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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세상을 보다 5월 1째주] 미등록 아동

보이지 않는 아이들의 시민권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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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사케르: 주권 권력과 벌거벗은 생명
호모 사케르: 주권 권력과 벌거벗은 생명
조르조 아감벤
호모 사케르: 주권 권력과 벌거벗은 생명조르조 아감벤 · 1995

당신의 아이가 병원에 갈 수 없다면 어떤 기분일까. 열이 나도, 다쳐도, 아파도 그저 집에서 견뎌야 한다면. 부모의 신분이 불안정하다는 이유로 아이가 의료보험도, 교육도, 그 어떤 공적 서비스도 받을 수 없다면 말이다.

한국에는 약 2만 명의 미등록 이주아동이 살고 있다. 이들은 부모가 체류자격을 잃었거나 처음부터 없었기에 출생신고조차 되지 않은 아이들이다.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삶. 유령처럼 한국 사회를 떠도는 이 아이들에게 최소한의 권리라도 보장하자는 법안이 국회에 계류 중이다.

권인숙 의원이 발의한 법안은 출입국 사무소 직원이 대신 출생신고를 하거나, 어린이집 종사자들의 신고 의무를 면제하는 방안을 담고 있다. 하지만 실효성은 의문이다. 공무원이 미등록 아동의 출생을 신고하면서 동시에 부모의 불법체류는 묵인할 수 있을까. 어린이집은 신고 의무가 없어진다 해도 미등록 아동을 선뜻 받아줄까.

조르조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에서 '벌거벗은 생명'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법의 보호 밖에 놓인 채 오직 생물학적으로만 존재하는 생명. 고대 로마법에서 호모 사케르는 누구든 죽일 수 있지만 희생제물로는 바칠 수 없는 자였다. 신성하지도 속되지도 않은, 그저 법 바깥에 버려진 존재.

미등록 아동들이 바로 현대의 호모 사케르 아닌가. 이들은 태어났지만 시민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아프면 병원에 가는 것도, 학교에서 교육받는 것도 불가능하다. 인간이되 인간의 권리를 갖지 못한 채 법의 경계 밖에서 살아간다.

아감벤은 근대 주권 권력이 만들어내는 예외상태에 주목했다. 법이 스스로를 중단시키면서 동시에 작동하는 역설적 공간. 미등록 아동들은 한국 사회가 만들어낸 영구적 예외상태 속에 갇혀 있다. 우리는 이들의 존재를 알면서도 모른 척한다. 법은 이들을 배제하면서 동시에 포함시킨다.

1989년 UN아동권리협약은 모든 아동이 국적과 무관하게 기본권을 보장받아야 한다고 명시했다. 한국도 1991년 이 협약을 비준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출생신고조차 되지 않은 아이들이 2만 명. 이들에게 협약은 그저 종이 위의 문자일 뿐이다.

문득 궁금해진다. 우리는 왜 아이의 권리를 부모의 지위에 종속시키는가. 부모가 불법체류자라는 이유로 아이까지 법 바깥으로 밀어내는 이 논리는 정당한가. 죄는 개인적인 것인데 왜 그 대가는 대물림되는가.

시민권이란 무엇인가. 태어난 곳에서 살아갈 권리인가, 아니면 부모의 신분이 결정하는 특권인가. 2만 명의 아이들이 유령처럼 떠도는 사회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문명국가라 부를 수 있을까. 법안의 실효성을 따지기 전에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 아닐까. 당신이 만약 그 아이의 부모라면.

국내 체류 외국인 아동 현황
출처: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