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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세상을 보다 5월 4째주] 디지털 신원

종이 신분증을 스마트폰에 넣는 순간, 우리는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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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1984
조지 오웰
1984조지 오웰 · 1949

김 과장은 지갑에서 운전면허증을 꺼냈다가 다시 넣었다. 곧 필요 없어질 물건이었다. 회사에서 받은 공문에는 내년부터 모든 신원 확인이 디지털로 전환된다고 적혀 있었다. 플라스틱 카드를 만지작거리며 그는 묘한 불안감을 느꼈다. 이 작은 조각이 사라지면, 자신을 증명하는 방식도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디지털 자격증명 시대가 성큼 다가왔다. 운전면허증, 주민등록증, 각종 자격증이 모두 스마트폰 속으로 들어간다. 정부는 편의성을 강조한다. 지갑을 잃어버릴 걱정도, 위조될 우려도 없다고. 하지만 김 과장의 불안은 단순한 기우일까.

1949년 조지 오웰이 『1984』를 썼을 때, 사람들은 텔레스크린이라는 감시 장치를 두려워했다. 빅브라더가 모든 것을 지켜본다는 설정은 당시로선 극단적인 상상이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자발적으로 모든 정보를 디지털 기기에 담고 있다. 오웰이 상상한 것보다 훨씬 정교한 방식으로.

물론 디지털 전환은 막을 수 없는 흐름이다. 이미 금융거래의 대부분이 온라인으로 이뤄지고, 의료 기록도 전산화됐다. 이제 신원 확인마저 디지털로 넘어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처럼 보인다. 효율성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이 정당화된다.

그러나 오웰이 경고한 것은 기술 자체가 아니었다. 그는 인간이 자신의 자유를 너무 쉽게 포기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안전과 편의를 위해서라면 감시도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것. 디지털 신원증명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편리함과 맞바꾸어 무엇을 내주고 있는가.

한국의 개인정보 유출 건수는 2020년 1억 3400만 건에서 2023년 2억 8900만 건으로 늘었다. 3년 사이 두 배가 넘게 증가한 수치다. 디지털화가 진행될수록 유출 규모도 커진다. 종이 신분증 시절에는 상상도 못 했던 규모다.

김 과장은 스마트폰 화면을 들여다봤다. 곧 이 작은 기계 안에 자신의 모든 것이 담길 것이다. 주민등록번호, 운전 경력, 건강 상태, 자격 증명까지. 한 번의 해킹으로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어 보였다.

『1984』에서 주인공 윈스턴은 결국 빅브라더를 사랑하게 된다. 저항은 무의미했고, 순응만이 살 길이었다. 오늘날 우리도 비슷한 선택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다만 강요가 아닌 자발적 선택이라는 점이 다를 뿐.

기술 진보를 거부할 수는 없다. 디지털 전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무비판적 수용과 건전한 경계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우리가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는지, 그 교환의 대가가 정당한지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김 과장은 운전면허증을 다시 지갑에 넣었다. 아직은 이 낡은 플라스틱 조각이 필요했다. 하지만 머지않아 추억의 물건이 될 것이다. 그때 우리는 과연 더 자유로워질까, 아니면 더 촘촘한 그물 안에 갇힐까. 답은 아직 아무도 모른다.

국내 개인정보 유출 건수
출처: 한국인터넷진흥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