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항제철소 3고로 앞. 새벽 교대 시간이면 작업자들이 모여든다. 방진 마스크를 쓴 얼굴들이 희뿌연 조명 아래서 번호표를 받는다. 용광로에서 새어 나온 열기가 겨울 추위를 녹인다. 철강 냄새와 석탄 가루가 뒤섞인 공기. 이곳에서 누군가는 오늘도 다친다.
2026년 1월, 재계는 산업재해로 술렁였다. 포스코와 한화, HD현대의 신년사에는 '안전'이라는 단어가 유독 많이 등장했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4년째. 기업들은 여전히 긴장 상태다. 철강·조선·건설업계는 구조적으로 사고 위험이 높다. 언제든 표적이 될 수 있다는 불안이 경영진을 짓누른다.
고로 앞 대기실. 작업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다. 한 사람이 팔에 붕대를 감고 있다. 어제 크레인 작업 중 다쳤다고 한다. 산재 신청을 할지 고민 중이다. 동료들은 침묵한다. 누구도 쉽게 조언하지 못한다.
철학자 시몬 베유는 1934년 르노 자동차 공장에서 일했다. 프레스기 앞에서 하루 열 시간씩 부품을 찍어냈다. 공장 체험기를 묶은 책이 『노동일기』다. 그는 묻는다. 노동자는 왜 자신의 고통을 말하지 못하는가. 기계 앞에서 인간은 어떻게 변하는가.
베유는 공장에서 이상한 현상을 목격한다. 노동자들이 서로의 사고를 외면한다. 동료가 다쳐도 모른 척한다. 연대가 아니라 고립을 선택한다. 왜일까. 그는 깨닫는다. 공장이라는 공간 자체가 인간을 바꾼다고. 기계의 속도에 맞춰 움직이다 보면 타인의 고통도, 자신의 고통도 잊게 된다고.
고용노동부 통계를 보면 제조업 산재 사고는 감소 추세다. 2018년 27,686건에서 2023년 24,053건으로 줄었다. 하지만 중대재해는 여전하다. 사망자 수는 크게 줄지 않았다. 통계 뒤에 숨은 현실도 있다. 산재 은폐, 미신고, 하청 전가. 숫자로 포착되지 않는 위험들.
3고로 내부. 쇳물이 끓는 소리가 굉음을 낸다. 온도는 섭씨 1,500도. 작업자들이 긴 막대로 쇳물을 젓는다. 한 치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 베유는 이런 순간을 두고 썼다. 기계 앞에서 인간은 기계가 된다고. 생각할 여유가 없다고. 그저 반복할 뿐이라고.
안전교육장. 신입 직원들이 영상을 본다. 사고 예방 수칙을 외운다. 하지만 현장은 다르다. 납기에 쫓기고 실적에 쫓긴다. 안전 수칙은 뒷전이 된다.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 일상이 된다. 베유의 말이 맞았을까. 공장은 인간을 길들인다. 위험마저도 당연하게 받아들이도록.
다시 3고로 앞. 교대 시간이다. 낮 근무자들이 나오고 밤 근무자들이 들어간다. 표정들이 비슷하다. 피곤하고 무덤덤하다. 누군가는 오늘도 다칠 것이다. 통계에 잡힐 수도, 잡히지 않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매일 위험을 감당한다는 사실이다. 그 위험의 대가는 누가 치르는가. 베유의 질문은 90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