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명. 2020년 11월, 육아휴직 기간 차별에 맞서 헌법소원을 제기한 비공무원 노동자들의 숫자다. 공무원은 3년, 일반 노동자는 최대 1년 6개월. 같은 아이를 키우는데 왜 시간의 무게는 다를까. 5년이 흐른 지금도 헌재의 답은 없다.
노동의 가치를 재는 저울은 애초에 기울어져 있었다. 파주의 동물보호소에서 일하는 고현선은 12월 파업을 앞두고도 동물들 곁을 떠날 수 없었다. 낮엔 생명을 돌보고 저녁엔 농성장으로 향하는 그의 하루는, 돌봄노동이 어떻게 제도의 사각지대에 놓이는지 보여준다. 파업 대열에서 제외된 동물돌봄팀. 생명을 다루는 일은 멈출 수 없다는 이유였지만, 그렇다면 그들의 노동권은 어디에 있는가.
E-8 비자로 입국한 어업 계절노동자 A씨의 이야기는 더 무겁다. 계약서에 적힌 월급과 실제 받은 돈의 간극. 그 사이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법무부가 TF를 구성하고 인권위가 조사에 나섰다지만, 이미 벌어진 일들은 되돌릴 수 없다. 2025년 이민자체류실태조사가 말해주는 것은 숫자뿐이다. 그 숫자 뒤에 숨은 사람들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카를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노동력을 '특수한 상품'이라 불렀다. 다른 상품과 달리 노동력은 인간과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150년 전 쓰인 이 문장이 지금도 낡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노동을 상품으로만 보는 시선이 여전히 지배적이기 때문은 아닐까.
마르크스가 주목한 것은 노동시간이었다. 하루 24시간 중 얼마를 일하고, 얼마를 쉬는가. 이것이 인간다운 삶의 조건을 결정한다고 봤다. 그런데 현대의 노동은 시간만으로 측정되지 않는다. 고현선의 동물돌봄은 퇴근 후에도 이어지는 걱정이고, A씨의 어업노동은 바다의 리듬에 맞춰진 불규칙한 시간이다.
육아휴직 기간의 차이도 결국 시간의 문제다. 아이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 그 시간의 질이 고용 형태에 따라 달라진다면, 우리는 어떤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일까. 공무원 부모 밑에서 태어난 아이와 비공무원 부모 밑에서 태어난 아이. 그들이 받는 돌봄의 시간이 제도적으로 차별받는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존엄이라는 말이 무거워지는 순간들이 있다. 통제와 고용불안에 맞선 세 여성 노동자의 이야기가 뉴스가 될 때, 우리는 무엇을 봐야 할까. 그들의 용기일까, 아니면 그런 용기가 필요한 현실일까. 노동의 존엄은 선언이 아니라 일상에서 만들어진다. 매일의 일터에서, 계약서의 문구에서, 휴직 기간을 정하는 법조문에서.
『자본론』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노동자는 자유롭게 노동력을 판매하지만, 일단 계약이 성립되면 자유는 사라진다. 이 역설은 21세기에도 유효하다. E-8 비자의 조건부 자유, 동물돌봄 노동자의 제한된 파업권, 비공무원의 짧은 육아휴직. 모두가 이 역설의 변주다.
111명의 헌법소원은 아직 답을 기다리고 있다. 그 기다림의 시간 동안에도 누군가는 아이와 함께할 시간을 빼앗기고, 누군가는 계약서와 다른 현실을 견디며, 누군가는 파업할 권리조차 유보당한 채 일한다. 숫자는 늘어나고 있다. 차별받는 노동자의 수, 헌법소원을 기다리는 날들,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
처음의 숫자로 돌아가 보자. 111명. 개인이 아닌 집단으로 목소리를 낸 이유는 무엇일까. 혼자서는 바꿀 수 없는 구조적 문제였기 때문이다. 노동의 존엄은 개인의 의지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다. 제도가, 법이, 사회가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 그 긴 여정의 시작점에 111이라는 숫자가 놓여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