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1월 16일, 건설안전관리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중대재해 발생 시 원도급자의 책임을 강화하는 내용이다. 발주처와 원청, 하청으로 이어지는 책임의 사슬. 그 끝에는 언제나 노동자가 있다.
건설 현장의 죽음은 낯선 풍경이 아니다. 매년 400명이 넘는 건설 노동자가 일터에서 목숨을 잃는다. 2024년 한 해만 해도 412명. 하루 평균 1.1명이 현장에서 사라졌다는 계산이다. 법은 계속 만들어지고 개정된다. 그런데 숫자는 왜 줄지 않을까.
『위험사회』를 쓴 울리히 벡은 현대사회의 위험이 계급화된다고 했다. 부는 위로 축적되고 위험은 아래로 축적된다. 1986년에 나온 책이지만 한국의 건설 현장을 들여다보면 여전히 정확한 진단이다. 원청은 공사를 맡기고, 하청은 다시 재하청을 준다. 위험은 가장 아래로 흘러간다.
정부는 이번 법 개정으로 원도급자의 안전 책임을 높였다고 한다. 벌금도 올리고 처벌도 강화한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다른 곳에 있지 않을까. 공사비의 2퍼센트도 안 되는 안전관리비. 공기 단축 압박에 시달리는 현장 관리자. 일용직으로 떠도는 노동자들.
벡은 위험이 민주화된다고도 했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 같은 거대한 재앙 앞에서는 계급도 국경도 무의미하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건설 현장의 위험은 전혀 민주적이지 않다. 아파트에 입주할 사람들은 안전하다. 위험은 오로지 만드는 사람의 몫이다.
안전은 비용이 아니라 권리라고들 말한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안전은 여전히 비용으로 계산된다. 그것도 가장 먼저 삭감되는 비용으로. 원가 절감의 압박이 거세질수록 안전의 자리는 좁아진다.
법이 바뀔 때마다 현장도 바뀔까. 글쎄다. 다단계 하도급 구조가 그대로인데. 최저가 낙찰이 관행인데. 위험의 외주화가 일상인데. 법 조문 몇 줄로 무엇이 달라질 수 있을까.
울리히 벡은 위험사회에서 벗어나는 길은 성찰적 근대화라고 했다. 발전과 성장의 논리를 되묻고 다시 생각하는 것. 한국의 건설 산업도 마찬가지 아닐까. 더 빨리, 더 싸게가 아니라 더 안전하게를 먼저 묻는 것.
일터에서 죽지 않을 권리. 너무 당연해서 오히려 잊기 쉬운 권리다. 2025년에도 여전히 하루 한 명씩 건설 노동자가 죽어간다면, 우리는 어떤 사회에 살고 있는 걸까.
위험은 평등하지 않다. 안전의 대가는 늘 약한 자가 치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