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단골 식당이 문을 닫았다. 주인 할머니는 일할 사람을 구할 수 없어서라고 했다. 월급을 올려도, 조건을 좋게 해도 오는 사람이 없단다. 30년 넘게 장사하면서 이런 일은 처음이라고.
일본에서 날아온 뉴스가 묘하게 겹쳐 보인다. 고용지수 -37. 일할 사람이 없어 폐업이 속출한다는 소식. 저출산과 고령화가 극단에 다다른 사회의 풍경이다. 그런데 정말 사람이 없어서일까? 아니면 그 일을 하려는 사람이 없는 걸까?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노동의 배신》은 2001년 미국에서 최저임금으로 살아가는 실험을 기록한 책이다. 기자였던 저자는 웨이트리스, 청소부, 마트 직원으로 일하며 몇 달을 버텼다. 하루 8시간을 일해도 방 한 칸 구하기 어려운 현실. 두 개의 일자리를 뛰어도 의료보험 하나 들 수 없는 구조.
그녀가 만난 동료들은 게으르지 않았다. 오히려 누구보다 성실했다. 새벽부터 밤까지 일했고, 아파도 참았으며, 모욕적인 대우도 견뎠다. 그럼에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일은 더 이상 존엄을 보장하지 않았다.
20년이 지난 지금, 상황은 나아졌을까? 최저임금은 올랐지만 집값은 더 빠르게 뛰었다. 플랫폼 노동은 자유를 약속했지만 더 깊은 불안정을 가져왔다. 일자리는 늘었다지만 괜찮은 일자리는 줄었다.
한국의 구인난도 비슷한 맥락 아닐까. 사람이 없는 게 아니라 그 조건에서 일하려는 사람이 없는 것. 최저임금에 가까운 급여, 불규칙한 근무시간, 없는 것과 다름없는 복지. 이런 자리를 두고 인력난이라 부르는 게 맞나?
청년들이 일을 기피한다고들 한다. 하지만 그들이 거부하는 건 일 자체가 아니다. 일해도 나아지지 않는 삶, 일할수록 소진되는 몸, 일하는 동안 잃어버리는 시간. 이런 것들을 거부하는 거다.
폐업 소식 앞에서 우리가 물어야 할 건 따로 있다. 왜 그 일자리는 사람을 구할 수 없는가? 무엇이 그 노동을 기피하게 만드는가? 일의 가치를 우리는 제대로 인정하고 있는가?
동네 식당 문 앞에 붙은 폐업 안내문을 다시 본다. 할머니의 마지막 인사가 적혀 있다. 그동안 감사했다고. 이 감사 뒤에 숨은 것들이 보인다.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노동, 인정받지 못한 가치, 지속될 수 없었던 일터.
일본의 -37이라는 숫자가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우리도 이미 그 길 위에 있는지 모른다. 일할 사람이 없다고 한탄하기 전에, 사람이 일하고 싶은 조건을 만들었는지 돌아볼 때다.
동네 단골 식당이 문을 닫았다. 주인 할머니는 일할 사람을 구할 수 없어서라고 했다. 월급을 올려도, 조건을 좋게 해도 오는 사람이 없단다. 30년 넘게 장사하면서 이런 일은 처음이라고.
일본에서 날아온 뉴스가 묘하게 겹쳐 보인다. 고용지수 -37. 일할 사람이 없어 폐업이 속출한다는 소식. 저출산과 고령화가 극단에 다다른 사회의 풍경이다. 그런데 정말 사람이 없어서일까? 아니면 그 일을 하려는 사람이 없는 걸까?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노동의 배신》은 2001년 미국에서 최저임금으로 살아가는 실험을 기록한 책이다. 기자였던 저자는 웨이트리스, 청소부, 마트 직원으로 일하며 몇 달을 버텼다. 하루 8시간을 일해도 방 한 칸 구하기 어려운 현실. 두 개의 일자리를 뛰어도 의료보험 하나 들 수 없는 구조.
그녀가 만난 동료들은 게으르지 않았다. 오히려 누구보다 성실했다. 새벽부터 밤까지 일했고, 아파도 참았으며, 모욕적인 대우도 견뎠다. 그럼에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일은 더 이상 존엄을 보장하지 않았다.
20년이 지난 지금, 상황은 나아졌을까? 최저임금은 올랐지만 집값은 더 빠르게 뛰었다. 플랫폼 노동은 자유를 약속했지만 더 깊은 불안정을 가져왔다. 일자리는 늘었다지만 괜찮은 일자리는 줄었다.
한국의 구인난도 비슷한 맥락 아닐까. 사람이 없는 게 아니라 그 조건에서 일하려는 사람이 없는 것. 최저임금에 가까운 급여, 불규칙한 근무시간, 없는 것과 다름없는 복지. 이런 자리를 두고 인력난이라 부르는 게 맞나?
청년들이 일을 기피한다고들 한다. 하지만 그들이 거부하는 건 일 자체가 아니다. 일해도 나아지지 않는 삶, 일할수록 소진되는 몸, 일하는 동안 잃어버리는 시간. 이런 것들을 거부하는 거다.
폐업 소식 앞에서 우리가 물어야 할 건 따로 있다. 왜 그 일자리는 사람을 구할 수 없는가? 무엇이 그 노동을 기피하게 만드는가? 일의 가치를 우리는 제대로 인정하고 있는가?
동네 식당 문 앞에 붙은 폐업 안내문을 다시 본다. 할머니의 마지막 인사가 적혀 있다. 그동안 감사했다고. 이 감사 뒤에 숨은 것들이 보인다.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노동, 인정받지 못한 가치, 지속될 수 없었던 일터.
『노동의 배신』이 폐업을 바라보는 시선은 표면적 현상 너머의 구조를 향한다. 바버라 에런라이크은 개별 사건의 원인을 개인에게 돌리는 대신, 그 사건을 가능하게 만든 사회적 조건을 추적한다. 이런 관점은 반복되는 문제의 근본 원인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폐업 문제의 핵심은 제도와 현실 사이의 괴리에 있다. 법과 정책은 존재하지만 현장에서 작동하지 않거나, 작동하더라도 의도와 다른 결과를 낳는 경우가 빈번하다. 바버라 에런라이크이 주목하는 것도 바로 이 간극이다. 설계된 세계와 살아가는 세계 사이의 거리.
한국 사회에서 폐업은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경제 구조, 인구 변화, 기술 발전, 세대 갈등 등 복합적인 요인과 얽혀 있다. 한 가지 변수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복잡성이 정책 입안자들을 곤혹스럽게 만든다.
한국의 압축적 근대화는 폐업 분야에서도 독특한 양상을 만들어냈다. 선진국이 수십 년에 걸쳐 겪은 변화를 불과 한 세대 만에 경험하면서, 제도적 성숙 없이 양적 팽창만 이뤄진 측면이 있다.
일본의 -37이라는 숫자가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우리도 이미 그 길 위에 있는지 모른다. 일할 사람이 없다고 한탄하기 전에, 사람이 일하고 싶은 조건을 만들었는지 돌아볼 때다.
동네 식당 폐업과 일본 고용지수 악화로 노동력 부족의 실상을 보여주고 있어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청년들이 일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일해도 나아지지 않는 삶의 구조를 거부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저출산과 고령화가 극단에 다다른 사회 모습을 통해 향후 사회적 변화를 예측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