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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세상을 보다 2월 4째주] 순환경제의 역설

롯데제과의 ESG 전환과 소비사회의 근본 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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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세계를 위한 디자인
실제 세계를 위한 디자인
빅터 파파넥
실제 세계를 위한 디자인빅터 파파넥 · 1971

빅터 파파넥은 《실제 세계를 위한 디자인》에서 이렇게 썼다. 산업디자이너란 해로운 직업이며, 광고업자 다음으로 사기꾼에 가깝다고. 1970년대 그가 본 것은 끊임없이 새로운 욕망을 만들어내는 디자인의 폭력성이었다. 쓸모없는 물건들이 필수품으로 둔갑하고, 멀쩡한 제품이 구식이 되어 버려지는 순환.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 순환에 '지속가능'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다.

롯데제과가 2025년까지 순환경제 프로젝트를 가동한다고 발표했다. ESG 경영의 일환으로 포장재를 줄이고 재활용률을 높이겠다는 계획이다. 중대성 평가를 통해 환경 이슈를 선별하고, 노동자 인권까지 존중하겠다는 의지도 밝혔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시대, 당연한 행보로 보인다.

하지만 파파넥이 지적했던 근본적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지 않을까. 과자 포장지를 재활용한다고 해서, 과자 자체의 필요성이 정당화되는 것일까. 더 많이 팔기 위해 더 화려하게 포장했던 기업이, 이제는 친환경 포장으로 더 많이 팔려는 것은 아닐까.

파파넥은 디자이너가 진짜 해야 할 일은 제3세계를 위한 저비용 주택 설계나 장애인을 위한 도구 개발이라고 했다. 실제로 필요한 것을 만드는 일.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필요를 만들어내는 일에 더 많은 자원을 쏟고 있다. ESG라는 이름으로.

순환경제라는 개념 자체가 모순적이다. 경제는 성장을 전제로 하고, 순환은 유한성을 인정한다. 롯데제과의 매출이 늘어날수록 포장재 총량도 늘어날 텐데, 재활용률 몇 퍼센트 개선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결국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소비하는 구조는 그대로인 채, 죄책감만 덜어주는 것은 아닐까.

기업의 ESG 보고서를 읽다 보면 묘한 기시감이 든다. 1970년대 기업들이 '사회공헌'을 외치던 때와 무엇이 다른가. 용어만 바뀌었을 뿐, 여전히 이윤 추구와 사회적 가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다. 파파넥이 말했듯이, 진짜 혁신은 덜 만드는 것일 수도 있는데.

ESG 경영이 확산되면서 기업들은 앞다투어 탄소중립을 선언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신제품 출시 주기는 더 짧아지고, 마케팅 비용은 더 늘어난다. 이 역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혹시 우리는 문제의 해법을 찾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방법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닐까.

파파넥은 디자이너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면서도,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인정했다. 시스템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고. 그런데 50년이 지난 지금, 시스템은 오히려 더 정교해졌다. ESG라는 새로운 평가 기준을 만들어 기업 활동을 정당화하고, 소비자의 죄책감을 관리한다.

롯데제과의 순환경제 프로젝트가 실패할 것이라는 말은 아니다. 분명 포장재는 줄어들고 재활용률은 높아질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변화일까. 아니면 변화하지 않기 위한 변화일까. 파파넥이 꿈꾸었던 실제 세계를 위한 디자인은 여전히 요원해 보인다.

결국 우리가 마주한 것은 선택의 문제다. 조금 덜 해로운 소비를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소비 자체를 다시 생각할 것인가. ESG 경영이 던지는 질문은 바로 여기에 있다. 기업이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가 계속 더 많이 원한다면 순환은 불가능하다. 파파넥의 오래된 경고가 새롭게 들리는 이유다.

국내 ESG 채권 발행 규모
출처: 한국거래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