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와 반란에 대해서 이야기 나눠보자
1. 들어가며
자크 랑시에르는 민주주의자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민주주의는 “제도적이고 국가적인 정체로, 최종적으로는 어떤 합의의 도출을 목표로 하는 하나의 절차적 과정”이 아니다. 오늘날 민주주의의 외피를 쓴 것은 과두정에 불과하다. 그가 이해하는 민주주의란 “불화(mésentente)와 계쟁(係爭, litige)의 과정”이며, 해방이고, 정치이다. 랑시에르에게 ‘정치적인 것’은 통치의 과정과 평등의 과정이라는 두 개의 이질적 과정들의 마주침이다. 여기서 통치의 과정은 치안으로, 평등의 과정은 정치 또는 해방이라고 불린다. 그가 말하는 ‘치안’은 억압적 국가 장치의 무장된 요소라는 제한된 의미를 넘어서, 경험을 구조화하는 범주들과 분할의 체계를 포함하는 것으로 확장된다. 그의 말을 빌리면, “사람들은 집단들의 결집과 동의, 권력의 조직, 장소들 및 기능들의 분배, 이러한 분배에 대한 정당화 체계가 이루어지는 과정들 전체를 일반적으로 정치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나는 이러한 분배 및 이러한 정당화 체계에 대해 다른 이름을 부여할 것을 제안한다. 나는 그것을 ‘치안(police)’이라고 부르자고 제안하겠다. (중략) 그리하여 치안은 무엇보다 행위 양식들과 존재 양식들 및 말하기 양식들 사이의 나눔을 정의하는 신체들의 질서이며, 이 질서는 신체들이 그것들의 이름에 따라 일정한 장소에서 일정한 과제를 부여받도록 만든다. 이것은 푸코의 치안(police, polizei) 개념, 즉 권력과 지식의 특수한 장치들, 관료제와 통계 같은 공식적 지식들을 넘어서 이른바 ‘감각적인 것의 나눔’까지도 포함한다. 여기서 ‘감각적인 나눔’이란 “공통된 어떤 것의 실존을 탈은폐하는 동시에, 그 내부에서 각각의 부분들/몫들과 위치들을 정의하는 경계 긋기를 탈은폐하는 감각 지각이라는 자명한 사실들의 체계이다. 겉보기에 이 두 개념은 각각 정치와 미학/감성학이라는 경험의 상이한 체제들, 사변의 상이한 장들에서 유래한 것처럼 보이지만, 모든 치안은 지각하기와 느끼기의 방식인 동시에 그 반대이기도 하다.
‘치안’의 논리와는 반대로, 랑시에르에게 ‘정치’란 평등에 관한 근본적 긍정에서 출발한다. “정치는 두 개의 이질적인 과정들이 만나는 자리와 방식이 있을 때 일어난다”(D, 30)는 그의 주장처럼, ‘평등’은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단언되거나 입증되는 것이다. 그것은 아나키적 평등, 말하기와 사고하기의 평등이며, 모든 질서에 대립하여 산발적으로 일어난다. 그것은 모든 인간은 말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으며, 따라서 정치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등식에서 얼핏 보이는 스캔들이다. 이 평등은 특정한 상황, 특정한 ‘잘못’과 관련해서 산발적으로 일어나지만, 그럼에도 이것은 “몫 없는 자들의 몫이라는 행태”를 띤다. 이렇게 배제된 몫/부분은 공동체의 파트너가 될 수 없으며, 치안에 의해 정의되는 이해관계의 갈등 당사자들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회의 셈 자체에 의해 배제되어 있고, 고유성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몫 없는 이-고대의 빈민들, 근대의 제3신분이나 프롤레타리아-는 무 내지는 전체와 다른 몸을 가질 수 없다”(D, 9)는 것이다.
이에 비해 알랭 바디우는 민주주의를 하나의 국가형태로 간주한다. 그는 “민주주의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민주주의의 이름으로는 세상을 진정으로 변화시킬 수 없다고 주장하며 스스로 ‘반-민주주의자’이기를 자처한다. 그러나 그가 반대하는 민주주의 역시 ‘과두정’이라는 점에서 사실상 두 사람은 비슷하다. 즉, 정치를 ‘행정’이나 ‘국가 경영’의 차원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점이나, 정치가 의회나 정당 같은 정치제도를 벗어난 곳에서 행해진다고 본 점에서 같다. 또 이들 모두 ‘평등 전제’를 사용한다는 점에서도 같다. 다만, 랑시에르가 정부 형태나 사회생활 방식으로 이해되는 ‘민주주의’라는 이해를 내쫓고 이 ‘단어를 전유하기 위해서’ 투쟁하자고 주장하면, 바디우는 자본-의회주의적 방식으로 이해된 민주주의가 아니라 ‘공산주의’의 다른 말로서의 민주주의를 주장한다는 점(이른바 ‘공산주의 가설’)에서 차이가 있다. 이들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이것만이 아니다. 둘 다 알튀세르와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한때는 스스로를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자처했던 사람들이지만 계급주의를 비판한다는 점에서도 같다. 정치나 계급, 정당 등을 사회학적 범주라기보다는 하나의 정치적 과정으로 다루기 때문이다. 그래서 둘 다 줄기차게 주체화 형상의 하나로서 노동자 형상을 고수한다. 더욱이 둘 모두 자신을 해방의 사상가라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같다.
그러나 바디우가 『메타정치 개요』에서 두 장(章)을 할애해 랑시에를 비판적으로 다루고, 랑시에르 역시 『미학 안의 불편함』에서 바디우를 비판하고 있다는 점을 보면, 둘 사이에는 무엇인가 차이가 있음에 틀림없다. 그 차이는 무엇이고 무엇에서 유래하며 그 정치적 함의는 무엇일까? 이 글에서는 기존 정치 개념에 대한 전복적 접근을 하고 있는 랑시에르와 바디우 논의를 통해 ‘해방의 정치’의 이론적 가능성을 탐색하고자 한다.
2. 랑시에르와 바디우 : 같거나 혹은 다르거나
랑시에르와 바디우는 모두 평등을 강조한다. 이들이 말하는 평등은 주체화의 문제, 따라서 정치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두 사람에게 정치는 주체적인 것이며, 평등과 정의는 이것을 하나의 공리, 즉 개입을 위한 토대이자 기초로 간주하는 주체에 의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 달리 말해, 이들이 말하는 평등은 세계 속에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것도, 실현되어야 할 프로그램도 목표도 아니다. 평등은 객관적인 게 아니다. 랑시에르는 “평등은 우리가 내세우는 가치가 아니라, 각각의 사례 속에서 전제되고 입증되며, 증명해야 하는 하나의 보편인 것이다. (중략) 보편성은 증명들의 작인(作因)이다. (중략) 주체화 과정은 이처럼 탈정체화(탈동일화) 혹은 탈계급화 과정이다”라고 논했다. 그러므로 “평등은 달성해야 할 목표가 아니라 출발점이다. 이것은 어떤 경우라도 고수해야 할 가정이었다.” “우리는 평등이 사회적인 것, 또는 사회정의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주장, 진술과 규정의 체제와 관련이 있다는 주장에 대해 동의해야만 하며, 따라서 평등은 프롤레타리아의 역사라는 양피지에 단순하게 휘갈겨 쓴 게 아니라 모든 해방 정치에 잠복해 있는 원리들이다.” 또 “사유는 하나이자 유일한 인간 능력이며, 엄격하게 말해서 사유란, 사유를 통해서 인간 동물이 진리의 궤적에 의해 붙들리고 횡단되는 것이다. (중략) 사람들은 생각하며, 사람들은 진리를 말할 수 있다.”(M, 98~99).
또한 바디우에게 중심적인 것은 사고(생각하기)의 평등과 진리이다. 사고의 평등은 인간존재나 인간 동물을 동물성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이자 (혹은 우리의 실존을 규정하는 것이자) 우리가 진리를 손에 넣을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디우는 헤라클리투스의 “사유는 만인에게 공통된 것이다”나 스피노자의 “인간은 사고한다”라는 공리를 언급하면서 이것은 사유가 선택받은 소수의 특권이 아니라 보편적 능력임을 뜻한다고 결론 내린다. 이처럼 바디우와 랑시에르의 주체는 평등주의적 공리에 충실함으로써 스스로를 긍정하고 입증하는 주체다.
그러나 이런 공통점 혹은 유사성에 차이가 똬리를 틀고 있다. 랑시에르와 바디우는 미학(감성학)에서부터 정치에 이르기까지 여러 지점에서 ‘블화’를 보여준다. 그중에서도 정치와 관련된 핵심적 불일치는 공통된 것처럼 보이는 평등의 문제, 평등과 진리의 관계 문제, 평등과 보편성의 문제, 보편성과 ‘투사’의 문제 등과 관련되어 있다. 바디우는 『메타정치 개요』에서 랑시에르가 자신의 개념을 거의 그대로 베꼈으나 자신의 핵심적인 정치적 지향을 존재론과 함께 지워버리면서 베꼈다고 주장한다. 바디우가 베꼈다고 주장한 것은 ‘상황 상태’와 ‘명명으로서의 사건’이라는 개념이다. 전자는 지배와, 후자는 저항과 관련된다. 그런데 사실 차이는 정치관, 평등관 등에서 비롯된다.
먼저 지배 또는 상황 상태와 관련된 대목을 보자. 바디우는 “지배 개념-혹은 불평등한 자들의 하위구조로서 전체의 부분들의 셈하기-과 관련된 하에서, 내가 이를 나의 전문용어로 ‘상황 상태’라고 명명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는데, 랑시에르는 이를 ‘치안’이라고 명명했다”고 규정한다(M, 116). 한마디로 랑시에르의 ‘치안’ 개념은 자신의 ‘상황 상태’ 개념을 복제한 것이라는 얘기다. 상황 상태는 두 번째의 셈이다. 반면 치안은 감각적인 것의 나눔 혹은 이것의 정당화와 관련된다. 따라서 이 둘은 겹치는 게 없는 듯 보인다. 그러나 치안 역시 셈과 관련된다. 랑시에르의 『불화』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공동체의 자격을 이렇게 언급한다. “소수 사람들의 부, 뛰어난 이들이 자신들의 이름을 얻어오는 덕 또는 탁월함, 그리고 인민(데모스)에게 속하는 자유(eleutheria)” 그러나 실제로는 데모스는 셈해지지 않는다. 이들의 동일화는 공백으로 채워져 있다. 따라서 데모스가 자신들을 긍정하고 입증한다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 공동체(polis)에 의해 수행된 셈을 논박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또한 이러한 몫 없는 이들의 몫의 존재에 의해, 전체인 무(無)의 존재에 의해 공동체는 정치 공동체로서, 다시 말하면 근본적인 계쟁에 의해, 곧 공동체의 부분들의 ‘권리들’ 이전에 이 부분들의 셈에 관해 다투는 계쟁에 의해 분할된 공동체로서 존재한다”(D, 9). 이런 내용을 보면, 바디우의 주장은 근거가 있다.
이제 두 번째로 베꼈다는 혐의를 받은 사건과 사건의 명명과 관련된 대목을 보자. 바디우는 “모든 것은 셈하기 절차에 의해 상황화된 상황의 일종의 중심적인 공백 절차를 사건을 통해 명명으로 소환하는 것에 달려 있다”고 논한다(M, 116). 사건은 특이성에 관련된 것이자 저항에 관련된 것이다. 특이성(현시는 되나 재현되지 않음)에 관련되므로, 사건이란 하나로-셈하기를 취소시키고 상황을 원래의 다수적 상황으로 이끌며, 궁극적으로는 그곳에서 실재적인 것을 드러내 보이는 하나의 항이다. 이런 점에서 사건은 공백을 소환하거나 명명하는 것, 달리 말해 상황의 공백을 인정하라고 강제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누군가가 일련의 파업과 충돌을 ‘혁명’이라고 지시할 때, 그/그녀는 이것들이 사태의 정상적 과정, 즉 상황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상황에 새로운 어떤 것이자 전에는 상황에 부재했거나 볼 수 없었던 어떤 것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 어떤 것이 공백이고, 따라서 그렇게 명명한다는 것은 그렇게 인정하라고 강제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바디우의 명명에 필적하는 랑시에르의 개념은 ‘셈해지지 않은 자들의 셈하기’다. 이를테면 랑시에르는 『불화』에서 1832년 오귀스트 블랑키의 재판에 대해 언급한다. 블랑키는 프롤레타리아트를 하나의 직업으로 인정하길 거부하는 판사의 면전에 대놓고 자신을 프롤레타리아트라고 불러달라고 요구했다. 치안의 논리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는 어떤 직업도 가리키지 않는다. (중략) ‘그러나 혁명적 정치의 관점에서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직업은 어떤 집단에 속해 있다는 고백, 선언이다”(D, 37~38). 이것은 명명의 (특수한) 형태를 도입함으로써 셈해지지 않은 자들을 셈하려는 시도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랑시에르의 정치 개념, 즉 셈해지지 않은 자들의 셈하기인 지배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정치 개념은 바디우의 것과 유사하다.
하지만 바디우가 보기에 랑시에르의 가장 큰 문제는 존재론의 부재와 그에 따른 정치적 오류다. “랑시에르의 교리는 평등의 공리를 규정하는 민주주의적인 반-철학으로 정의될 수 있으며, 이는 명명의 우발적 역사성을 지양하는 집단적인 것의 부정적 존재론에 정초되어 있다”(M, 115). 랑시에르의 교리는 민주주의적이지만 반-철학이다. 그 이유는 존재론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에 대한 첫 번째 비판은 랑시에르가 존재론을 제공하지 못한 결과, 정치에 있어서 ‘상황 상태’의 역할, 일반적으로는 ‘국가’의 역할을 제대로 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바디우는 “우리는 랑시에르가 ‘사회’라든지 ‘치안’ 따위와 같은 선택지들을 더 선호하면서 ‘국가’라는 말을 피하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될 것이다”(M, 119)라고 언급하며, 이것은 랑시에르가 정치적 상태 자체에 대해 도전할 수 없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랑시에르가 의회정치에 도전하지 못하는 것은 이 때문이라는 얘기다. 다시 바디우의 말을 들어보자. “랑시에르는 모든 정치과정이, 심지어 그가 이해한 의미에서도, 스스로를 조직된 과정으로 현시한다는 점을 말하지 못한다. 그는 대중들이라는 유령(phantom masses)을 명명되지 못한 국가와 겨루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 대신에 실제 상황은, 우리가 소수의 드문 정치적 투사들을 의회제 국가의 ‘민주주의적’ 헤게모니와 겨루게 만들 것을 요구한다”(M, 121~122). 또한 랑시에르는 현실의 정치를 철학자들의 정치나 진리의 정치에 대립시킴으로써 정치적이거나 철학적인 공준들을 무너뜨린다. 그는 “『불화』에서 (중략) 현실 정치(우리가 원하는 정치가 아니라 발생한 정치)를 철학자들의 정치, 혹은 진리의 정치에 대립”(M, 114)시키는데, 이런 접근법은 “지배(mastery)의 공준들, 특히 정치적이거나 철학적인 공준들을 무너뜨린다”(M, 109)고 비판했다. 이는 바디우가 『메타정치 개요』에 수록된 또 다른 글인 「랑시에르와 평등한 자들의 공동체」에서 랑시에르를 ‘니체-없는 푸코’로 규정한 것도 이와 관련된다. 그에 따르면 푸코와 마찬가지로, “랑시에르의 모험이 들어설 자리는 지식 체계 ‘장치’에 내적이지 않다”(M, 107).
두 번째는 진리와 사건, 투사의 문제와 연결된다. 랑시에르는 정치적 과정들의 존재론을 소홀히 하기 때문에, 사건의 출현을 인정하고 그것에 충실한 사람들인 투사의 역할을 무시한다고 비판받는다. 이것은 진리와 보편의 문제와 관련되는데, 바디우는 진리와 보편이 같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진리이지 않은 보편이란 없으며, 보편이지 않은 진리란 없기 때문이다. 물론 둘 중에서 바디우에게 근간을 이루는 것은 진리다. 그런데 초과점의 정리(부분집합의 합은 원래의 집합보다 더 크다는 것으로, 상황 상태는 상태를 항상 초과한다는 정리)에 따르면, 상황 상태가 필연적으로 셈으로부터 배제하는, 통치할 수 없는 ‘초과’가 항상 있다. 바디우의 진리는 바로 이 ‘초과’에서 탄생한다. 물론 상황 상태는 이 초과를 보이지 않게 하려고, 상황에 현시된 모든 원소를 재-현시하려고, 초과를 배제하고 억압함으로써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그러나 이 초과는 진리를 발생시키는 ‘사건’의 형태로 회귀한다. 물론 상황 상태나 국가의 맥락에서 보면 사건은 변칙적이고 별종적이다. 사건은 어떠한 지위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건이 상황에 귀속하는가는 상황 상태의 관점에서는 결정될 수 없다. 상황에서 사건의 지위는 상황 상태에 의해 유발된 셈을 따라 결정될 수 없기 때문에, 사건은 개입을 필요로 한다. 이 결정과 개입은 상황 상태가 셈을 통해 적법하다고 인정한 것을 참조하지 않은 채 이뤄져야 한다. 따라서 개입은 바디우가 충실성이라 부른 것에 기초하여 이뤄져야 한다. 그런데 누가 이를 수행하는가? 그것은 투사들이다. 투사들은 자신들이 증언하는 진리의 보편성을 선언하며, 이것을 ‘증명’하는 것이 이들의 과제다. 물론 이 과제는 무한하다. 진리를 향하는 투사들이야말로 주체이며, 이들의 과제는 진리가 출현하는 상황을 사건의 진리와 연결시키는 것이다.
세 번째 비판은 상황 상태와 명명 이론에 필요한 정치적 정향을 삭제하고 이를 자신의 아나키스트적 경향으로 대체했다는 것이다. 볼셰비키 혁명이나 바스티유 함락 등의 사건들은 고유한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가에 대한 결정의 문제를, 일종의 도박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이 결정에서는 정치적 정향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런데 랑시에르는 이런 것을 지워버렸다. 그래서 바디우는 랑시에르가 “우리 시대엔 이름이 없다고 말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바디우는 자신이 평등주의적인 정치적 사건들의 모든 요소들(사건의 구조, 이것을 명명하는 행위, 그 원리에의 충실성 등)을 체계적으로 분석하는 반면에, 랑시에르는 그저 “평등주의적 사건(occurrence)의 역사주의적 현상학”에 빠져 있을 뿐이라고 본다.
바디우에 따르면, 랑시에르의 테제는 “모든 지배(mastery)는 사취(imposture)”인 동시에, “모든 유대는 지배/스승을 전제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평등한 자들의 공동체’라는 모티프에 호소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결국 모든 지배/스승을 모조리 없애거나, 아니면 “지배의 순수하고 텅 빈 표시 아래서 뭉친 평등”로 귀결될 것이며, 바디우는 두 내용이 모두 랑시에르가 선호하는 입장을 아예 파괴할 것이고, 결국 우리는 “평등한 자들의 공동체의 꿈, 혹은 투사의 목표로서의 유적 공산주의의 꿈”을 포기할 처지에 놓이게 될 것이라고 지적한다. 랑시에르의 이런 접근법은 “아포리아적 방식으로, 영원히 유예된 정치적 개입으로 향한다. (중략) ‘더욱이 이를’ 대체하는 것으로 기능할 수 있는 현실정치의 질서에서 우리를 무로 이근다”(M, 108, 110).
이에 대한 랑시에르의 반박은 평등 전제, 그리고 진리나 존재론의 필요성 여부와 관련된다. 진리 문제가 바디우에게 매우 중요하지만, 랑시에르에게는 중요치 않다. 그에게 평등은 진리가 아니라 정치가 존재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것이다. 랑시에르는 “정치적 활동은 항상, 치안의 질서에 대해 원칙적으로 이질적인 어떤 전제, 곧 몫 없는 이들의 몫이라는 전제를 상연(mise en actes)함으로써 치안의 질서와 감각적 나눔들을 해체하는 시위/드러냄의 양식이다. 몫 없는 이들의 몫이라는 전제는 최종 심급에서 질서의 순전한 우연성, 아무 말하는 존재자의 다른 아무 말하는 존재자와의 평등성을 스스로 드러낸다”(D, 30)고 논한다. 바로 랑시에르가 강조하는 것은 사유의 근본적인 ‘잘못/왜곡’이다. 그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장소에서 벗어나 사고하며 그것이 탈동일화, 탈계급화라는 말의 의미다. 감각적인 것의 나눔을 의문에 부친다는 것이다.
평등을 일종‘의 철학적·정치적 공리로 간주하는 바디우에게는 진리 주체로서의 투사 개념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것은 진정한 주체와 나머지 모두로 나눈다. 그래서 하나는 둘이 된다.(BE, 237) 보편은 모두/전체에 호소하지만, 상황 속에서 진리의 투사들과 나머지 모두를 나누고, 그리하여 둘 사이에 반목(enmity)을 만들어낸다. “정치적 진술의 상황화된 보편성은 이 보편성을 유발하는 투사의 실천을 통해서만 체험될 수 있다.” 결국 바디우에게 평등은 행동의 원리로서 일어나는 어떤 게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사건의 투사들에 의해 인식되고 창출된다. 평등은 각자가 자신의 위치가 아니라 자신의 선택으로 돌아 갈 수 있다는 것이다. 평등은 정치적 행동의 전제가 아니다. 오히려 ‘인민’이 평등을 향유할 수 있는 공간을 여는 것은 투사들의 행동 결과이다.
그러나 랑시에르에게 정치는 평등 전제로부터 출발하는 집단적 행동이다. 정치운동에 대한 모든 참여자들은 평등하다. 여기서는 투사들과 나머지라는 정치의 분할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 점에서 랑시에르에게 존재론이 없다는 지적은 타당하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정치가 존재론적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정치적 활동은 존재론적 초과를 파악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그저 평등 전제만을 필요로 할 뿐이다. 정치적 활동은 존재론적인 그 어떤 것의 산물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우리 각각은 서로서로 평등하며, 현재의 질서에서 다른 어떤 이들 못지않게 평등하다고 전제되어야만 하고 이를 입증하기만 하면 된다. 따라서 투사와 나머지라는 정치적 분할을 설정하고 도입하는 바디우의 견해는 랑시에르가 보기엔, 철학의 원죄인 생각하는 자와 생각할 수 없는 자의 구별에 가까워진다. 플라톤의 『국가』부터 철학은 철학에 적합하지 않은 자들을 철학에서 제거하려고 노력해왔다. 그렇게 해서 제거된 사람들이 바로 ‘장인들’이다. 장인들은 천박한 이해관계에 속박되어 있기에 자신의 영혼을 타락시킬 뿐만 아니라 철학 전체, 철학의 모든 것을 타락시킬 위험이 있다. “우리가 여가의 질서와 하인 노동의 질서 사이의 근본적인 단절을 공준화해야만 한 것은 도시국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철학자들을 위해서다. 랑시에르가 『불화』에서 ‘정치철학’을 ‘철학자들의 정치’라며 부르고 이를 배격하는 이유 역시 근본적으로는 이런 ‘나눔’에 대한 이의 제기인 셈이다. 따라서 바디우가 진리에의 충실성이나 투사의 역할을 경시한다면서 랑시에르를 비판할 때, 결국 문제의 관건은 바로 전투성(militancy) 개념만이 아니라 정치에 대한 이해 차이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존재론적 의미에서 투사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고 해서 랑시에르에게 주체화의 형상으로서 투사가 부재하다고 볼 수 없다. 랑시에르가 정치를 “보편성의 사례들의 국지적이고 독특한/특이한 구축”(D, 139)이라고 부르고 “사회운동이란 사회 질서가 그들에게 준 정체성인 사회학적 정체성을 기각함으로써 투사로서의 정체성을 밝히려고 깨우치려고 애쓰는 주체들의 운동이자, 인민의 운동이다”라고 한 점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이런 주체화가 없다면 그건 몫 없는 자들의 평등 전체 자체가 실현될 수 없기 때문에다. 사회운동가들은 아무개의 누구냐의 평등의 진리에 대한 투사이다. 이들은 상황 상태에 대해 그리고 상황 상태에 맞서서 그 진리에 대한 충실성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그들은 상황 내부에서 결정 불가능한 것을 결정하고 사건의 투사가 될 수 있다.
3. 민주주의와 정당, 제도화
그렇다면 랑시에르에게도 조직화란 틀이 들어설 수 있을까? 많은 이들이 이게 없다며 랑시에르에 대해 회의적이다. “랑시에르는 분할과 중단을 강조하는데, 이런 강조는 일체의 지속 가능한 정치적 시퀀스에 근본적인 성질들-몇 가지만 명명한다면, 조직화, 단순화, 동원 결정, 양극화-을 설명하기 어렵게 만든다.” 바디우도 마찬가지다. “정치의 중심적인 주체적 형상들은 정치적 투사, 즉 랑시에르의 체계에서는 전적으로 부재한 형상이다”(M, 122). 그렇다고 랑시에르가 치안에 대한 투쟁, 치안 안에서 하는 투쟁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조직화나 제도화에 대해 말하지 않는 까닭은, 정치와 민주주의란 모든 제도화된 체계와 관련하여 ‘추가로’(en plus) 오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도화나 조직화가 없다고 불평하는 대신 그 부재가 무엇인지, 제도화나 조직화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게 훨씬 생산적이다. 그리고 평등 전제가 제도화되는 것이라면, 그건 결국 랑시에르와 바디우의 차이가 없어진다는 얘기와 똑같아진다는 것도.
그런데 위의 비판 뒤에 바디우가 쓰고 있는 내용이 흥미롭다. “정치는 정당의 형태로 여전히 사유될 수 있는가? 정치적 투사는 불가피하게 정당의 투사인가? (중략) 랑시에르는 의심할 바 없이, 전체적으로 국가 통제하에 있는 정당들이 궁극적으로 엄격하거나 혁신적인 처방을 할 수 없으며, 그저 그 위기를 존속시킬 수 있을 뿐이라는 점에 동의할 것이다. (중략) 강조되어야 할 가치가 있는 물음은 ‘정당 없는’ 정치라는 물음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도 미조직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정치적 과정들의 지적 규율을 통해 조직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국가의 형태와 상관된 형태에 따르는 게 아니다. (중략) 정치는 그 내적인 양심에 있어서 ‘정당 없는’ 정치적 이념이 포함하는 바를 규정할 수 있게 해준다”(M, 122). ‘정당 없는 정치’라는 표현은 중국 문화혁명과 관련된 평가에서도 거듭 표현되었다. 바디우는, “문화혁명은 사실상 모든 세계 혁명들 가운데 레닌주의의 한계를 검증한다. 문화혁명은 해방의 정치가 더 이상 혁명의 패러다임에 종속되거나 당-국가에 갇힐 수 없음을 가르쳐준다. 이와 대칭적으로, 해방의 정치는 의회주의와 선거기구들 안에 등록될 수도 없다”고 주장한다.
이와 관련하여, 민주주의에 대한 이들의 견해 차이는 민주주의를 국가형태로 간주하느냐 아니냐를 둘러싼 문제로, 바디우 본인이 민주주의를 하나의 국가형태로 간주하는 것처럼 보이는 반면에, 랑시에르는 한사코 민주주의가 통치형태도 정부형태도, 정체의 원리도 아니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디우가 국가형태나 통치형태로 간주하는 민주주의란 사실 자본-의회주의가 부여한 뜻에서의 민주주의, 현행 민주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민주주의라는 부유하는 기표는 승리한 서구, 승리자 미국, 자유시장, 왜곡되지 않은 경쟁의 동의어가 됐다”고 주장하는 다니엘 벤사이드(Daniel Bensaid)의 진단은 오늘날 민주주의가 “이기주의, 하찮은 향락을 추구하는 욕망”의 주체를 만들어냈을 뿐이라고 보는 바디우의 그것과 겹친다. 물론 여기서 이기주의는 두 가지 유형의 민주주의적 인간인 ‘구두쇠 노인’을 가리키며, 후자는 ‘오락만으로 살아가는 즉각성, 유행, 제자리 운동’만 할 뿐인 청춘들을 가리킨다. 이렇게 바디우에게 “현대 세계의 상징은 민주주의며, 청춘은 이 상징의 상징이다.” 그러므로 “만일 민주주의가 죽음충동을 조직하는 화폐의 추상이라면, 그것의 반대는 결코 전제주의나 ‘전체주의’일 수 없다. 그것의 반대는 집단적 실존을 이런 조직화의 지배에서 빼내는 것이다. (중략) 자본-의회주의가 그것을 부여한 뜻에서 고려된 민주주의의 반대는 전체주의도 독재도 아니다. 그 반대는 공산주의다. 따라서 바디우가 지향하는 민주주의의 진짜 이름은 공산주의다.
독일의 법학자이자 정치학자인 칼 슈미트(Carl Schmitt)는 민주주의가 인민(데모스)의 동질성에 기초한다고 했다. 이것은 그러나 과두정이나 귀족정을 특징짓는 아르케가 아니다. 따라서 민주주의란 정체(政體)를 갖지 않는다는 주장과 연결된다. 결국 민주주의란 어떤 정체인 게 아니라 그저 매순간 새로운 상태에 처하는 것이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정부형태도 사회형태도 아니고 “인민의 권력, 권력을 행사할 어떤 특수한 자격도 갖지 않은 자들의 권력을 뜻하며”, 따라서 “정치를 사유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의 토대 자체”이다. 이런 맥락에서 민주주의는 결코 고착화될 수 없다. 설령 민주주의가 인민의 동질화에 기초한다고 해도 이것이 깨지는 순간, 즉 기존의 민주주의가 전혀 예견할 수 없었던 타자가 도래하는 순간, 그 민주주의는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의 출현과 더불어 예외상태를 자신의 본질로서 드러내거나(그리하여 포함적 배제와 배제적 포함을 작동시키거나), 아니면 스스로 종언을 고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과정은 끝이 없다. 이렇게 보면 민주주의는 종언을 통해 매번 새롭게 자신을 정의할 수밖에 없다. 이게 민주주의의 일반적 성격이다. 이것이 데리다가 말하는 ‘도래할 민주주의’이고, 랑시에르나 벤사이드가 말하는 ‘영원한 스캔들로서의 민주주의’이다. 이 때문에, 비록 우리에게 민주주의란 대의제와 같은 과두제로 이해되곤 하지만, 민주주의가 정치를 단순한 치안으로 변형시키지 않을 수 있다는 힘을 갖는 것이다.
4. 노동자의 형상과 정치
“쌍용차 투쟁 11년.. 해고노동자 30명의 죽음”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이 농성을 벌이고 있다./출처=위키백과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이 농성을 벌이고 있다./출처=위키백과
오늘날 노동자의 형상은 정치 무대에서 사라졌다. 좌파와 우파 모두가 여기에 가담했다. ‘진보’라는 이름의 좌파는 이를 정체성/동일성 담론이나 평등과 정의 담론(기회, 조건, 결과의 평등)으로 대체했으며, 우파는 이른바 ‘인적 자본’ 담론을 통해 이제 노동자는 없고 모두가 기업가라고 선언했다. 노동자가 정치에서 사라진다는 것은 경제가 셈의 중심이 되고 사회의 재현이 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이제 “셈해지는 것은 주식시장, 유로, 금융투자, 경쟁 등등의 수준이다. 다른 한편 노동자의 형상은 무엇으로도 셈해지지 않는다.” 바디우에 따르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는 ‘특이성’이다. 상황 상태인 국가나 회사나 심지어 노동조합에 의해서도 고용이나 실업과 관련된 통계적 단위로서 현시될 뿐 재현되지는 못한다. 이렇듯 노동자가 특이성에 해당된다면, 해고 노동자들은 어떤 항을 갖게 될까? 더욱이 자살했다면? 현시조차 되지 못하는 공집합, 공백. 재현을 거부당하고 부정당하는 존재. 공백으로서의 존재, 이것이 자살로 내몰린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의 이름이다. 쌍용차 투쟁 과정에서 2000여 명이 해고되고 30명의 노동자와 가족이 목숨을 끊었다. 11년이 지난 2020년 5월이 되어서야 복직 대기자들을 공장으로 복직 시킨 뒤 노조는 평택공장 2층에 10평 남짓 공간을 확보하게 됐다. 그 자리를 가려버리는 것, 그 자리가 비현시의 지대로 지속되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정치의 배제, 정치적 사건 체제의 배제이다. 그러므로 이제 사건에 충실한 주체가 되어보자. 이 상태대로는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배제의 역사적 연쇄가 우리에게도 닥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처음에는 노동자들, 다음엔 이민자들, 마지막으로는 불법외국인들.” 여기 이민자들엔 프랑스 파업 노동자들이 포함되어 있다. 해고 노동자들은 이 자본주의 한국 사회에 내재적 공백으로, 사회에 귀속되지도 포함되지 않았다. 다시 묻자. 사건에 충실한 주제 혹은 정치적 사건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무엇을 할 것인가?
김상운
1969년생. 현대정치철학연구회. 난장출판사 기획위원. 역서 「세속화 예찬」, 「다중」, 공역서 「목적 없는 수단」, 「민주주의는 죽었는가」, 「들뢰즈 사상의 진화」 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