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신이 오늘 아침 집을 나서 회사까지 걸었던 그 길을 떠올려보라.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무심코 스마트폰을 들여다보았을 것이다. 좁은 인도 위로 불법 주차된 차량을 피해 차도로 내려섰다가 다시 올라왔을지도 모른다. 그저 일상의 한 장면이었을 테지만, 사실 당신은 매 순간 위험과 협상하고 있었다.
행정안전부가 9월 29일 발표한 '보행자 안전문화 확산' 정책은 이런 일상의 위험을 정책의 언어로 번역한 것이다. 보도블록 정비, 횡단보도 조명 개선, 보행자 우선도로 확대. 물리적 환경을 바꾸어 안전을 확보하겠다는 의지다. 하지만 정작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다른 데 있지 않을까. 왜 보행자는 늘 '조심해야 하는' 존재가 되었는가.
도시계획가 제인 제이콥스는 1961년 펴낸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에서 걷기 좋은 도시의 조건을 탐구했다. 그는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의 허드슨 가를 매일 관찰하며 기록했다. 아침 8시, 쓰레기를 내놓는 주민들. 오전 10시, 빨래를 널러 나온 이웃들. 오후 3시,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 저녁 6시, 퇴근하는 직장인들. 이 모든 움직임이 거리를 살아있게 만든다고 그는 썼다.
제이콥스가 주목한 것은 신호등의 개수나 인도의 폭이 아니었다. 그는 사람들이 거리에서 느끼는 안전감이 어디서 오는지 물었다. 상점 주인의 시선, 이웃의 눈길, 거리를 향해 열린 창문들. 이런 '거리의 눈들'이 보행자를 지킨다고 믿었다. 도시는 단순한 통행로가 아니라 사람들이 만나고 교류하는 공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거리는 차량을 위한 공간이 되었다. 보행자는 정해진 구역 안에서만 움직여야 하고, 신호가 바뀌기 전에 서둘러 건너야 한다. 도로교통법은 보행자에게 '주의 의무'를 부과한다. 피해자가 될 수 있는 약자에게 조심하라고 요구하는 역설. 이것이 과연 정상적인 도시의 모습일까?
한국의 보행 중 사망자 비율은 OECD 평균보다 높다. 2023년 기준으로 전체 교통사고 사망자 중 36.5%가 보행 중 사망했다. OECD 평균 19.3%의 거의 두 배다. 특히 65세 이상 고령자의 보행 중 사망 비율은 52.8%에 달한다. 나이가 들수록 길 위에서 더 위험해진다는 뜻이다.
제이콥스는 도시계획가들이 만든 '슈퍼블록'을 비판했다. 거대한 아파트 단지, 넓은 간선도로, 지하 주차장. 효율적이고 현대적으로 보이는 이 구조가 오히려 거리를 죽인다고 했다. 사람들이 걷지 않는 거리는 위험해진다. 범죄가 늘고, 교통사고도 는다. 안전은 CCTV나 가드레일이 아니라 사람의 존재에서 나온다.
지금 우리 도시의 모습은 어떤가. 아파트에서 나와 지하 주차장으로 직행하고, 차를 타고 목적지의 주차장으로 들어간다. 거리를 걷는 시간은 최소화된다. 그렇게 거리는 차량만의 공간이 되고, 남은 보행자들은 더욱 위험해진다. 노인, 어린이, 장애인처럼 차를 운전할 수 없는 사람들만 길 위에 남는다.
보행자 안전 정책이 필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단순히 사고를 줄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누구나 안심하고 걸을 수 있는 도시를 만드는 것, 그것이 진짜 목표여야 한다. 제이콥스의 말처럼 거리가 다시 살아나야 한다. 사람들이 걷고 싶어하는 거리, 머물고 싶어하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당신이 내일 아침 다시 그 길을 걸을 때, 한 번쯤 멈춰서 주위를 둘러보면 어떨까. 이 거리가 누구를 위한 공간인지, 당신은 여기서 환영받는 존재인지. 그 질문이 시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