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조 564억원. 한화손해보험이 지난해 기록한 신계약 CSM(계약서비스마진)이다. 여성보험이 주력 상품으로 자리잡으면서 달성한 성과라고 한다. 보험업계에서 1조원이라는 숫자는 단순한 매출 지표가 아니다. 그것은 누군가의 불안이 화폐로 환산된 값이기도 하다.
보험의 본질은 위험의 거래다. 미래의 불확실성을 현재의 확실한 비용으로 바꾸는 교환. 여성들이 보험에 가입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질병, 사고, 그리고 경력단절이라는 삼중의 위험 앞에서 최소한의 안전망을 확보하려는 것이다. 문제는 이 안전망조차 개인이 사비로 마련해야 한다는 점이다.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위험사회』(1986)에서 현대사회를 '위험의 생산과 분배'가 핵심이 된 사회로 정의했다. 부의 분배가 아닌 위험의 분배. 그의 통찰은 40년이 지난 지금 더욱 선명해졌다. 국가와 기업이 감당하던 위험이 개인에게 전가되고, 개인은 그 위험을 다시 보험회사에 판매한다. 위험의 시장화, 불안의 상품화가 일상이 된 것이다.
의료 파업이 보험금 청구 증가로 이어졌다는 대목도 의미심장하다. 공적 의료체계가 흔들릴 때 사적 보험의 역할이 커진다. 이는 단순한 인과관계가 아니다. 공공성의 후퇴와 시장의 확대라는 더 큰 흐름의 일부다. 병원 문이 닫히면 보험사 창구가 북적인다. 누군가의 위기는 다른 누군가의 기회가 된다.
벡은 위험사회에서 '안전'이 새로운 계급 지표가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돈이 있는 사람은 위험을 회피할 수 있지만, 없는 사람은 위험에 그대로 노출된다. 보험료를 낼 수 있는가 없는가가 삶의 질을 가르는 기준이 되는 것이다. 1조원이라는 숫자는 그래서 양면적이다. 누군가에겐 성공의 지표이지만, 사회 전체로는 불안의 총량을 보여주는 지표이기도 하다.
더 깊은 질문은 이것이다. 왜 여성들이 특별히 더 많은 보험을 필요로 하는가? 출산, 육아로 인한 경력단절, 임금격차, 노후 빈곤. 이 모든 구조적 문제를 개인이 보험료로 해결하려 한다. 사회가 해결해야 할 문제를 시장이 대신하고, 그 비용은 다시 개인이 지불한다. 순환구조 속에서 보험회사만 성장한다.
위험사회의 역설은 위험을 줄이려는 노력이 오히려 새로운 위험을 만든다는 것이다. 보험에 가입하면 안심이 되는가? 아니다. 보험료 부담, 보장 범위의 제한, 약관의 함정. 불안을 해소하려다 새로운 불안을 떠안는다. 벡은 이를 '조직화된 무책임'이라 불렀다. 모두가 위험을 관리한다고 하지만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체계.
한국의 민간의료보험 가입률은 이미 80%를 넘었다. OECD 국가 중 최고 수준이다. 공적 의료보장이 탄탄한 나라들과는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 개인이 감당하는 의료비 부담이 늘수록 보험회사의 매출도 는다. 이것이 정상적인 사회보장 시스템인가?
다시 1조원이라는 숫자로 돌아가자. 이 숫자가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보험산업의 성장? 금융시장의 활성화? 아니면 사회적 불안의 증대? 숫자는 중립적이지만 그것이 놓인 맥락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이 1조원이 만들어낸 안전망이 얼마나 촘촘한가가 아니다.
진짜 질문은 왜 우리 사회가 1조원어치의 불안을 생산하고 있는가이다. 그리고 그 불안을 개인의 지갑으로 해결하게 만드는 구조는 과연 지속가능한가. 벡의 경고대로, 위험을 상품화하는 사회는 결국 더 큰 위험을 잉태할 수밖에 없다. 보험료 납부서를 받아들 때마다, 우리는 이 질문과 마주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