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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세상을 보다 3월 4째주] 노동의 경계

원청과 하청, 그 사이에서 흐릿해진 책임의 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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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노동의 역습
그림자 노동의 역습
이반 일리치
그림자 노동의 역습이반 일리치 · 2015

어느 물류센터의 새벽 4시. 컨베이어 벨트가 멈추지 않고 돌아간다. 분류 작업을 하는 노동자들의 손놀림이 기계처럼 반복된다. 그들이 입은 조끼에는 각기 다른 회사 로고가 새겨져 있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일을 하지만, 급여명세서에 찍힌 회사 이름은 제각각이다. 원청 직원은 사무실에 앉아 있고, 실제 물건을 나르는 사람들은 하청의 하청 소속이다.

이번 주 노란봉투법을 둘러싼 논란이 뜨겁다. 사모펀드 업계까지 이 법안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노동자가 원청을 상대로 직접 교섭할 수 있게 하는 이 법안이 왜 금융가의 화두가 되었을까. 투자와 경영의 경계가 모호해진 시대, 책임의 주체는 누구인가.

2015년에 출간된 『그림자 노동의 역습』에서 이반 일리치는 산업사회가 만들어낸 보이지 않는 노동을 추적한다. 그는 임금노동을 가능하게 만드는 무급노동, 즉 '그림자 노동'이 현대사회를 지탱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가정주부의 가사노동부터 소비자가 스스로 하는 셀프서비스까지, 경제 통계에 잡히지 않는 일들이 실은 자본주의의 숨은 기둥이라는 것이다.

일리치의 통찰은 오늘날 플랫폼 노동시대에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배달 라이더는 플랫폼 회사의 직원일까, 자영업자일까. 물류센터에서 일하는 하청 노동자는 누구를 위해 일하는가. 형식적으로는 독립된 사업자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종속된 노동자인 이들의 지위는 어떻게 규정되어야 할까.

한국의 간접고용 노동자 수는 꾸준히 증가해왔다. 2018년 87만명에서 2023년 112만명으로 5년 만에 25만명이 늘었다. 전체 임금노동자의 5.3%가 파견, 용역, 도급의 형태로 일한다. 이들 중 상당수는 원청 회사의 사업장에서 원청 직원들과 똑같은 업무를 수행한다. 그러나 고용 형태가 다르다는 이유로 임금과 복지에서 차별받는다.

일리치는 이렇게 썼다. 그림자 노동은 산업 생산을 보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필수 조건이라고.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간접고용은 기업 운영의 부수적 요소가 아니라 핵심 전략이 되었다. 위험과 책임을 외주화하면서도 통제권은 포기하지 않는 이 시스템에서, 노동자들은 보호받을 권리마저 외주화된다.

사모펀드가 노란봉투법을 경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투자한 기업의 노사 분규에 휘말릴 수 있다는 우려다. 하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자본의 지배구조가 얼마나 복잡하게 얽혀 있는지를 보여준다. 돈의 흐름은 국경을 넘나들며 자유롭게 이동하지만, 그 돈이 만들어내는 노동 현장의 책임은 누구도 지려 하지 않는다.

물류센터의 새벽은 오늘도 똑같이 시작된다. 컨베이어 벨트 위를 흐르는 상품들처럼, 노동자들도 이 회사에서 저 회사로 옮겨 다닌다. 그들이 진짜로 일하는 곳은 어디인가. 그들을 고용한 회사인가, 아니면 그들의 노동으로 이익을 얻는 회사인가. 노란봉투법이 던지는 질문은 단순히 법적 책임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시대 노동의 본질을 묻고 있다.

한국 간접고용 노동자 수 추이
출처: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