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40년쯤 되면 우리는 2025년 5월을 어떻게 기억할까. STO 법안이 통과되고, EU 가상자산 규제가 논의되고, 미국 IRA 수정안이 떠들썩했던 때로? 아마 아닐 것이다. 법안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이렇게 법안 통과에 목을 매는가.
법안이 통과되면 뭔가 달라질 거라는 기대. 이 믿음은 어디서 온 것일까. 증권형 토큰, 가상자산, 전기차 세액공제. 이름만 들어도 복잡한 이 제도들이 내 월급봉투를 두껍게 만들어줄까. 내 출퇴근길을 편하게 해줄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우리는 안다. 그런데도 법안 통과 소식에 주가가 오르내린다.
아마티아 센이 1999년에 쓴 『자유로서의 발전』을 다시 펼쳐본다. 그는 제도와 삶의 거리를 끊임없이 묻는다. 인도가 민주주의를 도입했지만 여전히 기근에 시달리던 시절, 그는 제도 그 자체가 아니라 제도를 작동시키는 실질적 자유에 주목했다. 투표권이 있다고 민주주의가 아니듯, 법안이 통과됐다고 변화가 일어나는 건 아니다.
한국에서 새로운 금융 관련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기까지 평균 2.3년이 걸린다. 시행령과 시행규칙이 만들어지고 실제 적용되기까지는 또 1년. 그사이 시장은 이미 다른 곳으로 움직인다. 법은 늘 현실을 쫓아가기 바쁘다. 그런데 우리는 왜 법안 통과를 변화의 시작점으로 착각하는가.
센은 이렇게 썼다. 개발이란 사람들이 실제로 누리는 자유를 확대하는 과정이라고. 병원이 생겨도 진료비를 낼 돈이 없으면, 학교가 있어도 일해야 해서 못 가면, 그건 발전이 아니다. STO든 가상자산이든, 일반 시민이 접근할 수 없는 제도는 껍데기다.
한국의 금융 관련 법령은 2024년 기준으로 347개다. 2015년엔 289개였다. 10년 사이 60개 가까이 늘었다. 그런데 가계부채는 줄었나. 청년들의 자산 형성은 나아졌나. 법은 늘었지만 삶은 제자리다. 어쩌면 더 팍팍해졌다.
자유로서의 발전. 센의 이 개념이 지금 와서 새롭게 읽힌다. 그는 GDP 성장률이나 법적 제도의 숫자가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이 가치 있게 여기는 삶을 실제로 선택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한국에서 새 금융상품에 투자할 자유가 생겼다 해도, 여윳돈이 없는 사람에겐 무의미하다.
언론은 법안 통과를 대서특필한다. 증권가는 전망 보고서를 쏟아낸다. 하지만 내일 아침 출근길은 오늘과 같을 것이다. 제도의 언어와 일상의 언어 사이 간극. 이 거리를 줄이지 못하는 한, 아무리 많은 법안이 통과돼도 우리 삶은 나아지지 않는다.
센이 말한 실질적 자유. 그건 선택지가 많아지는 게 아니라,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커지는 것이다. 법안은 선택지를 늘릴 뿐이다. 능력을 키우는 건 다른 차원의 문제다. 교육, 소득, 정보 접근성, 사회적 연결망. 이런 것들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제도도 무용지물이다.
2025년 5월, 또 하나의 법안이 통과됐다. 15년 뒤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이름. 하지만 우리는 오늘도 뉴스를 보며 기대한다. 이번엔 다를 거라고. 정말 그럴까. 아니면 우리가 묻는 질문이 틀렸을까. 법안이 아니라 삶을 바꾸려면, 우리는 무엇을 물어야 하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