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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세상을 보다 3월 2째주] 빈 공간의 역설

도심 공실률 상승과 청년 주거난이 동시에 존재하는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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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과 돌
살과 돌
리처드 세넷
살과 돌리처드 세넷 · 1994

당신은 매일 같은 길을 걷는다. 출근길 지하철역에서 회사까지, 점심시간 식당가까지. 그 길목의 빈 상가들이 늘어간다. '임대문의' 전단지가 붙은 유리창 너머로 텅 빈 공간이 보인다. 같은 시각, 당신의 조카는 고시원 창문 없는 방에서 아침을 맞는다.

서울 도심의 공실률이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상업용 부동산에 대한 투자 의향은 역대 최고라는데, 정작 임차인을 구하지 못한 건물들이 늘어만 간다. 2025년 3월 발표된 CBRE코리아의 보고서가 보여주는 숫자들은 차갑다. 투자자들은 부동산을 사고, 청년들은 지하방으로 내려간다.

폐교된 학교 건물이 청년 주거 공간으로 바뀐다는 소식이 들린다. 아이들이 떠난 자리를 청년들이 채운다. 인구 감소로 문 닫은 교실에서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역설적이지 않은가. 넘치는 공간과 부족한 주거가 같은 도시에 공존한다.

리처드 세넷은 『살과 돌』에서 도시 공간과 인간의 몸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탐구했다. 중세 도시의 좁은 골목에서 현대 도시의 광장까지, 공간은 단순한 물리적 조건이 아니라 삶의 방식을 규정하는 힘이었다. 세넷이 던진 질문은 여전하다. 도시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빈 사무실과 빽빽한 고시원. 이 간극은 단순한 수요와 공급의 불일치가 아니다. 공간을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다. 투자 대상으로서의 부동산과 삶의 터전으로서의 주거. 두 개념 사이의 거리가 곧 우리 사회의 틈새다.

청년들이 원하는 것은 거창하지 않다. 햇볕이 드는 창문, 부엌이 있는 방, 친구를 부를 수 있는 거실. 그런데 도시는 이들에게 지하와 옥탑을 내민다. 지상의 빈 공간들은 여전히 '적정 임대료'를 기다리며 비어 있다.

세넷은 파리의 오스만 대개조를 분석하며 권력이 어떻게 공간을 통해 작동하는지 보여줬다. 넓은 대로는 바리케이드를 막기 위해서였고, 균질한 건물 높이는 계급을 시각화하는 장치였다. 21세기 서울의 공간 정치학은 어떤가. 비어 있되 열리지 않는 공간들이 만드는 풍경을.

당신이 걷는 그 길의 빈 상가들. 거기엔 누군가의 가능성이 잠들어 있다. 청년 창업자의 첫 가게가 될 수도, 동네 사랑방이 될 수도 있었을 공간들. 하지만 월세는 그들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다. 빈 공간은 그렇게 빈 채로 남는다.

서울시 청년 1인가구 주거형태별 비율
출처: 서울시 청년주거실태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