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는 우리 곁에 있다. 어린이가 없는 세계는 없다. 그런 세계가 있다면 머지않아 없어질 세계다. 한때 어린이였던 사람에게 어린이는 어느새 멀어진 것처럼 느껴지지만 어린이는 그런 사람을 가까이에서 바라보며 자란다. 어린이는 어서 그 사람이 되고 싶다. 그 사람과 함께 더 나은 세계를 만들고 싶다. 기린보다, 떡갈나무보다 크고 멋지게 자라나는 꿈을 꾼다. 어쩌면 어린이는 절대로 그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그 사람은 어린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짓밟고 지운다. 웃고 귀엽게 보일 때만 사랑한다. 자신은 어린이와 멀리 있으며 시끄러운 어린
어린이는 우리 곁에 있다. 어린이가 없는 세계는 없다. 그런 세계가 있다면 머지않아 없어질 세계다. 한때 어린이였던 사람에게 어린이는 어느새 멀어진 것처럼 느껴지지만 어린이는 그런 사람을 가까이에서 바라보며 자란다. 어린이는 어서 그 사람이 되고 싶다. 그 사람과 함께 더 나은 세계를 만들고 싶다. 기린보다, 떡갈나무보다 크고 멋지게 자라나는 꿈을 꾼다.
어쩌면 어린이는 절대로 그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그 사람은 어린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짓밟고 지운다. 웃고 귀엽게 보일 때만 사랑한다. 자신은 어린이와 멀리 있으며 시끄러운 어린이들은 세상에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여긴다. 어린이는 가장 아프게 맞고 가장 빠르게 목숨을 잃고 어느 곳에선가는 오늘밤도 울다 지쳐 잠들어버린다. 위기 앞에서 가장 먼저 사라진다. 어린이에 대한 예산을 축소하는 일은 비교적 신속하게 진행된다. 어린이에게는 투표권이 없다. 그러나 어린이에게는 정책을 결정하는 그 사람과 똑같은 마음과 몸이 있다. 언젠가 세월이 흐른 뒤에 믿음직한 어른이 될 사람들이 아니라 지금 그 사람의 선의를 고스란히 믿고 있는 살아있는 실존이다. 한 살이라도 더 어린 사람은 그 판단을 신뢰할 수 없기에 투표권을 줄 수 없다고 강력히 주장하는 사람은 믿지 않겠지만, 어린이에게도 생각이 있다.
마치 어린이가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그런 세계와 마주칠 때마다 어린이는 생각한다. 이 세계가 말하려 하지 않는 이 세계가 "No! Kids!"라고 선언하며 문밖으로 내보내는, 이 세계 안에서 나는 정말 없는 사람일까. 어린이의 속 깊은 제안이, 솔직한 호소가, 살아서 지르는 고통과 비명이 가볍게 묵살되는 것을 본다. 그런 세계라면 없애고 싶다고 생각한다. 다른 세계 어린이가 있는 세계, 어린이가 살아있는 세계를 세우고 싶다고 생각한다. 이 목소리를 말하고 이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듣는다. 그것이 아동청소년문학이다.
1921년은 우리 사회가 어린이를 더 자주 바라보고, 어린이를 이해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던 때다. '어린이'라는 말을 더 많이 이야기하자면서 사람들이 곳곳에서 모여들고 의논하고 부지런히 여러 가지 일을 도모하던 시기다. '이놈, 저녁, 이 자식, 저 새끼' 같은 멸칭이 어린이를 부르는 호칭이 될 수 없다면서 그들을 동등한 사람으로 소중하게 대우하면서 '어린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운동이 일어난다. 방정환 선생을 비롯해 어린이를 위한 글을 쓰는 사람들이 움직이게 된 배경에는 3·1 운동의 영향도 컸다. 일본제국주의가 국권을 강제로 빼앗고 백성들을 향한 압살을 시도하는 과정을 목격하면서 자신들의 현재도 그러하지만 무엇보다 어린이들의 미래를 송두리째 팔아버린 것 같은 자괴감을 느낀 어른들이 많았다.
탄압 속에 자라면서도 어린이들은 똑똑했고 꿋꿋했고 당당했다. 많은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3·1운동의 현장에서 스스로 거리에 나오고 모임을 꾸리고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으며 목숨을 잃었다. 만세운동에 나선 어린이들에게서 얻은 귀한 배움을 잊지 않고서 어른들은 어린이 운동을 시작한다. 어린이날을 제정하고 어린이를 위한 책을 펴내고 어린이가 읽기 좋은 시와 동화를 쓰며 잡지를 만든다. <어린이>나 <샛별> 같은 잡지들이다. 우리나라의 근대 아동문학은 이렇게 암흑 속에서 씩씩하게 출발했다.
유네스코는 만 18세 이하의 시민을 모두 '어린이'라고 부른다. 어린이를 구조하고 구호 활동을 펼치는 다른 국제적인 기구에서도 18세의 청소년들까지 구호 대상으로 포함한다. 어린이는 세계 시민의 일원으로서 어른과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 동시에 어른으로부터 보호받고 교육받고 사회 제도적 지원 속에서 안전하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지켜져야 하는 존재다. 아직 성장하고 있는 사회적 약자이기 때문이다. 한사회의 인권 수준을 알아보려면 아동 인권의 현황을 살펴보면 된다. 어린이를 바라는 그 사회의 인식이 인간의 존엄성을 대하는 감수성의 척도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어린이'를 대하는 상황과 현실은 어떠한가. 2021년, 2022년, 2023년은 어린이 운동의 한 세기를 돌아보는 역사적 순간을 통과하는 시기다. 그럼에도 백 년 전의 어린이와 비교하여 현재의 어린이는 덜 굶고 덜 맞고 아파도 더 빨리 치료받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어린이를 부르게 되는 구체적 상황을 들여다보면 흔쾌히 그렇게 말하기가 어렵다. 어린이와 청소년의 이름을 목 놓아 불러야 하는 사건이 끊이지 않는다. 사건이라는 말보다 상태라는 말이 더 적합하다고 할 정도로 계속된다. 노골적인 무시와 경멸은 어린이 출입금지구역이라는 양상으로 나타난다. 매끈하고 균일하게 정비된 현대적 공간에서 어린이의 자연스러운 발달과정은 이해받지 못한다. 놀이터는 출입이 제한되고 어린이의 이동권과 생명을 보장하기 위한 교통안전법은 사회로부터 놀림과 공격을 받는다. 아동기의 특성에 대한 몰이해는 양육자에 대한 혐오로 이어진다. 양육자는 '어린이 때문에 죄송합니다.'를 달고 살아야 한다. 어린이와 함께하는 가족이 환대받기는커녕 외면을 당한다.
디지털 미디어 안에서 어린이는 더 처참하다. 아동 성범죄자들은 불법성 착취 동영상을 입수할 수 있는 손쉬운 타깃으로 어린이를 정하고 어린이를 이용하여 돈을 벌며 어린이의 몸을 보기 위해 돈을 지불한다. 아동의 성적 대상화는 심각한 수준인데 우리나라는 이에 대한 인식이 부족할 뿐 아니라 실질적인 처벌과 법적 처분의 수위가 매우 낮은 나라에 속한다. 어린이는 어느 공간에서도 달갑지 않은 귀찮은 존재로 취급받으며 '초딩', '잼민이'로 불린다. 그리고 어린이는 24시간 그것을 듣고 보고 있다. 당연히 자신들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안다.
다음에 소개하는 몇 편의 국내외 문학작품은 비교적 최근에 창작된 것으로 오늘의 아동·청소년에게 문학이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잘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뛰어난 아동청소년문학 작품은 어른 독자들에게도 공감을 얻는 일이 적지 않지만 성인 독자들에게 널리 사랑받는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아동청소년문학 작품인 것은 아니다. 문학을 향유한 경험은 어른들이 더 많을 수 있으나 여러 아동청소년문학 작품들을 살펴보고 자신들의 문학인지 아닌지 발견하는 눈과 미감에 따른 선택의 기준은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있다. 대부분의 경우 좋은 아동문학 작품을 쓴 작가는 현재 어린이나 청소년이 아니겠지만, 어린이와 청소년을 누구보다 존중하며 1일의 독자로 모시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그러한 작품으로 꼽을 수 있는 몇몇 작품을 살펴본다.
백온유의 <유원>(창비, 2020)은 한 고등학생의 삶을 다룬 청소년소설이다. 이 작품에서 우리는 그동안 습관처럼 선이나 악의 영역으로 분류해왔던 몇몇 개념을 다른 시선에서 바라보게 된다. 그 시선은 청소년 인물인 유원과 수현의 것이다. 흔들림 없는 고귀한 가치로 일컬어져 왔던 '모성'은 화재 사건의 생존자인 유원을 우연히 구해준 아저씨의 집요한 감정으로 지칭되며 '착취'의 맥락에서 해석되고 '섬뜩하다'라는 수식어를 부여받는다. 이 작품에서 '정의'라는 낱말은 어른들이 지닌 표면적인 근면함을 나타내며 그들의 얄팍한 위선을 폭로하는 단어로도 쓰인다.
이 작품에서 이웃의 축복은 감사해야 하는 일이면서도 성장하는 주인공을 옭아매는 족쇄이기도 하다. 화재 사건 전까지는 자신을 몰랐던 사람들이 유원이 경험한 기적에 기대어 자신의 감정을 위로받고자 하는 모습이 낱낱이 날 것으로 재현된다. 그들은 유원의 행복을 바란다고 말하면서도 멀쩡하게 잘 살아가는 생존자 유원의 모습을 당혹스럽게 여긴다. 작가는 유원의 성장을 바라보는 주위 인물들의 이중적 태도를 날카롭게 파헤친다. 고통을 겪은 청소년의 순탄한 성장을 응원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은근히 실패의 소식은 없는지 기대하면서 비극적인 게임의 관전자가 되고 싶어 하는 안전지대에서 나오지 않는 이들의 삶에 대해서 비판한 유원의 정체성을 통해서 더욱 극대화되지만 기성세대를 바라보는 청소년들의 시선을 그대로 옮긴 것이기도 하다.
한편 “어떤 애가 될 줄 잘 모르니까 몰라서 좋아할 수 있는 건가. 내가 이렇게 자랄 줄 미리 알았어도 엄마가 나를 좋아했을까.”(211쪽)라는 유원의 독백은 청소년의 인정 욕구와 성장에 대한 불안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배우가 되면 악역을 맡고 싶고 "사람들이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는 인물이 되어보고 싶다."(217쪽)는 유원의 친구 동생 정현의 말에서는 미결정 상태인 십 대의 미래에 대한 공포가 '악'에 대한 탐색으로 드러나는 맥락을 보여준다. 익숙한 관계 안에서 인정받기를 원하면서도 관계와 통념에 편입되는 일은 단호히 거부한다. 이러한 욕망과 거부의 태도를 이해하는 가운데 청소년문학은 비로소 청소년 곁에 그들의 문학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
태 켈러의 동화 <호랑이를 덫에 가두면>(강나은 옮김, 돌베개, 2021)은 조용한 아시아 여자애여서 '조아여'라고 불리던 아시아계 이민 3세대 어린이가 주인공인 작품이다. 엄마의 엄마인 이민 1세대 할머니에게 릴리와 릴리의 언니가 듣고 자란 호랑이가 나오는 전설은 잊히지 않는 강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그 전설의 호랑이가 할머니의 죽음을 앞둔 릴리의 상상을 점령하고 릴리의 눈앞에 나타난다. “질문이 너무 많으면 위험해.” 라고 당부하면서도 릴리 자매의 모험을 거침없이 응원했던 릴리의 할머니는 한인 이민 1세대의 대담함과 위축된 모습이라는 양면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영화 <미나리>의 할머니를 닮았다. 할머니는 릴리 자매에게 늘 불가능한 일들이 일어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고 릴리는 그 일들이 정말로 일어날 수도 있을 거라고 믿으며 자란다.
완전히 백인 중심인 동네에서 아시아계 이민자의 손녀로 자란 릴리는 위험하기 때문에 이야기해서는 안 되는, 금기시된 어떤 이야기를 향해 뛰어드는 모험을 감행한다. 그 이야기는 결국 릴리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해주고 '나 같지 않은 상황'에서 ‘나를 발견하는’ 성장의 디딤판이 되어준다. 이 작품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어린이와 청소년의 성장이란 '이야기 듣기'와 '이야기 이루기'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자라나는 일은 꿈을 이루는 일이며 그 꿈은 이야기에서 출발하고 이야기로 남겨진다. 작가는 어린이와 청소년의 목소리를 빌어서 이렇게 말한다. "이야기는 누구 한 사람의 것이 아니며 이야기는 이야기가 되려고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어린이와 청소년은 사회적 약자에게 기득권을 가진 어른보다 더 빨리 공감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다. 성장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야기가 되고 싶은 약한 자의 마음을 본능적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안나 니콜스카야의 청소년소설 <스웨터로 떠날래>(김선영 옮김, 바람의 아이들, 2019)는 작은 바닷가 마을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청소년들의 일상을 잔잔하게 다룬다. 제목에 등장하는 '스웨터'는 동네 카페 이름이다. 바리스타가 프랭크 시나트라를 틀어주며 거대한 창으로 바닷물처럼 햇빛이 들어오는, 체리 파이와 치즈 케이크가 맛있는 곳이다. 동네 사람들은 나이, 성별, 하는 일을 떠나서 조용한 수다를 나누거나 홀로 신문을 읽기 위해 이 카페를 찾는다. 순간을 흡수하는 법을 알고 머릿속에 하늘을 담을 줄 아는 이들이 거기에 있다.
이 작품은 서두르지 않는 자연스러운 생활에 대한 이야기다. 언제부터 인가 작가든 독자는 이런 작품보다는 속도감 있고 이슈가 두드러지는 서사에 더욱 관심을 갖는 것 같지만 문학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우리에게 규칙적인 심장의 박동과 호흡을 되찾아주는 일이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면 반가워하기보다는 흠칫 놀라게 되는 긴장 가득한 세상에서 생활의 감각을 회복시키는 이야기가 있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대책 없는 희망이나 흔한 미담을 푸는 책은 아니다. 가까운 이의 죽음을 둘러싼 메워지지 않는 절망이 있고 좀처럼 그 폭을 가늠하기 어려운 절벽처럼 갈라진 관계가 있다.
열다섯 살 율라는 희소병으로 엄마를 잃은 동갑내기 베르카와 한방에서 살게 된다. 가족끼리 잘 알던 사이이고 어려서부터 자주 만났지만, 사춘기의 두 사람이 같은 방을 써야 한다니 상상할 수 없이 무서운 일이다. 둘은 150년 만에 만난 것처럼 어색하다. 물론 짐작되듯이 결국 이 둘의 관계는 풀린다. 그러나 그 과정이 면도날 위를 걷는 것처럼 조심스럽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을 바라보는 묵묵하고 다정한 시선이 빛으로 옷감을 짜듯이 교차한다. 작가 안나 니코스카야는 "기적은 걸음마다 있고, 우리는 그것을 볼 줄 아는 법을 배우면 된다."고 말한다. 이 소설은 기적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고 ‘볼 줄 아는 법’에 대한 이야기다.
본문에 다른 글씨체로 표기된 부분은 율라와 베르카가 어렸을 때 겪은 일들이다. 과거의 일과 현재의 상황을 번갈아 보여주는 방식은 소설에서 드문 것은 아니지만 이 작품에 처음 진입하는 독자들은 좀 어지럽다고 여길 수 있다. 러시아 사람들의 이름에는 부칭과 약칭, 애칭 개념이 있어서 한 인물이 하나의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다. 대화가 이루어지는 상황과 상대와의 관계 및 태도에 따라서 부르는 방식이 몇 가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한 인물이 두 가지 이름으로만 나와도 독자는 복잡하다고 느낀다. 따라서 이 책을 비롯한 러시아 소설을 잘 읽는 방법 중 하나는 이름들과 인물 관계도를 별도의 종이에 메모하면서 읽는 것이다. 처음만 잘 지나 인물이 구분되어 보이기 시작하면 그다음부터는 이 작품의 독특하고 문학적인 심리 묘사와 다층적 서술에 깊이 빠져들게 된다. 관계가 깊어지면서 호칭이 가볍고 사랑스럽게 변하는 부분도 매력으로 느껴진다.
욕망에 사로잡힌 어른들의 모습은 자라나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눈에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로 보인다. 예술가로서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더욱 성공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베르카의 아버지 예브게니 올레고비치는 딸도 바이올리니스트로 만들기 위해서 그를 몰아붙인다. 아버지의 욕망에 시달리던 베르카가 상상의 서사를 통해 비상구를 찾아내고 올라와 협력해 바이올린을 내다 버림으로써 아버지와 맞서는 장면은 이 작품의 아름다운 대목 중 하나다. 그런가 하면 각종 신호들이 서로 경쟁을 벌이는 것 같은 디지털 시대에 이 작품에 등장하는 클래식한 소리들, 오래된 악보의 이름, 이웃집을 찾아가고 찾아온 손님을 반기는 다정한 모습 같은 것은 인물들의 갈등과 분투 속에서도 전체적으로 안온한 분위기로 작품을 감싼다. 주인공 율랴가 읽는 책의 제목 중에는 기억 전달자처럼 우리가 잘 아는 작품도 있고 낯선 것도 있지만 그건 큰 문제가 아니다. 종이책을 고르고 선물하고 책장을 넘기는 장면이 자연스럽게 읽는 사람의 마음을 녹인다. 율랴가 의류 보관소에 외투를 맡기고 진열품 전체를 다 보려면 5년 반이 걸린다는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들어가는 장면은 긴 여운으로 남는다. 박물관을 걸으며 율랴와 율랴의 엄마가 나눈 "사람에게 공기가 필요하듯이 아름다움도 필요해. 물이 필요하듯이 아름다움도 필요해." 라는 말은 어찌 보면 평범하지만 두고두고 간직하고 싶은 문장이다.
강렬하고 선형적인 이야기들이 만들어내기 어려운 이야기의 무늬가 있다.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좋은 문학작품들은 여러 차례의 변곡점을 지나야만 하는 성장기 인물들의 무늬를 잘 관찰해서 그려낸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얼마 전 김해원 작가는 그 겹겹의 치밀하고도 섬세한 변화의 역사를 기록해 <나는 무늬>라는 제목의 청소년소설을 펴내기도 했다. 가부장적인 사회 구조 안에서 여성 청소년 문희의 자아가 독립해가는 과정을 다룬 이 작품도 지나온 가족의 서사나 청소년이 놓여 있는 공동체의 모순과 떼어 생각할 수 없다.
좋은 아동청소년문학 작품은 어린이와 청소년 독자를 더 안전한 곳으로 안내한다. 그리고 더 큰 모험에 뛰어들도록 이끈다. 그것을 우리는 다른 세계를 만드는 과정이라고 받아들인다. 오늘도 뉴스 기사 목록에 등장하는 학대받는 아동과 청소년의 소식을 읽으면서 그들이 만드는 세계는 지금과 달랐으면 좋겠다고 바라본다. 그 이전에 그들이 더 안전하게 자랄 수 있도록 힘을 주는 문학의 안전지대가 더 많아져야 할 것이다.
김지은 아동청소년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