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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세상을 보다 2월 2째주] 지방도시의 소멸

역세권 개발 5년 지연 속에서 읽는 공간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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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장소
비장소
마르크 오제
비장소마르크 오제 · 1995

공릉역 인근 한 카페 주인은 오늘도 텅 빈 테이블을 닦는다. 5년 전 역세권 개발 소식에 기대를 품고 문을 열었지만, 멈춰선 공사 현장만 창밖에 보일 뿐이다. 그는 이제 폐업을 고민한다. 약속된 미래가 무한정 연기될 때, 사람들은 어떻게 버티고 있을까.

제3종일반주거지역에서 근린상업지역으로의 전환. 행정 용어 뒤에는 수많은 기대가 숨어있었다. HDC현대산업개발의 자체사업으로 시작된 공릉역 개발은 주거와 상업, 문화가 어우러진 복합공간을 약속했다. 하지만 2025년 2월 현재, 그 약속은 여전히 도면 위에만 존재한다.

지리학자 마르크 오제는 『비장소』에서 현대 도시의 역설을 지적한다. 공항, 쇼핑몰, 고속도로처럼 사람들이 스쳐 지나가기만 하는 공간. 그곳엔 역사도, 정체성도, 관계도 없다. 역설적이게도 역세권 개발은 '장소'를 '비장소'로 만드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땅의 기억을 지우고 자본의 논리로 채우는.

전국의 역세권 개발 현황을 보면 더 씁쓸해진다. 2018년 523개였던 역세권 개발 계획은 2023년 892개로 늘었다. 하지만 실제 완공된 곳은 157개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공릉역처럼 어딘가에서 멈춰 있다. 지방투자촉진보조금이라는 이름으로 쏟아부은 세금은 어디로 갔을까.

오제가 말하는 '초근대성'의 특징은 가속화다. 모든 것이 빨라지고, 압축되고, 효율화된다. 그런데 한국의 지방도시는 오히려 멈춰있다. 개발은 지연되고, 청년은 떠나고, 상권은 죽어간다. 초근대의 속도감과 지방의 정체감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린다.

광양시가 벤처생태계 육성을 외치고, 뿌리산업 선도기업을 키우겠다고 하지만 정작 사람이 살 공간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산업단지는 있되 주거단지는 없고, 일자리는 있되 삶터는 없다. 이것이 한국 지방도시의 자화상 아닐까. 비장소만 늘어나는 도시에서 장소를 찾는 사람들.

오제는 장소가 되기 위한 조건으로 세 가지를 든다. 역사적이고, 관계적이며, 정체성을 가질 것. 공릉역 개발이 5년째 멈춰있는 것은 어쩌면 이 조건들을 무시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땅이 품은 시간을 지우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관계를 끊고, 오직 개발 이익만을 좇았으니.

국가가뭄통계가 발표되고 주거급여 대상자가 늘어나는 2025년 2월. 우리는 또 다른 종류의 가뭄을 겪고 있는지도 모른다. 공간의 가뭄, 장소의 가뭄. 물이 말라가듯 도시에서 의미 있는 공간들이 사라져간다. 그 자리를 메우는 것은 텅 빈 약속들뿐.

카페 주인은 결국 가게 문을 닫기로 했다. 5년을 기다렸지만 변한 것은 없었다. 그가 떠난 자리엔 또 다른 공실이 생겼다. 창문엔 '임대문의' 스티커만 덩그러니 붙어있다. 누군가는 이것도 개발의 과정이라 말하겠지만, 정작 사라진 것은 한 사람의 꿈이었다.

비장소의 시대. 우리는 어디에서 살고 있는가. 아니, 어디에서 살 수 있을까. 멈춰선 개발 현장 앞에서 그 질문만이 공허하게 울린다.

전국 역세권 개발 계획 및 완공 현황
출처: 국토교통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