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의 오리지널이 아닌 이들에게 품는 희망
‘비서구 민주주의’라고 하면 왠지 좀 어설프다는 느낌이 먼저 든다. ‘오리지널’이 아니지 않느냐는 것이다. 원래 민주주의 하면 서구에서 온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비서구 민주주의’ 하면 ‘글쎄?’ 하는 물음표부터 따라붙는다. 과거 ‘아랍의 봄’ 소식을 처음 접할 때에도 ‘그래?’ 하고 귀를 쫑긋 세워보았지만, 동시에 비슷한 생각에 발목이 잡혔다. 당시 대부분의 언론 보도는 ‘이제야 비로소’ 아랍에 ‘서구형 민주주의’가 싹트고 있는 것인가를 진단하는 식이었다. 그렇다 보니 대중은 ‘그게 뭐 결국 잘되겠나?’ 하는 식의 소극적 비관에 먼저 사로잡힌다.
학계도 예외는 아니다. 국내외의 여러 정치학·사회학 학술지를 보면 비서구 민주주의에 대한 대다수의 연구들이 프리덤하우스 재단의 ‘민주주의 등급’이나 이코노미스트 재단의 ‘민주주의 인덱스’에서 매겨놓은 등급과 석차를 기준으로 민주주의의 수준을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기존의 ‘인덱스’니 ‘등급 기준’이니 하는 것들은 사실은 동어반복적이다. 앞선다고 간주되는 서구 국가들의 잣대를 기준으로 만들어 놓고, 그 기준을 세계에 적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맨날 뻔한 ‘석차’만 나온다. 그 결과에 대한 분석 역시 현재의 세계 체제가 부여하는 규범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과연 그럴까? 민주주의란 과연 ‘서구’의 특산물이며, 비서구는 그 특산물을 잘해봐야 수입해서 비슷하게 가공해서 써먹을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일까? 이는 너무도 굳어진 생각이다. 그러나 굳어진 생각을 뒤집어보는 건 언제나 매력적이다. 개울가에 앉아서도 돌을 뒤집어봐야 미꾸라지도 보고, 가재도 잡는다. 이제 너무나 굳어진 민주주의 이야기를 뒤집어보기 위해, 이번에는 돌이 아니라 시계를 잠시 17세기 유럽으로 뒤집어보기로 한다. 17세기라면 유럽에서 최초로 민주주의 정치체제가 공개적으로 옹호되기 시작한 때다. 그 장본인은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스피노자(Baruch de Spinoza)다. 바로 그 스피노자의 이야기, 스피노자 시대의 유럽 이야기다.
1. 스피노자와 조선
17세기, 당시 유럽에 민주주의는 없었다. 최근 미국의 스타 영문학자인 스티븐 그린블라트(Stephen Greenblatt)가 써서 큰 히트를 친 『요동(Swerve)』이라는 책을 읽어보면 이 당시까지 유럽이 얼마나 혹독한 사상 탄압과 종교 폭정의 시대를 지나왔는지 잘 알 수 있다. 참 재미있게 잘 쓴 책이다. 인간은 지상의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는 너무나 당연한 사상(에피큐리즘)이 유럽에 뿌리내리기까지 수많은 선구자와 이름 없는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모진 고난을 겪어야 했다. 인간과 세계의 자연성에 관한 사상은 극도로 불온한 악마적 쾌락주의로 매도당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유럽 철학사상 처음으로 민주주의를 공개적으로, 명시적으로 옹호한 사람이 네덜란드의 철학자 스피노자였다. 인간과 세계의 자연성을 철저히 논증한 『에티카』, 그리고 민주주의를 옹호한 그의 정치학 저술은 무소불위의 힘을 행사하던 교회 권력의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교회 권력이 스피노자에게 붙인 딱지는 ‘무신론자’였다. 당시 유럽에서 무신론자란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빨갱이’라는 딱지보다 훨씬 심한 낙인이었다. ‘무신론자는 악마의 친구다!’ 당시 유럽의 권력자들에게 민주주의란 ‘천하의 말종’인 무신론자들이나 감히 지지할 수 있는 패악(悖惡)의 정치제도였다. 그 이전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도 민주주의를 비판했다. 그리스 민주주의의 경험은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되었다. 아테네는 민주주의 때문에 망했다고 헤로도토스(Herodotos), 투키디데스(Thukydides)가 썼다. 기독교가 유럽을 석권한 이후 긴 중세를 거쳐 스피노자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감히 민주주의를 분명하게 옹호한 유럽인은 아무도 없었다.
바로 그 스피노자와 같은 도시, 같은 동네에서 살면서 친하게 지냈던 아이작 보시우스(Issac Vossius)라는 사람이 있었다. 스피노자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보시우스와의 대화 내용을 전한 편지가 남아있다(1667년). 이를 보면 둘의 관계가 이미 아주 친밀했고, 스피노자가 의견을 구하고 보시우스가 답하는 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 "뭘 그런 시시한 것을 물어보나, 자네처럼 똑똑한 젊은 친구가 말이야!" 하는 농담조다. 보시우스는 스피노자보다 14살 연상이었지만 친구와 같은 사이였다. 사상이 같으므로 친구가 될 수 있었다. 보시우스는 어릴 적부터 유럽 밖의 세계에 관심이 많았다. 희랍어와 아랍어에도 능했다. 희랍과 아랍세계에 정통했고 이 세계를 동경했다. 그는 당시 유럽을 교적 맹신과 폭정으로 큰 고통을 받는 후진사회라고 생각했다. 그러한 보시우스가 일찍부터 가장 동경했던 곳은 놀랍게도 중국과 조선(Corea)이었다.
보시우스는 중국과 조선은 철학자들이 다스리는 나라라고 했다. 당시 유럽에서 철학, 철학자라는 말은 신학, 신학자와 대비되는 말이었다. 신학적 믿음이 아니라 이성으로 세계를 탐구하겠다는 것은 당시 유럽에서는 심각하게 도전적인 태도였다. 그는 중국과 조선의 고위 관료들은 철학자들로 이루어져 있고, 또 이들 통치 철학자들이 자신의 의무에 충실하지 못하면 인민들이 이들을 판정할 자유(freedom to judge)를 갖는다고 했다. 이어 이곳에는 유럽과 같은 세습귀족이 없고, 오직 배운자들(lettered)만이 귀하게 대접받는다고 썼다. 또한 이 나라의 왕이 잘못을 범하면 이 철학자들은 대놓고 비판하는데, (유럽은 물론이려니와) 심지어 구약 성경의 위대한 예언자들조차 감히 하지 못했던 수준이라고 하였다. 그가 평생의 연구를 모아 생의 말년인 1685년에 출간한 『Variarum Observationum Liber』라는 책에서 펼친 내용이다.
한마디로 중국과 조선이 유럽보다 한참 정치 선진국이요 철학 선진국이라는 말이다. 당시 네덜란드는 아시아에서 가장 활발한 해상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극동에 대한 상당한 정보가 네덜란드로 유입되고 있었다. 이렇듯 보시우스는 먼 극동의 타자(他者) 속에서 유럽을 비판하고 개혁할 방향을 찾았다. 보시우스의 중국과 조선에 대한 해석이 어느 정도 이상화되어 있음은 사실이다. 특히 인민이 통치 철학자들을 판정할 자유를 갖는다는 대목은, 우리가 알듯 사실과 다르다. 아마도 ‘이곳에서는 민심(民心)을 천심(天心)으로 안다’는 말이 확대 해석되어 전해진 것이리라. 그러나 다른 언급들은 실제 사실에 가깝다.
어쨌거나 보시우스는 중국, 조선에서 바람직한 정치체제, 즉 플라톤의 철인국가와 인민주권의 민주주의를 혼합한 체제를 읽고 있었다. 그 자신의 소망이기도 하였으리라. 보시우스는 중국과 조선을 유럽 비판의 무기로 삼고 있었다. 종교가 아닌 이성이 다스릴 때, 진정한 문명 국가, 민주주의가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보시우스의 이러한 생각이 스피노자에게 영향을 줄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보시우스가 스피노자와 교유한 시기는 그의 40~50대로 그의 사상이 절정에 올라 있을 때였다. 급진적 철학 모임에서 자주 만나 호감과 기대를 가지고 있던 명석한 젊은이에게, 자신이 특별히 매료되어 있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참을 수 없는 욕망을 억제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도대체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성격의 이야기다. 스피노자로서는 그런 기막힌 이야기를 결코 흘려들을 수도, 잊어버릴 수도 없었을 것이다. 결국 중국과 조선의 유교 정치체제가 보시우스를 통해 스피노자의 민주주의론에, 그의 철학에 임팩트를 주었으리라 추정할 충분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유럽 사상사에서 스피노자는 아주 특별한 위치에 있다. 2001년에서 2011년까지 10년간 3권의 연작(각권 모두 1,000쪽에 육박한다)으로 발간되어 선풍을 일으키고 있는 프린스턴 고등연구원 조너선 이스라엘(Jonathan Israel) 교수의 『급진 계몽주의(Radical Enlightenment)』 시리즈는 바로 이점에 주목하고 있는 명저다. 그의 논지는 계몽주의라고 모두 똑같은 계몽주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17~18세기의 유럽 계몽주의를 주류(mainstream)와 급진으로 나누어 보면서, 주류 계몽주의는 구체제에 타협적이었고 민주주의, 반교권주의, 자유, 인권, 인종평등, 국제평등 문제에서 항상 보수적인, 즉 반대하는 태도를 취했다고 한다. 오직 급진 계몽주의만이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완전히 일관되고 진보적인 입장을 취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주류 계몽주의와 급진 계몽주의 사이에는 시종 날카로운 대립과 긴장이 있었다고 하였다. 조너선은 이들 급진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한결같이 마음속으로 그들의 중심으로 인정하고 있었던 철학자가 바로 스피노자였음을 놀랍도록 치밀한 고증을 통해 철저히 밝혀냈다. 1670년 스피노자가 『신학-정치 논고』를 출간한 이후 19세기 초엽까지 스피노자라는 이름은 유럽 사상계의 거대한 지진이요, 징후(徵候)였다. 그는 급진 계몽주의의 알파요 오메가였다. 근대 유럽의 태동에 그렇듯 엄청난 충격을 가했던 스피노자의 급진철학과 민주주의론의 탄생 배경에 ‘비서구’인 중국과 조선이 있다는 사실!
이제 다시 시계를 현재의 시간에 맞추어보자. 과연 여전히 민주주의는 오직 서구에서 빌려온 것이라고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서구가 충격을 주기 전까지는 중국과 조선, 동아시아, 더 넓게는 비서구 전반과 전혀 무관했던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을까?
2. ‘비서구 민주주의’라는 토픽의 적극성
‘급진 계몽주의’의 역사를 상세히 알수록 유럽의 민주화에 비서구가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깨닫게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오늘날 유통되는 ‘비서구’라는 말이 하루아침에 긍정적인 뜻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자는 것이 이 글의 목적도 아니다. ‘비서구’라는 말은 원래가 ‘서구(the West)’를 높이고, ‘서구가 아닌 나머지(the Rest)’에 낙인을 찍기 위해 만들어진 말이다. 그렇다 보니 이 땅의 많은 젊은이들이 ‘비서구’를 벗어나 ‘서구’가 되는 것을 인생 목표로 삼겠다고 너도나도 나서고 있는 지경이다. 꼬여도 단단히 꼬여 있다. 한국이 OECD와 G20의 일원이 된 이상, 우리는 더 이상 비서구가 아니고 서구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웃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일본이 오랫동안 그렇게 행세했다. 우리 모두에게 그런 욕망이 있다.
필자는 우리 무의식 깊숙이 똬리를 틀고 있는 ‘서구(the West)-비서구(the non-West)’라는 이항 대립에 큰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어릴 적부터 교육을 통해, 가랑비에 속옷까지 흠뻑 젖듯, 우리의 무의식을 온통 점령하고 있는 문제의 개념틀이다. 의식적으로 반대해도 거의 무의식적으로 반복한다. 이를 다시 반복하고 확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우고 넘어서기 위해서 이 언어의 집 안으로 들어간다. 물론 ‘서구-비서구’의 구획은 우리의 머릿속만이 아니라 세계 현실에 엄연히 강한 뿌리를 내리고 있다. 따라서 ‘서구-비서구’라는 대립 분할을 지우고 넘어서자는 것은 사유방식의 혁신에 대한 요청일 뿐 아니라 세계 현실을 바꾸자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여기에 ‘비서구 민주주의’라는 토픽의 적극성이 숨어 있다.
그렇지만 지우고 넘기 위해 그 언어의 집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실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언어란 사용을 통해 성장과 확장하기 마련이다. 서구-비서구라는 분할적 개념틀을 손가락이 아플 정도로 열심히 자판을 쳐가며 비판했다 하여 이 개념틀이 사라질까? 오히려 재생산되고 확장되었을 뿐이라고 비판하는 이가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애초에 개념틀, 대립 구도 자체가 서구에서 생산되고 유입된 것인 이상, 그 게임판 위에서 반대한다고 열심히 뛰어봐야 결국 그 게임의 흥행만 더 도와준 꼴이 아니냐는 것이다.
더 날카로운 비판도 있다. 서구-비서구 대립을 비판하다 보면, 결국 서구 비판-비서구 옹호로 가게 마련인데, 그렇다 보면 비서구 내부의 문제에 대한 비판의 각이 무뎌질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이런 각도에서 아예 적극적으로, 현재의 문제는 서구-비서구 대립 자체라기보다는 오히려 비서구 내부의 문제이므로, 차라리 서구의 입장에 제대로 서서, 그 기준을 비판의 잣대로 삼아 비서구의 문제를 비판해 들어가는 것이 순서에 맞지 않느냐는 대담한(?) 입장도 존재한다.
그러나 이 지점이 바로 ‘근대화론’의 함정에 빠지는 요목이다. 이 함정은 한번 빠지면 여간 빠져나오기 힘들다. 근대화론은 비서구를 영원히 미성숙한 모방자로 만든다. 근대란 오직 서구에서만 탄생했고, 이것이 비서구로 확장했으며, 비서구는 서구가 걸어온 길을 시차를 두고 동일하게 밟아간다고 주장한다. 일단 이 구도 안에 들어가면 죽자사자 그 시차를 줄이는 데 전력을 다할 수밖에 없다. 오직 하루빨리 서구 닮기, 서구 되기다. 그러다 보면 자기성찰, 자기비판, 자기교정의 계기는 어느덧 실종된다. 비판의 잣대는 사라지고 맹목적으로 쫓아가기 바쁘다. 달려봐야, 아니 달릴수록 더욱 비슷한 모방자로 될 뿐, 되돌아볼 자신의 본모습은 점점 희미해진다. 근대화가 단순히 기술 문제가 아니라 문화와 정체성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문화와 정체성 문제에서 따라잡기란 없다. 따라잡으려 할수록, 비슷해지려고 할수록 오리지널과의 괴리감이 더욱 크게 느껴진다. 일찍이 일본의 선각적 작가 나츠메 소세키(夏目漱石)가 달릴수록 공허해지는 ‘근대화의 신경증’이라고 불렀던 것이 바로 이런 증상이었다.
‘비서구 민주주의’라는 토픽은 서구-비서구라는 분할 구도를 비판하면서, 동시에 비서구 내면의 문제를 외면하거나 변호하지 않고 비판적으로 파볼 수 있게 한다. 그래서 그 언어의 집 안으로 들어가면서도, 단지 그 언어 게임의 흥행이나 거들어주는 노릇을 면할 수 있다. 서구 닮기, 따라잡기의 중독증에 빠지지 않고도, 비서구 내부 개조의 동력을 충분히 탐색할 수 있다. 여기에 ‘비서구 민주주의’라는 주제 영역의 적극성, 즉 서구-비서구라는 분할적 대립틀을 지우고 넘어설 수 있게 하는 내적 잠재력이 있다.
민주주의란 서구의 것도 비서구의 것도 아니다. 서구에서만 시작된 것도, 그렇다고 반대로 원래 비서구에서 시작된 것도 아니다. 인류 공통의 기원을 가지고 있고, 그 기원이 여러 문명들에서 나름의 특징을 가지고 성장해왔다. 물론 오늘날 그중 상대적으로 가장 잘 제도화되고 안정된 민주주의는 서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점을 부인할 필요는 없다. 다만 그 배경에 최근 세계사 200여 년에 걸쳐 형성된 서구 패권의 역사가 끼어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면 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구미형의 민주주의가 비서구 국가들로 이식되고 확산된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미 완성된 민주주의 유일한 정답이 오늘날 서구 국가들에 있으며, 비서구 국가들은 이제 그 정답을 베끼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 보아서는 오늘날 비서구 민주주의의 진정한 잠재력을 전혀 인식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서구 민주주의의 내적 특징도 제대로 알 수 없다.
서구 민주주의도 구체적 역사 과정의 산물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특이한 세계 상황은 미국이 주도하는 근대화 이론의 배경이 되었다. 그러한 세계 상황 역시 하나의 역사적인 국면이었을 뿐이다. 보시우스의 극동론이 말해주는 것은 서구 근대, 서구 민주주의가 오늘날처럼 성장하는 데 비서구가 큰 모멘텀(momentum)을 주었다는 것이다. 세계사는 이렇듯 큰 차원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비서구 민주주의 문제에 다가서는 첫걸음은 구체적인 현재 모습에서 시작하되, 그 문명적 배경과 역사의 독특성을 포착하여 그 이해를 심화시켜가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할 때 현재 모습의 잠재성과 의미를 보다 충분히 파악할 수 있게 된다. 또한 그래야 미래의 전망도 비로소 제대로 된 가닥이 잡힌다.
오늘날 민주주의의 새로운 동력은 서구가 아니라 오히려 비서구의 여러 지점들에서 분출되고 있다. 이 글은 그러한 비서구 민주주의의 잠재력을 가늠해보기 위한 일종의 서설(序說)이다. 비서구의 범위가 광대하기 때문에 제한된 지면에서 그 전부를 살펴보기란 불가능하다. 우선 우리와 가까운 인도, 그리고 우리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한 유교권으로 제한한다.
3. 인도의 민주주의
오늘날의 인도 민주주의는 외부인들에게는 불가사의다. 어떻게 평등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카스트(caste)의 나라에 민주주의가 가능하다는 말인가? 비록 인도 헌법 전문에 일체의 신분차별을 금한다고 되어 있지만, 이 카스트(바르나-자티) 의식은 여전히 인도인의 인습세계에 깊이 각인되어 있지 않은가? 지극히 ‘전근대적’인 신분차별의 나라에 어떻게 민주주의가 가능하다는 말인가? 그러나 역설적으로 오늘날 인도가 민주주의에 매우 독특하고 풍부하며 창조적인 기여를 하고 있다는 것 역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이다. 1993년 시작된 혁신적 자치혁명인 ‘판차얏 개혁’, 서구보다 훨씬 과감한 소수자 수혜제도(인도에서는 맨덜리즘이라고 한다), 민중 친화적인 각종 사법개혁, 그리고 세계의 주목을 받은 케랄라(Kerala) 주의 시민예산 혁명 등이 그 일부다. 이제 ‘세계 최대의 민주주의 국가는?’이라는 질문과 ‘인도!’라는 ‘정답’이 세계 모든 초·중등학교 교사들과 학도들 간의 또 하나의 교리문답이 되었을 정도다. 아마 인도에 대한 관심이 그다지 크지 않은 한국이 많지 않은 예외에 속할 것이다. 어쨌거나 인도 민주주의라는 말이 품고 있는 이 불가사의한 양립을 어떻게 풀이해야 할까?
민주주의가 직선이 아니라 곡선임을 이해하면, 진실에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설 수 있을 듯하다. 세상사, 만물이 그렇다. 가장 직선이라 할 빛조차 휘어 곡선이 된다. 공간과 물질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중력의 힘을 받아 운동이 휜다. 우주에 절대 무중력의 공간은 없으므로 모든 빛은 곡선이다. 빛이 곡선이라면 다른 모든 존재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도대체 민주주의와 직선-곡선이 무슨 상관이라는 말인가? 고대 그리스를 기원으로 하여, 유럽 르네상스와 시민혁명을 거쳐, 현대 유럽과 미국을 정점으로 하는 경로를 ‘민주주의의 직선의 역사’라고 보는 사고방식이 있다. 그 ‘직선’은 오직 하나요, 밖의 다른 모든 경로는 구부러진, 따라서 열등한 민주주의라 한다. 이런 생각은 큰 허구다. 모든 빛처럼, 모든 민주주의는 구불구불하다. 그 곡선은 우주의 민얼굴, 지극한 정상이다. 오히려 곡선이 아닌 절대 직선의 민주주의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이 바로 서구 민주주의라는 이 생각이야말로 지극히 비정상이요, 문제다.
민주주의를 토론과 합의에 따른 통치 또는 사회 운영이라고 한다면, 그 기원은 우리가 흔히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BC 500~600년경의 그리스보다 훨씬 이전으로 올라간다. 그리스 민주주의보다 최소한 2,000년 전 시리아-메소포타미아 고대국가에 다중(多衆)의 의회(assembly)가 있었다. 이러한 고대 의회의 원형은 인류사 훨씬 깊숙이 올라갈 수 있다. 구석기 시대 수렵·채집 시대의 인류의 생활 형태가 그것이다. 당시의 집단 단위는 대략 150명을 한계로 했다. 여러 연구가 입증하듯 이 단계의 인류 집단에는 ‘왕’도 ‘두목’도 존재하지 않았다. 남녀, 노·장·청의 역할 구분은 있었으나 신분적·계급적 차별의 형태는 아니었다. 자연스러운 합의가 집단 운영 원리였다. 그것이 가장 자연에 가까운 형태인지는 의문이다. 인류와 가장 가까운 침팬지 집단에는 모든 것을 독점하는 ‘두목’, ‘왕초’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렵·채집하던 인류 집단은 한 강자(주로 젊은 숫컷)의 독점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렇게 보면 평등 자체가 고도의 권력 형태다. 무소불위의 ‘왕초’ 내지 폭군의 출현을 방지하는 고도의 상호 견제망인 것이다.
그러나 이후 신석기와 청동기 단계에 접어들면 인류사는 압도적으로 ‘왕의 역사’가 된다. BC 5~6세기 전후 그리스에 민주주의가 가능했던 것은, 그리스가 당시 중근동과 지중해 문명의 중심이었던 페르시아, 이집트 제국의 먼 변방인 후진국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문명적 의미의 유럽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민주주의 고대 그리스는 동방 제국 영향권 아래의 일개 변방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바로 그러했기 때문에, 그리스에 고대국가 이전 역사 단계의 사회운영 방식, 즉 보다 평등주의적인 사회원리가 ‘부활’할 수 있었다. 그 핵심은 그리스 민주주의가 한 사람의 절대 강자, 그들이 폭군이라 불렀던 ‘왕’을 허용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민주주의를 하면서도 그럴 조짐을 보이는 이가 나타나면 투표를 통해 추방해버렸다. 소위 도편추방(ostracism)이다. 그리스 민주주의는 대략 250년 지속되었다(BC 508~260). 그 후는 이곳도 제국에 복속되었다. ‘왕의 시대’가 된 것이다.
인도 문명의 독특성은 ‘베다’ 문화라고 하는 고도의 문명 단계에 접어들어서도 왕의 존재를 주변화했다는 데 있다. 모든 고대 문명에서 일단 왕이 출현하면 그 존재는 신성화된다. 인도는 매우 일찍부터 이 경향을 견제하는 흐름이 존재했다. 이미 BC 2000~3000년의 기록으로 간주되는 리그베다에서 왕은 브라만보다 낮은 존재였다. 고대 인도의 조숙한 마키아벨리라고 하는 카우틸리아의 저작 『아르타샤스트라』에서도 브라만의 정신적 우위는 확고하다. 왕의 영역은 인정한다. 그러나 부와 권세의 그 영역은 우주적 질서의 주변으로 치부된다. 우주의 축은 브라만이 집전하는 의례를 중심으로 돈다. 그 결과 인도에는 좀처럼 광대하고 강력한 제국이 출현하지 않았다. 아쇼카 왕의 (불교) 제국조차 그 체제는 매우 분권적이며, 느슨한 연결망이었다. 인도의 역사는 그래서 그 대부분이 수많은 군소 군주국의 역사다. 그 작은 군주국들에서도 자치의 중심은 왕궁이 아니라 브라만을 중심으로 한 민간의 생활 영역에 있었다.
붓다가 출현했던 시대의 인도 북동부 일대는 10여 개의 도시 공화국이 존재했다는 연구들이 있다. 사바(Sabha)나 사미티(Samiti)라고 하는 합의체가 다스리는 도시국가들이었다고 한다. 이 중에는 군주가 존재하는 곳도 있고 이를 라자나(Rajanah)라고 하는데, 그 군주를 ‘Vis’라고 하는 합의 기구에서 선출했다는 점에서 여타 군주국과 달랐다고 한다. 이들이 오늘날과 같은 공화국은 물론 아니었겠지만, 군주국과는 분명히 구분되는 보다 합의체적인 정치 단위들이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이론(異論)이 없다. 불교가 힌두교보다 더욱 평등주의적인 것은 이러한 배경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합의체 단위는 미래가 미리 출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구석기시대로부터의 먼 과거가 부활한 것이다. 인도 문명의 특이한 상황, 즉 왕권이 강력하게 성장하지 못하는 환경이 이러한 부활에 상당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힌두 문명은 왕권을 특이하게 제약한다. 브라만은 왕권에 개입하지 않는다. 대신 분명한 선을 긋는다. 왕권의 바깥, 민간 생활세계, 문화 세계, 정신세계는 왕이 다스리는 영역이 아니다. 유럽의 근대 민주주의는 강한 왕권을 밖에서 무너뜨리면서 탄생했다. 반면 힌두 문명의 민주주의는 왕권을 주변화·약체화시키면서 그 싹을 보존해왔다. 힌두 문명의 ‘자치 전통’은 바로 여기서 왔다. 그 바탕에 도저(到底)한 철학적 깊이가 있다. 문제는 그 왕권 밖의 영역을 지배하는 신분 원리다. 한편으로 각 바르나(Varna), 자티(Jati)의 자치를 허용하면서, 동시에 치밀한 신분적 서열 질서를 짠다. 이 역설이 한편으로 오늘날 인도 민주주의를 특징 지우는 놀라운 생명력과 창조성,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카스트 민주주의’라는 형용모순을 설명한다. 과연 인도 민주주의의 생명력과 창조성은, ‘카스트 민주주의’라고 하는 모순적 개념에서, 앞에 붙은 괴상한 수식어, ‘카스트’를 지워갈 수 있을까?
그러리라고 본다. 조심스럽지만 낙관적이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힌두 환생 개념이 워낙 뿌리 깊게 인도인의 심성 속에 있고, 이 관념이 바르나-자티 신분제와 너무나 강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상(無常). 그 어떤 지엄한 교리도 변화하기 마련이다. 먼저 이 둘을 연결하는 연결 고리가 약해지면서, 신분제의 규정력이 내부로부터 약화될 것이다. 바르나-자티가 과연 힌두 이념의 핵심이냐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그렇지만 현실의 민주주의가 강해질수록 이를 부정하는 입장도 강해질 수밖에 없다. 이 과정, 즉 신분제를 지우는 과정은 신분을 통한 단결과 투쟁이라는 길을 통한다. 신분으로 신분제를 지워가는 것이다. 달리트(Dalit) 등 최하층 신분의 각성과 결집, 연대가 그래서 중요하다. 힌두 신분제를 극복해가는 이념과 철학의 전장(戰場)은 볼 만한 장관을 이룰 것이다. 인도 철학과 철학사가 다시 해석될 것이다. 이는 민주주의의 이념이 크게 확장될 것이다. 철저히 소외된 하층 신분이 공론의 중앙으로 돌파해 들어가는 새로운 진로들은 민주주의의 또 다른 발명품들이 될 것이다. 난관은 많다. 겉보기에 요란하고 무질서해 보일 수도 있다. 힌두교 내부 문제에 종교분쟁, 민족분쟁이 더해진다. 그러나 이 문제를 이겨낼 힘이 있다. 오랜 시간 잠류하고 억눌리다 이제 막 물꼬가 터진 인도 민주주의의 싱싱한 건강성과 생명력이 그것이다.
인도 독립이 선언된 1947년 8월 15일, 인도의 현자 스리 오로빈도(Sri Aurobindo)가 발표한 「다섯 개의 꿈」은 인도의 큰 꿈을 여전히 수레에 싣고 있다.
1. 힌두와 이슬람으로 나뉜 인도가 다시 하나가 될 때까지 혁명적 운동이 계속되는 꿈
2. 아시아가 회생하여 인류문명의 발전에 거대한 기여를 하게 되는 꿈
3. 만국을 정의롭게 협동하게 하는 세계연합이 발전하는 꿈
4. 인도의 영적 풍요가 세계의 구원에 기여 하는 꿈
5. 인류의 의식이 더 넓고 큰 차원으로 진화해나가는 꿈
4. 동아시아 민주주의
스피노자의 'Tractatus theologico-politicus(신학-정치 논고)'<br>/출처=BRILL
스피노자의 'Tractatus theologico-politicus(신학-정치 논고)'/출처=BRILL
그렇다면 보시우스가 동경했던 동아시아 유교 문명의 경우는 어떠한가? 그의 유교에 대한 지식은 결코 녹록한 것이 아니었다. 중국의 고전에 대한 지식을 통해 중국 문명의 기원이 성경이 말하는 문명 역사에 앞선다고 했던 그의 주장은 당시 유럽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성경의 일자일구(一字一句)가 절대적 진리여야만 했던 시대에 이런 해석은 가히 파천황적이었다. 스피노자가 『신학-정치 논고』에서 전개한 급진적 성경 해석은 보시우스의 이러한 주장과 이 주장으로 야기된 격렬한 논란에 큰 영향을 받았다.
보시우스가 중국과 함께 조선에 주목했다는 것은 여러 의미에서 흥미롭다. 오늘날 세계의 많은 이들이 민주주의가 가장 역동적인 나라의 하나로 한국을 지목하고 있다. 문제점을 많이 보기 마련인 우리 내부에서야, 갈 길이 한참 먼 상태라고 비판 내지 비관까지 하고 있지만 말이다. 성장에 따라 비판의 예각이 더욱 날카로워지는 것 역시 민주주의가 성장한다는 징표다. 이를 단순히 그만큼 서구화되었기 때문이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 한국인의 평등의식은 어떤 의미에서는 구미보다 강하다. 유럽엔 왕도 귀족도 상징적이나마 남아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이러한 제도가 상징적인 차원에서라도 앞으로도 영영 인정되기 어려울 것이다. 또 한국이 196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 벌였던 반독재운동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질기고, 깊고, 강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도대체 유교 문명과 무슨 관련이 있다는 것인가? 군주제로 수천 년을 지속한 유교 문명이란 애당초 민주주의와 정반대가 아닌가? 인도의 자치 전통이라는 것도 유교권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것 아닌가? 왕의 권한이 인도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강하지 않은가? 보시우스는 착각을 해도 너무 심한 착각을 한 것이 아닌가? 해방 이후 미국이 가져다준 민주주의와 학교에서 배운 민주주의 교육 탓이 아닌가? 인정할 것은 솔직이 인정해야 하지 않겠는가?
인정할 것은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맞다. 그러나 아닌 것은 아니라고 또한 분명히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보시우스가 바로 본 점이 많다. 우리가 어느 외국의 첫 경험에서 그 나라의 고유한 특징을 통찰할 수 있게 되는 것과 비슷했다. 앞서 말했듯, 인류가 문명 단계에 접어들면 왕의 위치, 왕과의 관계가 정치제도, 정치의식의 특징을 규정하는 관건이 된다. 유교 문명도 마찬가지였다. 유교가 왕권을 제약한 방식은 힌두교와는 또 다른 방식이었다. 힌두교는 정치는 젖혀 둔다. 구원, 구도의 길은 따로 있다. 그러나 유교세계는 구원, 구도의 길이 왕권을 바로잡는 데 있었다. 어디 따로 갈 곳이 마땅히 없었다. 공자가 ‘비 맞은 개 꼴’이라는 말을 들으면서까지 왕권을 바로 세우기 위해 관직을 구해 노구를 이끌고 14년여의 세월 동안 천하를 주유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유교에서 왕권을 바로 세우는 것은 도덕적 사명이요 신성한 의무였다.
유교 성왕(聖王)론이라는 게 참 묘하다. 왕이 성인(聖人)이라니! 겉으로 보면 그처럼 군주를 절대화하고, 군주에게 아부하는 교의가 따로 없을 듯하다. 그러나 조금만 들여다보면, 사정은 180도 뒤바뀐다. 왕은 성인이 아니라, 왕은 성인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가면, 왕이 성인이 못 되면 더 이상 왕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이처럼 강력하게, 지독하다 할 정도로 군주를 제약하는 이념이 또 있을까? 기독교든, 이슬람이든, 힌두교든 현세를 지배하는 왕권의 세속적 한계를 어느 정도 인정해준다. 유교에는 그런 게 없다. 유교의 경전인 시경(試經), 서경(書經)에 묘사된 성왕은 실제 절대로 완벽한 성인이다. 어떠한 폭력과 강제로부터도 자유로운 절대적인 성자(聖者). 특히 서경에 묘사된 요임금과 순임금의 모습이 그렇다. 유교에서 성왕론, 요순임금은 알파요 오메가다. 유교는 이 요순임금이 단순히 꾸며진 신화가 아니라 실존했던 원형군주라고 시종 강변했다. ‘에이~ 요순임금 이야기는 꾸며낸 이야기예요 그걸 정말 믿으시나요?’라고 당시 누군가가 말했다면, 그 사람은 바로 스피노자 시대의 ‘무신론자’가 된다. 믿음의 역린(逆鱗)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제명에 살기 어렵게 된다.
군주는 절대적으로 성인이어야 한다. 이런 신념을 통해 유교는 군주 주권을 내파(內破)하고 있었다. 중세 유럽에 ‘왕의 두 신체(King’s two bodies)’라는 교리가 존재했다. 하나는 순수한 공적(公的) 신체고, 다른 하나는 인간으로서의 사적(私的) 신체다. 유럽 근대주권론의 형성사란 이 두 신체에서 사적 신체를 지우고 공적 신체만 남게 한 역사다. 그 결과 사적 신체를 가진 왕의 목을 쳤다. 17세기 영국혁명, 18세기 프랑스혁명이 그것이었다. 그래서 남은 것이 공적 신체를 의미하는 주권(sovereignty) 개념이다. 그것이 바로 국가이성이 되고, 인민주권이 된다. 신체를 지닌 왕은 사라지고 추상적이고 포괄적인 주권 개념만 남는다. 지금은 주권이라는 말에 신체를 지닌 군주(the sovereign)의 흔적만 남았다.
유교권도 마찬가지다. 주권(主權)에서 주(主)는 군주(君主)다. 유럽의 ‘왕의 두 신체’론과 극히 비슷한 논리를 16세기 초 명나라 장총(張聰)이 폈다(조선에서는 17세기 박세당과 윤휴가 그렇다). 장총의 군주 세종(世宗)은, 유교 조정에서 늘 그랬듯, 정통성 위기에 시달리고 있었다. 적통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장총은 왕권 계승의 공적 성격을 통(統)이라 하고, 부자(父子) 계승의 사적 성격을 사(嗣)라 하여, 양자를 구분하고, 세종이 선황(先皇)과 부자 관계는 아니나 어쨌거나 왕권을 이었으므로 그 계승은 정당하다 논변했다. 유럽 왕실의 사제, 법률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도 왕권을 변호하고자 이런 논변을 폈다. 그러나 압도적 다수의 유자(儒者)들은 이런 논리가 성왕론의 왜곡이라 생각했다. 죽음을 불사하고 끝까지 정통성 시비를 벌렸다. 그 결과 134명의 조정의 핵심 관료들이 일거에 숙청당했다. 중국은 통상 예의(禮議), 조선에서는 예송(禮訟)라고 하는 이 시비는 유교조정의 거의 항상적인 문제였다. 잘 알다시피 유교 정치사는 예송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과 중국이 다른 점은 중국에서는 정통성 투쟁이 벌어지면 보통 황제가 이기는 데 반해 조선에서는 거의 항상 유자들이 이겼다는 사실이다. 중국 유교가 약했다기보다는 중국 황제의 권력이 더 컸던 탓이다. 오히려 주목할 만한 것은 중국 황제의 압도적인 힘의 우위 속에서도 중국 유자들이 보여준 치열성이다. 한, 송, 명과 같은 순수 한족 왕조들에서 이 점이 두드러졌다. 이렇듯 군주에 대한 힘의 상대적 차이가 있었으나, 유자들은 끊임없이 정통성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군주의 기를 꺾고, 유교 윤리에 맞게 순치시켰다. 군주가 여기에 심하게 저항하면 쫓아낸다. 이것이 바로 조선사에서 적지 않았던 ‘환국(換局)’이다. 오늘날 민주주의 이론에서 중시하는 것이 권력에 대한 비판과 견제(accountability)다. 현대 한국의 강한 권력 비판 전통이 이와 무관하다 할 수 있을까? 이러한 강한 왕권 견제를 통해 유교는 왕권을 서서히 내파(內破)하고 있었다.
유교 문명의 평등의식은 어디서 왔는가? 일찍이 과거제도를 도입하면서 세습 귀족제가 결정적으로 타격을 받은 순간 촉발되었다. 과거제가 본격적으로 시행된 송나라 이후의 중국은 세계사적으로 극히 특이한 사회였다. 왕권에 의해 작위와 영지를 세습하는 세습 귀족들이 사라진 것이다. 왕 이하는 모두가 평등하다고 보는 만천명월(萬川明月)의 상황이다. 이로써 중국은 더 이상 봉건사회로 보기 어렵게 되었다. 남은 세습적 봉건제의 축은 왕조와 왕가뿐인 셈이었다. 미국의 베트남-중국 전문가 우드사이드(Woodside) 교수가 말하듯, 능력주의에 입각한 유교 과거-관료제는 분명 또 하나의 근대였다. 그는 이를 ‘잃어버린 근대(lost modernities)’라고 했다. 그 자신이 지적했듯 사실 잃어버린 것도 아니다. 19세기 후반 체계화된 유럽 관료제는 유교 관료제에서 힌트를 받았다. 바로 그 순간 중국에서는 과거제를 폐지했다는 것도 역사의 아이러니다.
물론 극소수만 등용되는 과거제 자체가 유교 평등주의의 몸통이었을 수 없다. 그 몸통은, 사람(人)이라면 누구나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다(人皆爲堯舜)는 맹자의 가르침, 유교 교리 자체였다. 유교 평등주의의 시조(始祖)는 맹자다. 유교사는 유교 원리가 밑으로 확장되어가는 역사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19세기 중반 동학의 창도자 최제우는 맹자의 인(人)을 밑바닥 사람을 뜻하는 민(民)으로 바꾼다(民皆爲堯舜). 동학은 17세기 후반부터 시작되어 18~19세기에 폭발적으로 전개된 대중유교 운동의 결실이었다. 대중유교란 아전유교, 생원유교, 참봉유교, 서얼유교이기도 하고 농민유교, 상인유교이기도 하며, 사대부와 정통 유자들이 그 주체가 아니라는 점에서 정통유교, 상층유교는 아니지만, 그 외곽적 주체들이 맹렬하게 유교적 중심을 지향하였다는 점에서 확고한 유교적 구심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정약용이 말했던 18~19세기 조선의 ‘온 나라가 양반 되기’란, 평등화 경향의 지극히 조선적인, 유교적인 운동 방식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평등열이 유난히 강한 것은 이러한 과거와 무관하지 않다. 한국 평등주의의 약점과 강점을 이 속에서 읽어낼 수 있다. 한국의 평등주의는 강렬하기는 하지만, 연대적 평등의식은 약하고, 개인적 평등주의가 두드러진다는 한계가 있다. 조선 후기 ‘온 나라가 양반 되기’ 평등주의가 압도적으로 개인적 탈주를 통한 양반 되기였다. 매우 예외적인 하나의 사례는 집단적·조직적으로 전개된 19세기 후반의 백정 평등(형평)운동이었다. 조선후기에 양반 공론장, 평민 공론장은 있었지만 노비 공론장은 존재하지 않았다. 19세기의 민란도 하층 양반과 평민(양민) 공론장의 합작품이었다. 물론 노비가 가담했다. 그러나 민란 내부에서 노비 평등운동의 조직적 실체를 찾아보기는 매우 어렵다. 조선 노비제가 무너진 것은 집단적이고 조직적인 저항을 통해서가 아니라, 개인과 가족 단위의 탈주를 통해서였다. 한편으로는 노비제에 대한 정당성 기반이 그만큼 이미 내부로부터 무너지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유교의 내적 논리 자체가 노비제를 정당화시키기 어려웠다. 17세기부터 시작된 노비제 붕괴를 통해 ‘온 나라 양반 되기’는 가속화된다. 신분제가 평등주의와 역설적인 화학반응을 일으킨다는 것이 여기서도 확인된다.
권력에 대한 비판과 견제, 자유전통, 헌정주의, 평등주의, 근대적 주권론, 인민주권론의 단초들이 유교체제 속에서 성장하고 있었다. 이런 바탕의 연속성 위에서 오늘날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도 파악할 필요가 있다. 스피노자의 급진 계몽주의가 유럽 중세의 기독교적 과거에 대한 철저한 비판에서 나왔듯, 우리 역시 유교적 과거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의 자세를 가질 필요가 있다. 그러나 비판이란 그저 몽땅 버리는 것이 아니다. 깊이 들여다보아야, 깊은 비판이 가능하고, 깊은 비판 속에서 미래의 단초도 캐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기왕의 유교 연구는 훈고학을 넘지 못했고, 유교를 본격적인 의미에서 비판적으로 대면하지 못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우리는 유교를 진지한 비판적 연구의 대상조차 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상투적인 비판 몇 마디로 ‘가볍게’ 밟고, 넘어갔다.
그러는 사이, 구유교권인 동아시아 사회와 민주주의의 친화성은 이미 국제적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한국과 대만은 역동성과 활력에서 대표적 사례다. 전후 일본에서는 헌법의 평화 조항 9조가 여전히 국민적 합의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민주주의와 평화에 대한 시민적 저변이 넓다는 이야기다. 중국과 베트남의 잠재성도 크다. 다만 북한이 아직 물음표로 남아 있다. 동아시아 전반이 민주적 평화와 공존의 방향으로 가느냐 권위주의적 패권과 대결의 방향으로 가느냐에 우리 공동체의 미래가 걸려있다.
물론 이러한 친화성을 ‘동아시아 민주주의의 잠재력은 모두 유교 전통 때문’이라는 과잉 해석은 곤란하다. 민주주의는 어느 사회에서나 여러 역사적 요인들의 환경적·상황적 접합 속에서 진화해왔다. 이러한 역사적 요인들 간의 관계를 전면적이고 균형 있게 이해해야 할 것이다. 동아시아 민주주의에 대한 기왕의 대부분 연구들은 동아시아의 유교적 과거에 흐르고 있었던 민주주의적 맥락을 거의 전적으로 무시해왔다. 이렇듯 철저히 지워지고 부정된 고리를 다시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의 현저한 불균형의 교정, 그리고 인식의 심화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상 유교의 강점과 한계는 짧으나 대략은 짚은 셈이다. 한국의 지식인, 특히 진보적인 지식인들은 유교 전통에 대해 강렬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권력에 대한 강한 비판의식은 역설적이게도 대단히 유교적이다. 필자의 이런 진단이 거부감 없게 받아들여지기까지는 아마도 앞으로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필자 역시 유교에 비판적이다. 그럼에도 누군가 ‘당신이 생각하는 유교의 특징을 한마디로 말하면 뭡니까?’라고 물으면, 서슴지 않고 ‘천하위공(天下爲公) 입니다’라고 답한다. 『예기(禮記)』의 유명한 ‘대동(大同)’ 부분에 나오는 말이다.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구유교 문명권은 현대사회를 공공성(公共性)에 입각하여 보다 정의롭게, 보다 민주적으로 발전시켜갈 수 있는 저력을 품고 있다고 믿고 있다. 2011년부터 중동과 전 세계적으로 확산된 민주주의의 물결 속에서 ‘과연 우리의 민주주의 전통을 서구적인 테두리 안에서만 생각해야 하는가’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때이다.
김상준
1960년생. 컬럼비아대학 사회학 박사 졸업. 저서 「맹자의 땀 성왕의 피」, 「미지의 민주주의」, 역서 「유쾌한 감옥」 등. 현재 경희대학교 공공대학원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