫자가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 의원은 오늘도 법안을 들고 복도를 걷는다. 다섯 번째 상정을 준비한다. 누군가는 그를 끈질기다 할 것이다. 누군가는 미련하다 할 것이다. 그는 묵묵히 걷는다. 민주주의란 그런 것이라고, 그는 믿고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