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고 답하다
코로나

코로나 시대의 삶이란

김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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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그게 대체 뭐야? 신종 바이러스라는데 코로나에 걸리면 대체 어떻게 되는 건가?
코로나가 시작됐을 때 나는 발목 수술로 병원에 입원해 수술을 받았다. 간단한 수술이었지만 깁스를 풀 때까지 입원해있었는데, 걷지를 못하니 강제로 TV만 봐야 했다. TV에서는 코로나에 대한 뉴스가 실시간 보고되었다. 나는 다른 환자들과 함께 하루 종일 병실에서 휴게실에서 코로나에 관한 뉴스만 봤다. 하루 종일 코로나, 코로나, 코로나 뉴스만 듣고 코로나 얘기를 하다 보니 점점 더 현실감이 없어졌다. 내가 마치 재난 영화의 주인공이 된 것만 같았다. 그러다 나중에는 나 자신이 스칼렛 요한슨이 여주인공으로 출연했던 영화 “아일랜드” 속에 갇혀있는 것만 같았다. 영화 “아일랜드”에서는 똑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똑같은 표정으로 대형 스크린을 올려다보는 장면이 있는데, 정말이지 내가 그랬다. 다른 환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똑같은 환자복을 입고 똑같은 표정으로 TV 화면만 쳐다보고 있는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의 모습은 영문도 모르는 채 갑자기 외딴 섬, 혹은 외딴 연구소에 갇힌 영화 속 주인공들 그 자체였다.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TV에만 의존한 채 지내다 보니 사람들은 점점 더 예민해져 갔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병실로 들어오게 하면 어떡합니까? 진짜 왜 저렇게 생각이 없어?”

“휴게실로 가요!”
어쩌다 누군가 면회라도 오면 병실 안 사람들은 무척이나 예민해졌다. 아무리 가족이라도 다른 환자들이 있는데 병실에 있게 하면 어떻게 하느냐, 지정된 보호자가 아니면 병실에 들어오게 하면 안 된다, 등등 외부에서 누가 면회라도 오는 날이면 여기저기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지정된 보호자라고 해도 병원 밖으로 나갔다 오면 같은 병실의 환자들은 인상을 찌푸렸다.

사진출처 : 픽사베이
사진출처 : 픽사베이

 

외부인, 바깥 세계, 언제 어떻게 전염될지 모르는 바이러스, 치료약도 개발되지 않은 미지의 바이러스, 그렇게 코로나는 나와 내가 거하고 있던 병원 사람들의 마음속에 ‘불안감’을 증폭시키며 우리의 일상을 야금야금 갉아먹기 시작했다.
차라리 드라마를 보자. 차라리 뉴스를 보지 말자.
나는 내 안에서 눈덩이처럼 몸집을 부풀리는 ‘불안감’을 잠재우기 위해 그렇게 마음먹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나 혼자 아무리 코로나를 의식하지 않으려고 해도 주변 사람들의 불안감이 계속 전해져왔기 때문이다. 마스크를 구하기 어렵다는 뉴스가 보도되면서부터는 우리의 ‘불안감’은 한층 더 고조되어갔다. 하루에 한 번 환자들에게 마스크가 지급되었는데 편법으로 마스크를 더 받아가는 환자들이 눈에 띄면서부터는 여기저기서 불만의 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외부 진료를 받는 사람들한테는 안 줘야 되는 거 아니야?"

“입원 환자들한테는 하루에 한 번씩만, 그것도 진료실 가는 환자들한테만 주면서 이게 말이 되는 거야!”
이러다 폭동이라도 일으키는 거 아니야, 싶을 정도로 입원환자들의 불만은 거세어져만 갔다. 게다가 병원 측에서는 거동이 불편한 장기 입원환자들을 간병하고 있는 간병인들에게는 마스크 지급을 해주지 않았다. 간병인들은 간병인들대로 불만이 많았다. 환자를 간병하려면 진료실에도 다녀와야 하고 심부름도 다녀와야 하는데 간병인들에게는 마스크를 지급하지 않다니, 이게 무슨 차별이냐면서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렇게 코로나는 내가 입원해있던 병원에 불안감과 불만을 폭탄처럼 투하했다. 이 폭탄의 위력이 내게 미친 영향은 정말이지 대단했다. 나는 목발을 짚고 뒤뚱거리며 간신히 화장실과 휴게실만 오고 갈 수 있었는데, TV에서 흘러나오는 코로나 뉴스를 흘려들으며 사람들의 터지기 일보 직전의 화난 표정을 스쳐 지날 때마다 이 ‘전쟁’이 과연 끝나기는 할 것인가, 나는 과연 이 ‘전쟁터’에서 무사히 살아남아 집으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런 어처구니없는 생각에 사로잡히곤 했다.
“퇴원해서도 조심해! 코로나 조심하구!”

“코로나 그거 약도 없다잖아. 그냥 그냥 집에만 처박혀 있어!”
내가 퇴원을 하던 날에도 같은 병실에 입원해있던 언니들은 내게 ‘코로나’ 조심하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병원에 입원했던 건 발목 수술 때문이었는데 정작 발목 관리 잘하라는 당부보다도 ‘코로나’ 걱정이 먼저였다.
“다들 코로나 조심하세요!”
병실에 남아 퇴원을 기다리는 동료 환자들에게 나 역시 코로나 조심을 당부하며 병원을 나왔다. 그렇게 나는 병원을 두 군데나 옮겨 다닌 끝에 거의 한 달여 만에 집으로 무사 귀환할 수 있었다.
“엄마! 나, 학교 안 간대! 뭐야, 진짜!”
3월 초,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딸아이의 불만이 나를 덮쳤다. 병원에 있을 땐 집으로만 돌아가면 ‘코로나’의 전쟁터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줄 알았건만, ‘코로나’는 우리 집 역시 점령하고 있었다.
“엄마! 나 진짜 이게 뭐야! 작년에 아파서 일 년 휴학하는 동안 올해는 학교갈 수 있다고 얼마나 좋아했는데! 말만 대학생이지 캠퍼스 생활은 해보지도 못하게 됐잖아!”
딸애는 19학번이지만 손목 수술 때문에 휴학을 했던 터라 2020년을 애타게 기다려왔다. 대학 1학년, 새내기들만이 누릴 수 있는 캠퍼스 생활을 흠뻑 누려보지도 못했는데 이제는 학교에도 갈 수 없다니!
딸애의 불평불만과 억울함은 낭만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의 불만과 억울함은 현실에 근거했다. 집에서 딸애가 다니게 될 대학교까지는 거리가 상당해서 이미 하숙집을 구해놓은 터였다.
“뭐라구? 그럼 하숙집은 어떻게 되는 거야? 빨리 하숙집 아저씨한테 전화해봐!!!”
한 달 치도 아니고 한 학기 하숙비를 미리 선결제를 해놨기 때문에 나를 애가 바짝바짝 탔다. 딸애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하숙집에 전화부터 해보라는 나의 성화에 눈을 흘겼지만 저 역시도 나처럼 애가 타긴 탔는지 바삐 전화를 걸었다.
“네? 진짜루요? 그래도…”
하숙집 아저씨와 통화를 하는 내내 딸애의 얼굴은 흙빛으로 변해갔다.
“왜? 아저씨가 뭐라는데? 환불 안 해주신대? 엉?”
나는 딸애 옆에 바짝 붙어 앉아 대체 얘기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아내려고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러나 딸애의 휴대폰 저 너머에서 들려오는 하숙집 아저씨의 음성은 웅얼웅얼 정체를 알 수 없는 코로나보다 더 희미하게 들려올 뿐이었다.
“엄마.”
전화를 끊고 딸애가 나를 쳐다봤다. 얼굴에 비구름이 몰려와 있었다. 보나 마나 뻔할 뻔 자였다.
“안 된다는 거야?”
내 목소리는 내가 듣기에도 날이 시퍼렇게 서 있었다.
“응, 하숙비 낼 때 서약서 썼던 거 기억나지? 그 집이 바로 학교 앞이라 대기까지 해서 들어가는 집이라 미리 선결제를 해야 된다고 했었잖아. 안 그러면 방도 못 구한다고, 육 개월 치 선불로 내면 대신 육십만 원이나 할인해주는 대신 환불은 안 된다고 했었잖아. 엄마, 기억나지?”
딸애는 내 눈치를 살피면서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엄마! 나 그냥 하숙집에서 살게, 코로나 때문에 학교 안가도 하숙비가 너무 아깝잖아. 그냥 하숙집에서 지내면서 공부도 더 열심히 하고 아르바이트도 해볼게. 엄마! 진짜 미안해!”
딸애는 울먹거리더니 급기야 눈물을 뚝뚝 흘렸다. 코로나 때문에 학교에도 한 번 못 가보고 같은 과 아이들 얼굴 한 번 못 보게 된 것도 억울한데 거기다 하숙비까지 생각하지 억울하고 분해서 어쩔 줄 모르겠다며 한참을 울어 제겼다.
뭐냐, 이거? 돈은 내가 냈는데 내가 너를 달래줘야 하는 거냐?정말이지… 어이가 없었다. 억울하다며 대성통곡을 하는 딸애 앞에서 정작 돈 낸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천장을 쳐다보며,
“이노무 코로나! 코로나! 코로나! 징그러운 코로나!”
코로나 탓을 할 수밖에는 없었다.며칠 뒤 딸애는 정말 짐을 싸서 하숙집으로 갔다. 자기가 없어도 엄마 혼자 괜찮겠느냐는 딸애의 말에 나는 “무척이나 힘들 것 같다, 정말이지 외로울 것 같다…”며 슬픈 낯빛을 해보였지만 속으로는 너무 너무 신이 났다. 아들애 역시 군복무 중이었기에 딸애가 하숙집으로 떠나면 나는 그야말로 생전 처음 ‘싱글 라이프’를 맞이하는 것이었다.
“엄마 혼자 잘 지낼 수 있으니까 괜히 자주 연락하지말구, 주말에도 안 와도 돼! 넌 공부에만 집중해, 알았지?”
혹여 딸애가 나를 걱정해서 주말마다 집으로 올까봐 “엄마는 혼자 있어도 괜찮다!”는 말을 수십 번 한 뒤에 딸애를 하숙집으로 쫓아보냈다.
드디어!나는 혼자 남아 집안을 둘러봤다. 모든 것이 새롭게 보였다. 거실이며 주방, 욕실, 게다가 친정엄마가 절대로 버리면 안 된다고 해서 10년 넘게 소파 대신 거실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돌침대까지도 새롭게 보이는 것이었다.
그래! 이제 드디어 진정한 싱글 라이프가 시작된 거야!나는 현관문을 열면 제일 먼저 보이는 돌침대에 새 커버를 씌우고 베개 대신 대형쿠션을 배치하고 식탁에 조화 꽃까지 장식했다. 작업실 가구 배치까지 다시 하고 생전 듣지도 않는 재즈를 틀어놓았다. 물론 블루투스 스피커까지 인터넷으로 주문해서 말이다.
이제 친구들을 불러서 저녁마다 파티를 해야지!아니야, 낮에도 친구들을 잔뜩 불러서 커피를 마시자!요즘 애들 말로 낮벙? 술벙? 커피벙?벙이란 벙은 다 하는 거야!내 집에서 내가 내 맘대로 친구들 불러다 파티를 한다는데 누가 뭐라고 할 거야?흐흐흐 하하하 푸하하하
생각만 해도 웃음이 터져 나왔다. 결혼을 일찍 한 터라 가끔씩 싱글인 동료 작가들의 작업실에 놀러 갈 때마다 그들의 자유가 너무나도 부러웠었다. 작업실에 친구들을 초대해 함께 커피 마시고 함께 술 한 잔을 할 수 있는 공간을 가진 그들이 얼마나 부러웠던가! 나는 내 집에서도 식구들 눈치가 보여서 함부로 초대도 못하는데!
나는 집안 셋팅을 마치자마자 휴대폰의 연락처 폴더를 열었다.“어쩌냐… 코로나라 나가기가 좀 그래.”“너무 고마운데 너희 집에 가려면 버스 타고 지하철을 두 번이나 갈아타야해, 요즘 코로나라 대중교통 이용하기가 좀…”“우리도 자가격리에 동참해야지.”"코로나 좀 잠잠해지면 보자.”
럴수 럴수 이럴 수가!드디어 나의 본격적인 싱글 라이프가 시작됐는데 이럴 수가! 평소 친하게 지냈으나 나의 바쁜 일과 탓에 얼굴도 잘 볼 수 없었던 친구들만 엄선해 연락을 했더니! 다들 약속이나 한 듯이 초대는 고맙지만 다음에 보자는 것이었다. 다음에 언제? 그야 코로나가 잠잠해지면.
“이노무 코로나! 코로나 이거 대체 언제 끝나는 거야!!!”
나는 천장에 대고 또 코로나 욕을 해댔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도 아니고 병원에서 퇴원하고 딸애가 하숙집으로 떠난 뒤로도 하루에 몇십 번씩이나 계속해서.
병원에서 퇴원을 했으나 이번엔 다시 집에서 자가격리가 시작되었다. 자가격리라고 해봤자 사실 나에게는 별로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평소에도 작가라는 직업 탓인지 하루의 대부분을 작업실 책상 앞에 지내던 나로서는 자가격리가 그리 새롭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모처럼 작정하고 싱글 라이프를 누려보겠다는 계획에는 차질이 있었으나 나의 일상은 코로나 전이나 코로나 이후나 별로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러나 정말?코로나 전이나 코로나 이후나 늘 자가격리의 삶이었다고, 별반 달라진 것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은 나의 완벽한 착각이었다. 하숙집으로 떠났던 딸애는 이 주를 못 견디고 집으로 돌아왔다.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미리 하숙방을 구해놨던 지방 학생들이 온라인 수업을 하게 되면서 아예 서울로 올라오지를 않았다고 했다. 30개가 넘는 방에 두 세명의 하숙생만 머물게 되니 하숙집에서는 음식을 제대로 마련해주지도 않았다. 쉰 김치에 어쩌다 식탁에 계란 후라이가 올라오는 날이면 진수성찬인 판이니 딸애의 입장에서는 돈 내고 사서 고생을 하는 격이었다.
“엄마! 너무 미안해, 그냥 다시 갈까?"
집으로 돌아온 딸애는 나의 눈치를 보면서 미안해했다.
“야, 하숙비 아깝다고 생각하다가 영양실조 걸리면 병원비가 더 나가! 그냥 집에 있어!”
나는 쐐기를 박듯 딸애에게 집에 머물 것을 명령했다.한 달 뒤 아들애가 군에서 제대를 했다. 2학기가 되어 복학을 하기 전까지는 아들애도 마냥 집에 있어야만 했다.
코로나 이전에도 분명 아이들과 나는 한 집에서 함께 생활을 했다. 달라진 것은 없는 듯했지만 코로나 이후의 함께 하는 삶은 격이 달랐다. 코로나 이전에는 나만 대부분 집에서 생활을 했고, 아이들은 아침이면 학교에 갔다. 학교에 갔다가 학원에 갔다가 늦은 저녁이나 밤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스무 살이 넘은 아이들이 학교에도 가지 않고 친구를 만나러 외출을 하지도 못했고 말 그대로 하루 종일 집에만 있어야했다.
나는… 나는 미칠 지경이었다.“제발 부탁이야! 제발 밤에 자고 아침에 일어나!”“제발 부탁이야! 야식 좀 시켜먹지 마!”“제발 부탁이야! 밥 차렸을 때 다 같이 일어나서 한꺼번에 밥 먹어! 엄마가 뭐 하루 종일 밥만 차리는 사람이냐? 엉?”나는 하루 종일 “제발 부탁이야!”를 외쳐대고 있었다.
“언니! 애들이 학교에도 안 가고 집에만 있으니까 정말 미칠 지경이야. 이건 뭐 성인들이 한 집에서 하루 종일 붙어 있다시피 하니까 부딪치는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니야.”
나는 견디다 견디다 못 견딜 정도가 되면 언니나 여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하소연을 했다.
“야! 배부른 소리 좀 하지마! 언니는 지금 죽을 지경이야. 너도 알다시피 언니가 지금 대학가에서 호프집을 하잖냐. 2월부터 3월까지 개강 시즌에 잠깐 벌어서 일 년을 먹고 살다시피하는데 진짜 지금 죽일 지경이다. 애들이 학교에 오지를 못하니 오리엔테이션을 하나, 개강 파티를 하나, 아예 손님이 없어! 당장 이번 달 가게 월세도 못 내게 생겼어. 나, 진짜 뭐 먹고 사냐? 큰일이다. 큰일!”
대학가 앞에서 호프집을 하는 언니는 코로나 여파로 당장 가게 문을 닫게 생겼다고 난리였다. 나의 불평불만은 그야말로 배부른 소리가 맞았다.
“막내야! 애들이 학교도 안 가고 하루 종일 집에만 있으니까 먹기만 해대. 진짜 우리 애들 왜 이러니? 내가 배달 못 시켜 먹게 하니까 나 잠들면 배달시켜서 야식을 먹는 거 있지? 내가 잔소리 좀 하면 밖에 나가지도 못하는데 이런 식으로라도 스트레스를 풀어야 한다나 뭐라나, 정이는 얼마나 먹어댔는지 몸무게가 갑자기 10킬로그램이나 쪘어. 상이는 제대하고 하루 종일 게임만 하다. 컴퓨터 앞에 달라붙어서 게임하는 꼴을 하루 종일 보고 있으려니까 너무 너무 화가 나! 이렇게 몇 달 더 있으면 진짜 애들한테 맨날 화만 낼 것 같다. 어쩌냐?”
언니의 생활고 앞에 깨갱, 꼬리를 내린 나는 이번에는 여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하소연을 했다.
“언니! 난 진짜 언니가 부럽다. 언니는 그래도 집에서 돈을 벌 수 있지만 나는 대체 뭐냐. 우리 포차는 그래도 원룸촌에 있으니까 큰 언니네 보다는 나을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야. 코로나 시작되고부터는 원룸에 사는 자취생들도 아예 밖으로 나오지를 않아. 우리 가게는 전부 단골손님 위주로 장사했잖아? 그런데 단골손님들도 아예 오지를 않아. 다들 배달만 시켜 먹나봐.”
원룸촌에서 퓨전포차를 하고 있는 여동생은 코로나 때문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배달 메뉴를 새로 뽑아서 배달을 시도해보려고 했으나 배달하는 쪽에 배달비를 주고 나면 고생만 하고 남는 건 하나도 없다고 했다.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그저 코로나가 어서 끝나기만을 기다려야 할 뿐이었다.
코로나, 코로나, 코로나.우리는 바야흐로 코로나를 살고 있었다.마스크 부족으로 인해 정해진 날짜에만 마스크를 살 수 있을 때에는 정해진 일과처럼 약국으로 마스크를 사러 가서 마스크를 사기 위해 길게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고, 어쩌다 가족들이나 지인들과 안부 전화라도 하게 되면 코로나 조심하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으며 해가 뜨나 해가 지나 집 밖으로는 나갈 수 없는 감금 생활을 하다 보니 너나 할 것 없이 조금씩은 이상해지고 있었다. 누구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하루 종일 청소를 해대고, 누구는 밤을 새워 게임에 몰두하고, 누구는 세상과의 끈을 놓치지 않기 위해 SNS에 열중하고, 누구는 요리에 집중해 매일 매일 살점을 불리우고, 누구는 갑자기 바뀐 재택근무로 인해 오히려 출퇴근 시간도 없이 하루 종일 일을 하게 됐고, 누구는 면역에 좋다는 약이란 약은 다 먹어보면서 스스로에게 임상실험을 했다.
이제는 마스크를 쓰지 않고 밖으로 나가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잠깐 장을 보러 시장에 갈 때도 마스크를 잊지 않는다. 나도 모르게 습관이 되어버렸다. 코로나로 인해 우리는 또 어떤 습관을 갖게 되었을까?
바야흐로 코로나 시대를 살면서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언택트(un-contact)시대에 강제적으로 익숙해지고 있다. 사람을 직접 만나지 않고도 물품을 구매하거나 서비스를 받는 일이 일상이 되어버린 시대에 강제적으로 편입되고 있다. 갑자기, 아무런 준비도 없이, 우리의 라이프 스타일을 전복시켜버린 코로나, 코로나로 인한 우리의 일상의 변화가 마치 어제까지는 옳다고 했던 가치를 오늘부터는 잘못되었으니 바꾸라고 했던 이데올로기의 전복처럼 느껴지는 것은 나의 지나친 억측일까?
문화적인 변화든 이념의 변화든 그 어떤 변화든 변화는 사회구성원들이 무리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천천히 스며들 듯이 이루어져야 부작용이 없다. 그러나 코로나는 우리로 하여금 갑자기 강제적으로 우리의 많은 부분을 바꿀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사진출처 : 픽사베이
사진출처 : 픽사베이

 

우리는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까? 그야말로 언택트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자기관리를 해나가야 하는 것일까? 혹시 저 사람이 확진자가 아닐까? 누구나 감염자가 될 수 있어 불신의 벽이 높아만 가는 불신의 시대에 어떻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심리적 거리를 가깝게 유지할 수 있을까?
‘코로나’는 갑자기 우리에게 찾아왔다. 그러나 우리는 어쩌면 앞으로도 형태를 달리해서 계속해서 우리에게 들이닥칠 ‘코로나’에도 우리의 삶이 뿌리 채 흔들리지 않도록 적응해나갈 수밖에 없지 않을까?
상추를 사러 시장에 나갔다 돌아오자마자 욕실로 달려가 손을 씻으며 과연 코로나 이후의 삶은 또 어떻게 달라질까 생각하는데, 내가 손을 씻는 동안에도 우리 집 강아지는 어서 빨리 나와서 자기 배를 만져달라며 손 씻는 주인을 아무런 의심 없이 올려다보며 힘차게 꼬리를 쳐댔다.

 

 

이명랑

소설가. 장편소설 “꽃을 던지고 싶다”, “삼오식당”, “나의 이복형제들”, 창작집 “입술”, “어느 휴양지에서”, 청소년 소설 “사춘기라서 그래?”, “사춘기라서 그런 거 아니거든요!”, “구라짱”, “폴리스맨, 학교로 출동”,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등이 있다.

코로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