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르지 않음'에 대한 증언
1. 20211017 서울시청 광장
버스를 갈아타기 위해 창덕궁 정류장에 내렸다. 자주 와도 서울 지리는 도통 익숙해지지 않았다. 일이 있으면 여기를 갔다가, 다른 일이 있으면 저기를 갔다. 휴대전화에는 항상 지도 어플이 켜져 있었다. 같은 '서울'이라는 지명 안에서도 내가 보고 들었던 모습은 매번 다를 수밖에 없었다.
반면 일과를 마치고 돌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한껏 여유로워 보였다. 퇴근 시간이라 차로 꽉 막힌 도로 옆으로 자전거가 지나갔다. 갑자기 내려간 기온에 몸을 움츠리면서도, 걸어가는 사람들은 잠시 발걸음을 멈춰 해가 지는 모습을 사진으로 담았다. 어딘가로 전화를 거는 소리, 옆 사람과 대화를 나누며 간간이 섞이는 웃음, 버스를 타고 내리며 하는 인사가 노을빛에 스며들어 정다운 분위기를 만들었다.
누군가에게 이 순간은 지키고 싶은 일상일 것이다. 고단한 일을 마치고 자신을 기다리는 장소로, 또는 다른 누군가에게로 돌아가는 시간일 것이다. 나는 특별할 것 없는 그 모습에 왠지 모를 애틋함을 느꼈다. 도로 위를 달리는 버스는 얼마나 많은 일상을 품에 안고 달려가고 있는 걸까. 그 일상은 돌아갈 곳으로 온전히 닿을 수 있을까.
서울시청이 광화문 광장 옆에 있다는 걸 버스에 내려서야 알았다. 몇 년 전만 해도 수백만 명의 행진이 있었던 장소는 한가운데가 공사용 담벼락으로 완전히 막혀 건너편으로 가기 위해선 먼 길을 돌아가야 했다. 커다란 건물이 즐비한 도로를 벗어나 잔디밭이 나올 때쯤, 멀리 모여 있는 불빛이 보였다. 나는 근처 화단에 짐을 내려두고 운영 테이블로 가서 양초와 플래카드를 받았다. 그리고 말없이 대열의 가장 뒷자리에 섰다.
10월 6일, 여수에서 잠수 작업을 하던 현장실습생이 바다에 빠져 숨졌다. 해양레저 전문 특성화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실습계획서에는 향해 보조와 관광객 안내를 배운다고 적혀 있었지만, 그가 실제로 했던 일은 요트바닥에 붙은 따개비를 제거하는 일이었다. 산업안전보건법에서는 잠수 업무를 자격증 소지자에 한해 2인 1조로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잠수 자격증이 없었다. 심지어 바닷속으로 들어가는 그를 지켜보거나 돌보는 이도 없었다.
집회는 숨진 현장실습생의 친구들을 중심으로 이어졌다. 교복을 입고 마이크를 잡은 그들은 친구의 이름을 부르며 천천히 말을 가다듬었다. 그것은 때로는 떨렸다가, 작아졌다가, 다시금 커졌다가, 숨을 고르듯 잠시 멈추기도 했다. 커다란 방송용 카메라가 그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수막 뒤로 서로의 등을 두드리던 뒷모습까지 비추지는 못했을 것이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에 집중하다, 누군가의 노동은 왜 항상 무수히 많은 차별과 위험에 노출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그저 출근하고 퇴근하기까지의 시간이, 월급날을 기다리며 주말 일정을 고민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아도 가끔은 보람을 느끼기도 하는 일상이, 왜 개개인의 조건과 운에 의해서만 결정되어야 하는 걸까.
잠수 작업 중 사망했다는 아이도 그저 일상을 살았을 뿐이다. 무언가 특별한 일을 하거나 잘못을 저지른 게 아니었다. 남들처럼 출근하고 일을 하는 게 생명의 위험을 받거나 외롭게 죽을 이유가 될 수는 없었다. 그래서는 안 되었다. 매서운 바람에 손이 시리고, 종이컵을 끼워둔 양초의 불이금방이라도 꺼질 듯 몇 번이고 흔들렸다. 작은 그림자처럼 비치는 누군가의 삶을 보며 깨달았다. 우리는 닮았다. 내가 이 자리에 나온 이유는 우리가 다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2. 20150914 녹산공단
2015년 9월 14일이었다. 그 다음 주가 바로 추석 연휴라 적응하기 편할 거라던 말이 기억이 난다. 전날 저녁 어머니가 회사 기숙사까지 차로짐을 옮겨 주셨다. 길게 이어진 도로 양 옆으로 끊임없이 공장이 늘어서 있었다. '부산'이라는 지명 안에서도 시기별로 보고 들었던 모습은 달랐지만, 녹산공단의 풍경은 봐도 봐도 도통 익숙해지지 않았다.
처음 출근해서는 작업장에서 한참을 기다렸다. 함께 입사한 다른 친구들이 있었지만 부서가 달랐다. 아침 체조가 끝나자 멀리서 가공 기계들이 본격적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다른 부서 직원들도 바쁘게 움직였다. 하지만 나는 뭘 해야 할지 몰라 괜히 부품이 든 서랍을 열어보거나 하며 작업장 주위를 서성거렸다.
그 잠깐의 시간이 왜 그렇게 길었을까. 창문 사이로 스며들어오던 햇빛에 하얗게 뜬 먼지가 보였다. 학교는 지금쯤 텅 비었을 것이다. 3학년 희생의 절반 정도가 현장실습으로 취업처에 출근했을 테니까. 남은 아이들은제대로 수업에 집중할 수 있을까. 괜히 마음이 뒤숭숭한 건 여기나 저기나크게 다름이 없지 않을까.
1시간 정도 기다렸을 즈음, 반대편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공무팀 차장님이 작업장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에게 설명을 듣고 나서야작업장과 사무실이 나뉘어 있다는 걸 알았다. 공무팀에 소속된 사람이 나와 차장님 둘뿐이라는 것도, 나는 차장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작업장에배치된 기계의 사용방법을 익혔다. 차장님이 시범을 보이면 내가 어색하게따라 했다.
왜인지 회전 방향이 반대로 설정된 범용선반, 복합밀링의 엔드밀을갈아 끼우는 방법, 드릴 날이 상했을 때 숫돌로 갈아내는 모양, 기계에 기름칠하고 관리하는 일, 폐기물 버리는 장소, 다른 부서의 기계는 어떤 특징이 있고, 또 어떻게 대처하면 되는지 등을 모두 차장님에게 배웠다.
차장님은 일을 잘했다. 본인부터 꼼꼼한 성격이었지만, 해당 분야에신뢰를 주는 전문가였다. 국가기술자격 중에서도 가장 높은 등급인 기능장자격증 소지자였고, 늦은 나이에도 대학원에 다니며 공부를 계속했다. 나에게 일을 가르칠 때도 하나부터 열까지 명확한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건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직원이 150명이 넘었던 회사는 작지 않았다. 가공 기계만 해도 수십 개가 돌아갔고, 2층 조립 라인에는 시험기나 조립기 등 다양한 설비가 있었다. 차장님은 그런 공장 설비 관리를 혼자 도맡다 싶이 했다. 자잘한 문제는 해당 부서 반장님들이 직접 해결하기도 했지만, 큰 문제가 생겼을 때는 언제나 차장님을 찾았다. 그건 내가 일에 익숙해진 후에도 마찬가지여서, 공장 어딘가에서 기계를 고치는 차장님을 찾아다니는 게 현장실습 기간 동안 나의 주업무일 정도였다.
사수 역할을 겸하던 차장님이 항상 바빴기 때문에, 궁금한 점이 생겨도 바로 물어볼 수 없었다. 덕분에 나는 수첩을 가지고 다니는 습관이 생겼다. 궁금한 점이 생기면 메모를 해두었다가, 차장님이 사무실에 계실 때 한꺼번에 물어봤다. 뭘 그런 걸 물어보냐는 한심한 눈빛을 보내면서도, 그는대답을 유예하거나 게을리하지는 않았다. 그러면 나는 나대로 성실하게 대답을 받아 적었다.
3. 20151015 부산항
부산역에서 항구로 나가는 길을 몰라 한참을 헤맸다. 미리 길을 좀 알아봤으면 좋았을 텐데, 부산역은 자주 오던 장소라 너무 방심했다. 다행히아래쪽으로 이어지는 길을 찾았고, 도시고속도로를 가로지르는 커다란 횡단보도를 건너 항구 라운지로 들어설 수 있었다. 후쿠오카행 배편은 아직시간이 좀 있었다.
나는 혹시 잊은 건 없나 짐을 살펴보다, 들고 다니는 작은 배낭 안쪽에 넣어두었던 봉투를 발견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봉투에 든 빳빳한5,000엔 권 지폐를 꺼냈다. 일본에 가도 이 돈은 쓰지 않을 거라 다짐했다. 그대로 들고 있다가 돌아오는 항구에서 차장님 선물이나 사드려야지싶었다.
현장실습이 시작되고 한 달 정도 됐을까, 청소년 자원활동을 했던 단체에서 연락이 왔다. 우수 활동자로 뽑혀 3박 4일간의 일본 연수를 지원받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작업장에서 전화를 받은 나는 온전히 기뻐할 수가 없었다.
지금 보면 정말 별일이 아니지만, 그때는 모든 게 심각해 보였다. 근무기간이 한 달도 되지 않은 신입사원에게 연차가 있을 리 만무했고, 3박4일 동안 일본에 간다면 주말을 끼고서라도 이틀은 공결을 받아야 했다. 회사 입장에서는 그냥 놀러 가는 걸로 보이지는 않을지, 입사 초기부터 괜한 눈총을 받지는 않을까 걱정이 됐다.
나는 며칠 동안 혼자 고민하다, 결국 퇴근 시간에 조용히 공무팀 사무실로 들어갔다. 차장님은 언제나 그렇듯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차장님, 어, 왜, 나는 자초지종을 최대한 간략하게 설명하려 애썼다. 제가학교 다닐 때 하던 봉사활동 같은 게 있는데, 거기서 일본을 보내준다고 해서요… 그런데 평일이 끼여 있어서 가능할지…
어, 다녀와라. 네? 그런 건 공문만 있으면 회사에서 다 보내주니까 걱정 말고 다녀오면 된다. 차장님은 그렇게 말하고 나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나는 감사하다고 말하고 사무실을 나왔다. 너무 쉽게 허락을 받아서 오히려 멍한 기분이었다. 정말 그렇게 간단한 일인가? 잘은 몰랐지만, 어쨌든 맘 놓고 일본에 다녀올 수 있다는 생각에 웃음이 나왔다.
담당 선생님께 공문을 요청드리고 일정을 확인하는 동안 차장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사이 회사에서는 여러 이야기가 오고간 모양이었다. 한 번은 관리팀 주임님이 찾아와 우등생이네, 멋지네, 잘 다녀오라고 인사를 건넸다. 나는 민망하면서도 정말 모든 게 별 탈 없이 흘러가고 있음에 안도했다.
출발 전날, 여느 때처럼 퇴근을 준비하며 사무실로 찾아가 차장님께 인사를 드렸다. 내일 가제, 네, 잘 다녀오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하고 돌아서려는데, 차장님이 내게 봉투를 하나 쥐여줬다. 가서 라면이나 사먹어라.봉투에는 빳빳한 5,000엔 지폐가 들어 있었다. 평소에 엔화를 가지고 있는사람은 없을 테니까, 그는 나를 위해 이 돈을 은행에서 바꿔왔을 것이다.
나는 일본에 다녀오며 그 돈을 그대로 술로 바꿔왔다. 뭐 이런 걸 사왔냐는 차장님의 말에는 라면값이었다고 대답했다. 우리는 같이 웃었다.어쩌면 그때부터 나는 차장님을 믿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을지 모르겠다. 이 사람이라면 괜찮을 거라고, 나를 해하거나 상처 입히지 않을 거라고, 그렇기에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출근을 하고 일을 배워나갈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나름 궁합이 잘 맞는 팀이었다. 무뚝뚝했지만 가르쳐줄 건 다 가르쳐주던 차장님과 혼자 작업장에서 이것저것 실험해보며시간을 보내던 나는 별 어려움 없이 현장실습 기간을 넘어갔다. 계절은 어느새 겨울이 됐다. 두꺼운 작업복을 입고 머리도 감지 않은 채 출근하는나에게 더 이상 작업장은 낯선 공간이 아니었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어제 하던 업무를 정리하고, 이번 주말은 뭘 할지 생각했다. 작업장은 이제나의 일상이 되어 있었다.
4. 20201210 서면 로데오거리
그날도 날씨가 추웠다. 외투 주머니에 손을 깊게 찔러 넣고 거리 옆으로 오가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거리 한가운데서 자신의 자리를 꼼짝 않고지키는 사람도 있었다. 태안화력발전소 피해자 김용균의 2주기를 추모하기 위한 집회였다. 나도 가운데 놓인 의자 가장 끝에 앉았다. 그러면서 누군가의 곁을 지키고 아픔을 나누는 건 이처럼 시린 일이 아닐까 생각했다. 책이 나온 지 한 달도 되지 않았을 때라 여기저기서 언론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다. 『교복 위에 작업복을 입었다』의 반응은 뜨겁진 않았지만, 반응을 대하는 나의 감각은 불에 덴 것처럼 불안하고 무거웠다. 여전히 나는자신이 쓴 책에 온전히 책임을 지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일을하지 않아 비는 시간 동안 최대한 다양한 장소를 향해 걸었다. 책임 이전에직접 보고 들어야 할 게 많다고 생각했다.
현장 노동에 대한 글을 써서 그런지, 아직도 공장에서 일하냐고 묻는이들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별다른 일이 없었다면 회사를 계속 다녔을 것이다. 방송대학교 수업을 들으며 학위를 취득하고, 차장님처럼 대학원을 가거나 자격시험을 치르며 전문성을 다졌을 것이다. 차장님은 내가 공부를 하는 것에 호의적이었다. 방송대 입학식 날 연차를 쓰게 도와준 것도 차장님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1학년을 마친 방송대학교를 도중에 그만두고, 주말에 다니던 학원도 그만두었다. 대신 퇴근 후 새벽 늦게까지 글을썼다. 노트북 하드디스크에 쌓여가던 파일 중에는 현장실습생, 산업기능요원, 청년노동자에 대한 글이 있었다.
누군가에게 그건 단순히 개인의 진로 변경으로 보이기도 했겠지만,적어도 나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나는 우리 사회의 신뢰가 무너진 지점을봤다. 일상을 살아내고 지키는 일이, 그저 개개인의 조건과 운에 의해서만결정되는 모습을 봤다. 가장 큰 계기는 2018년도에 있었던 태안화력발전소사고였다. 연료공급용 컨베이어 벨트에 끼여 숨진 이는 4시간 동안 작업장에 홀로 방치됐다. 그의 시신을 동료들이 발견하고 석탄수레에 싣고 나올때조차 컨베이어 벨트는 계속 돌아가고 있었다.
‘컨베이어 벨트는 계속 돌아가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마음속에서 무언가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누군가의 일상은 멈춰버렸는데, 세상에서 사라져버렸는데, 가족이나 친구, 또는 그와 관련된 모두의 일상이 어떤 방식으로든 일그러지고 깨진 채로 남을 텐데, 컨베이어 벨트는 왜 계속 돌아가고 있던 걸까. 왜 누구 하나 그걸 멈추자 말하지 못했던 걸까.
언론이나 뉴스에서 태안화력발전소 사건이 나올 때마다 나는 흠칫했다. 피해자를 향하는 호명은 나를 지칭하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그 삶을, 아주 사소하고 특별한 것 없는 일상을, 많은 사람은 전혀 모르는 것처럼 대했다. 세상에 그런 일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는 것처럼, 그런 삶을 이제야 알게 된 것처럼 대했다. 여기저기서 '청년노동자'라는 단어가 조명될 때마다 나는 점점 온몸이 희미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글을 쓴 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것을 위해 필요한 건 단순히 더 나은 급여나 학위 이전에, 우리의 일상을 구성했던 이야기들이 아닐까 싶었다. 이야기가 있다면 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가 다르지 않은 지점을 찾아내고, 서로가 외롭지 않도록 그 옆을 지킬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를 지키는 일이, 다른 누군가를 구하는 일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선택은 나의 미래를 조금 다른 방향으로 돌려놓았다.
5. 20210730 광안리
태준 씨는 나이에 비해 정말 어른스럽고 예의바른데, 가끔은 그게 옛날 습관처럼 보일 때가 있어요. 현장에서 몸 쓰는 일을 했으니까, 실수하면안 된다는 생각이 강하게 있는 것 같아요. 누가 다치거나 잘못될까 봐 너무걱정을 많이 해요. 긴장할 필요 없어요. 시간이 걸리겠지만, 분명 스스로괜찮다고 느끼는 순간이 올 거예요.
대표님의 말씀에 나는 어색한 웃음을 보였다. 최근 맡았던 책의 책임편집을 끝냈는데, 작업 중 힘든 모습을 너무 많이 보인 건 아닌가 싶었다.첫 번째 책을 편집하는 과정에서 주변 사람들에게 큰 민폐를 끼쳤다. 사진저작권에 대해 미리 준비하지 못해 선배 편집자의 걱정을 샀고, 디자인 회의에서 의견 충돌이 잦아 디자이너를 비롯한 여러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었다. 일정을 앞당기고 싶다는 욕심에 스스로도 과중한 업무를 견뎌야 했다.
겨우겨우 책이 한 권 나오고, 3개월째에 접어드니 낯설기만 하던 출판업무도 이제는 조금 적응이 됐다. 점심을 먹은 후에는 매일같이 광안리 바닷가를 따라 걸었다. 사무실에 출근하고, 누군가의 글을 읽고, 저자에게 연락해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이 어느새 일상이 됐다. 그게 이상하면서도당연한 일처럼 느껴졌다.
늦여름이 이어져 퇴근시간이 되어도 거리가 밝았다. 사무실에서 멀지않은 곳에 버스 차고지가 있었다. 바로 옆 정류장에서 기다리다 보면 승객이 하나도 없는, 이제 막 운행을 시작하는 버스에 올라탈 수 있었다. 나는내리는 문과 가까운 좌석에 앉아 대표님이 했던 말을 곱씹어보았다. 나는무엇을 걱정하고 있는 걸까. 그건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는 일일까. 딱히말할 사람이 없어서 휴대전화 메모를 켜 문장을 적었다. '어떤 노동이든 크게 다르지 않다'라고.
낯설고 무섭기는 공무팀 작업장이나 출판사 사무실이나 마찬가지였다. 실수하면 큰일이 날 것 같고, 일을 잘하고 싶다는 욕심도 있는 반면,가끔은 일 자체가 너무 하기 싫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나를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조언을 해주고 때로는 따끔한 충고를 건네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나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내가 만난 이들은 모두 노동이 누군가를 돌보는 일임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공장에서 나를 가르치던 차장님도, 내 글을 책으로 만들자고 말해주었던 편집자님도, 직업으로 출판 일을 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했던 대표님과, 함께 사무실에 출근하고 의견을 나누는 동료들도, 모두가 어느 시절 어딘가에 있던 나를 구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괜찮은 걸까. 누군가의 일상을 지켜내는 일을 단순히 주변 사람들의 노력에만 의지하거나, 개개인의 운과 조건으로 결정되어도 괜찮은 걸까. 그걸 어쩔 수 없다 수용하고 납득해버려도 괜찮은 걸까. 버스가 멈출 때마다 승객들이 올라타 내부가 혼잡해졌다. 차창으로 비스듬히 들어오는 노을빛은 그들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트려 놓았다.
서로 겹치고 겹쳐 누가 누구의 것인지도 구분할 수 없는 그림자를 보며 숨을 삼켜다. 괜찮을 리 없다. 그건 단순히 내가 지나왔던 시절이 사건의 희생자들과 닮아서가 아니었다. 시간이 흘러도, 일하는 환경과 종류가 달라져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다르지 않은 지점은 사건과 사고의 순간이 아니라, 노을빛이 비쳐 들어오는 일상의 역영에 있기 때문이었다.
그제야 모든 노동에는 누군가를 돌보는 일이 포함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봄이 없다면 그것은 노동이 아니었다. 타인의 일상을 지킬 의지가 없는, 타인을 내버려 두는 일은 노동이 아니라 폭력이었다. 작업 중 사망한 현장실습생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사고를 당한 김용균도, 노동이 아닌 폭력의 현장에 있었다.
내가 걱정하는 건 그러한 폭력으로부터 우리가 무뎌지는 일이었다. 우리의 일상이 폭력과 분리되어 있다고 믿어버리는 일이었다. 하지만 모든 노동이 돌봄을 포함하고 있다면, 그것이 누군가의 삶을 지키는 일과 연결되어 있다면, 어떤 죽음은 개인이 아닌 우리 사회 전체의 불행이 아닐까 싶었다.
나는 우리가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가기를 원치 않는다. 단지 우리의 노동이 폭력보다는 돌봄에 가깝기를 바랄 뿐이다. 일상을 살아감으로 서로를 구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건 터무니없는 욕심일까. 하지만 어느날 거리에는 타인의 삶을 비추기 위해 촛불을 들던 사람들이 있었다. 수없이 떨리고 작아져도, 그 삶을 증언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렇다면 나도 자신의 일상 속에서 작은 목소리를 내어보려 한다. 우리의 삶을 포개어 비추는, '다르지 않음'에 대한 증언을 말이다.
허태준
호밀밭 출판사 에디터. 저서로 <교복 위에 작업복을 입었다>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