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 규모부터 큽니다. SK는 약 140조 원을 들여 2기가와트급 AI 데이터센터를 세웁니다. 삼성은 60조 원으로 휴머노이드 로봇과 차세대 배터리 라인을 깝니다. 한화는 55조 원, 현대차는 42조 원, 두산은 5조 1천억 원, LG는 9조 4천억 원을 위성과 자율주행, 소형모듈원전 등에 얹습니다. 사천을 우주항공 허브로 삼고 구미에서 창원까지 이어지는 축을 첨단로봇 벨트로 묶겠다는 지도는 국가 전략이라는 이름이 어색하지 않습니다.
교육은 이런 지도 위에서 거의 언제나 같은 배역을 맡습니다. 산업이 필요로 하는 사람을 필요한 만큼 제때 공급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그 배역에 '인재 양성'이라는 이름을 붙여 왔습니다. 이름이 워낙 자연스러워서 정작 무엇을 밀어내는지는 좀처럼 되묻지 않습니다.
여기에 한 권의 책을 나란히 놓고 싶습니다. 미국의 법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이 쓴 『공부를 넘어 교육으로』(궁리)입니다. 원제는 'Not for Profit', 곧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저자는 전 세계가 국내총생산과 경제성장률을 교육의 목표로 삼는 흐름을 조용한 위기라 부릅니다. 눈에 잘 띄지 않고 당장은 손해도 없어 보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위험한 위기라는 말입니다.
누스바움의 진단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성장을 위한 기술 교육 자체를 적으로 돌리지 않습니다. 다만 교육을 '이익 창출 모델'로만 설계할 때 조용히 밀려나는 세 가지 능력을 지목합니다. 권위와 통념에 눌리지 않고 스스로 따져 묻는 비판적 사고, 나와 다른 처지의 사람을 안에서부터 헤아리는 공감과 연민, 눈앞에 없는 타인의 삶을 그려 보는 서사적 상상력입니다. 저자는 인문학과 예술이 이 세 능력을 길러 내는 토양이라고 봅니다. 이 능력들이 무너질 때 위태로워지는 것은 개인의 교양만이 아니라 민주주의라는 체제 자체라고 경고합니다.
왜 하필 민주주의일까요. 시민이란 표를 던지는 사람이기 이전에 자신과 다른 이의 이해를 상상하고 조정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낯선 이웃의 두려움을 상상하지 못하는 사회, 권위가 시키는 대로 따져 묻기를 그만둔 사회는 아무리 부유해도 스스로를 다스리는 힘을 잃습니다. 누스바움이 인문학을 '민주주의가 필요로 하는 것'이라 부른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인문학은 교양의 장식이 아니라 자치의 근육입니다.
이 관점을 들고 312조 원의 청사진으로 돌아가 봅니다. 이런 발표를 교육의 언어로 옮길 때 흔히 따라붙는 말이 '인재 양성'입니다. 아이는 특정 공정과 기술에 맞춰 준비되어야 할 자원으로 호명되기 쉽습니다. 인재라는 말은 사람을 높여 부르는 듯하지만 실은 사람을 산업의 필요라는 척도 하나로 재는 말이기도 합니다. 재능 있는 자원. 그 안에는 아이가 무엇을 궁금해하는지, 무엇에 분노하고 무엇 앞에서 머뭇거리는지가 들어설 자리가 좀처럼 없습니다.
물론 이렇게 되물을 수 있습니다. 좋은 일자리야말로 존엄의 조건이 아니냐고, 반도체 라인과 데이터센터가 지역 청년의 미래를 열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옳은 말입니다. 누스바움도 경제를 경멸하지 않았습니다. 누스바움이 던진 물음은 '성장이냐 인문학이냐'라는 양자택일이 아니라 성장을 이야기할 때 우리가 무엇을 함께 말하지 않는가에 가깝습니다. 312조 원을 말하는 문장의 밀도와 그 산업을 살아갈 사람의 내면을 말하는 문장의 밀도가 이토록 다르다는 사실. 저는 이 비대칭이 오래 마음에 걸립니다.
가장 뼈아픈 대목은 효율의 논리입니다. 비판적 사고는 종종 생산성을 방해합니다. 시키는 대로 하지 않고 따져 묻는 직원, 규정의 부당함을 상상하는 시민은 공정을 지연시키니까요. 그래서 이익만을 좇는 설계는 은근히 순응을 선호합니다. 누스바움이 두려워한 대목도 여기입니다. 잘 훈련되었으나 스스로 판단하기를 배우지 못한 사람들, 유능하지만 남의 고통을 상상하지 못하는 사람들. 그런 사회는 매끄럽게 돌아가다가 정작 방향을 물어야 할 순간에 아무도 손을 들지 못합니다.
첨단산업 벨트를 짓는 일과 이런 시민을 기르는 일은 결코 충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함께 가야 합니다. 데이터센터를 설계하는 손에는 그 데이터가 누구를 감시하고 누구를 배제할 수 있는지 따져 묻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자율주행을 만드는 이에게는 기계가 사람의 목숨을 어떻게 저울질하는지 상상하는 힘이 필요합니다. 첨단일수록 그렇습니다. 기술이 강력해질수록 그 기술을 쥔 사람의 비판적 사고와 공감은 사치가 아니라 안전장치가 됩니다.
312조 원의 발표 옆에는 이런 질문도 놓여야 합니다. 우리는 이 아이들을 어떤 라인에 투입할지만 정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이 아이들이 어떤 사회를 상상하고 어떤 부당함에 분노할 사람으로 자랄지도 함께 묻고 있습니까. 인재 양성이라는 말이 교육의 칸을 남김없이 채워 버릴 때 우리는 아이를 기르는 것이 아니라 부품을 주문하는지도 모릅니다.
발표장의 숫자는 잊히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 숫자가 겨냥한 아이들은 20년 뒤 이 나라의 유권자가 되고 부모가 되고 서로의 이웃이 됩니다. 그때 우리가 그들에게 바라는 것이 단지 세계 1위의 첨단 제조 경쟁력뿐일 리는 없습니다. 누스바움의 책이 낡지 않는 까닭이 바로 여기입니다. 누스바움은 교육이 무엇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정작 교육이 놓치기 쉬운 것을 가리켰습니다. 이익 바깥에 남는 것들. 아이가 인재이기 이전에 한 사람이라는, 잊으면 크게 잃고 마는 그 사실 말입니다.
'첨단산업 발전비전'의 언어는 자본과 공정으로 촘촘하지만, 그 산업을 살아갈 사람의 내면을 다루는 언어는 놀랄 만큼 성깁니다.
이 비대칭 자체가 누스바움이 경고한 '이익 중심 교육'의 징후일 수 있습니다.
기술이 강력해질수록 그것을 쥔 사람의 비판적 사고와 공감은 장식이 아니라 안전장치가 된다는 역설을, 312조 원짜리 청사진은 아직 충분히 말하지 않았습니다.
- 정책브리핑 · 영남권 첨단산업 발전비전 국민보고회
- 재정경제부 보도참고자료
- 뉴스핌/아주경제 등 복수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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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CI 논문 · 누스바움의 민주주의를 위한 시민교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