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하는' 청년들의 미래와 희망
1
대한민국 제20대 대통령 선거가 한국사회에 남긴 깊은 상흔은 ‘이대남 현상’으로 가시화된 '젠더 감정'에 관한 것이다. 따지자면 감정의 실체는 극심해진 정치 혐오라고 해야 하지만, 대선을 거치면서 젠더 갈등은 논의가 필요한 사안이 아니라 개별 사안을 두고 합리적 추론을 시도해보기도 전에 감정적으로 대결할 문제가 되어버렸다. 시민의 삶과 무관한 자리 아니 그것과는 오히려 정면으로 배치되는 자리에서 이루어진 정치에 대한 축적된 환멸은 정치인이 아니라면 누구라도 좋다는 식의 판단정지의 상태를 불러왔고, 그 부정감정의 흐름이 후보 개인의 도덕적 자질이나 사회에 대한 윤리 의식 따위는 외면해버리는 정치적 권리 행사로 이어졌다.
‘젠더 감정’이 지난 대선을 거치면서 비로소 생성된 것은 아니며, 그 실체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왜곡되고 과장된 것임에 분명하지만, 문제는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많은 부분들을 '젠더 갈등'이라는 자루에 쓸어 담아버리는 것이 가능해졌다는 사실일 것이다. 한국사회가 이제야 정치적으로 악용되어온 지역감정이라는 모래지옥에서 벗어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우리는 그보다 더 답답한 상황에 내몰렸다고 해야 한다. 기원의 근거나 여부와 무관하게 지역감정이 한국사회의 계급 격차를 은폐 하는 정치적 도구였다면, 젠더 갈등이 정치적 도구로서 악용되기 시작하면서 계급 격차로만 설명할 수 없는 계급X젠더X지역X…의 복합적 격차가 가장 손쉬운 형태의 대결 구도 속에서 논의 불가능한 지점으로 팽개쳐졌기 때문이다.
청년이라는 번역어가 등장한 1900년대 이래로, 한국사회에서 청년이라는 말이 텅 빈 기호가 아니었던 때는 없으며, 오랫동안 그 기호의 공백은 정치적이거나 경제적인 이유로 청년을 '호명하는' 주체들에 의해 채워져 왔다. 꿈꾸는 미래와의 상관성 속에서 청년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며, 미래를 선취하려는 주체들의 헤게모니 쟁투는 미래의 청사진을 청년의 이름으로 그리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때문에 청년 당사자들의 목소리가 없지 않았으나 그 자신이 사회의 주동 세력이 될 '미래'와 접속되지 않을 때 그 목소리는 사회적 영향력을 얻지 못했다.
IMF 시대를 거치면서 보편적 범주로서의 청년의 외곽선을 그리는 일이 사실상 불가능해졌고, 청년과 비-청년의 경계보다 청년 내부의 차이 들이 더 극심해졌다. 2010년대 이후로 '수저론'과 '노~~력론, ‘N포 세대’라는 말이 단적으로 말해주듯, 이미 정해진 기성의 체제 속에서 청년 스스로가 바꿀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는 자조적 인식이 널리 공유되기 시작했고, 지구적 차원의 소득 격차가 심해지고 비정규 노동 형태가 확장되면서, 청년은 미래를 이끌어갈 주체가 아니라 사회가 보호해야 할 약자의 대표적 이름 가운데 하나가 되기에 이르렀다. 집단표상으로서의 청년에 대한 범주화가 불가능하며 호명하는 청년과 당사자 청년의 논의를 포함해서 어느 자락에서 시작해도 청년의 부분만을 언급할 수 있을 뿐임에도1) 그간 청년론이 힘을 잃지는 않았었다고 해야 한다. 미래에 대 한 논의가 지속되어야 한다는 근대적 약속이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극심해진 소득 불평등과 자산 격차 시대를 맞이하면서 미래에 대한 논의가 지속되고 있지만, 논의의 중심에 청년이 놓여 있지는 않다. 전상진의 <세대 게임-세대 프레임을 넘어서>(2018), 김정훈•심나리•김항기의 <386세대유감>(2009), 이철승의 <불평등의 세대>(2019), 김선기의 <청년팔이 사회 - 세대론이 지배하는 일상 뒤집기>(2019), 신진우의 <그런 세대는 없다>( 2022)를 통해 확인할 수 있듯, 세대론을 주장하든 비판하든 청년에 대한 주된 논의가 세대론의 형태를 띤다는 것은 징후적 현상이 아닐 수 없다2)
혁명의 시공간이라 불러도 좋을 2016년을 통과하면서 ‘87년 체제’의 최종 종착지를 확인할 수 있었지만, 오랫동안 한국사회에서 비판적 정신으로서의 지위와 권위를 유지하던 민주화 세력의 윤리적 붕괴는 '87년체제'의 귀결이 우리가 상상한 미래와는 꽤 다르다는 뼈아픈 확인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코로나 팬데믹은 미래가 지금보다 나아질 것이라는 행복의 약속이 보탤 것 없는 거짓 희망임을 모두가 알게 하는 시간이었다. 세대론의 범람과 함께 세대 대결 구도 속에서 청년이 호출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어떤 중간지대에 놓여 있음을 역설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중간지대를 두고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던 중요한 축들, 분배 와 인정의 정의가 붕괴된 지대를 떠올려 볼 수 있다면, 있다면, 중간지대를 다른 단계로 나아가는 이행기라고만 말할 수는 없다. 단절과 연결의 동시적 공존 상황인 것이다.
오랫동안 신자유주의 체제를 비판해온 낸시 프레이저의 통찰을 빌려 말해보자면, 삶의 모든 영역이 자본의 논리로 장악되는 상황이야말로 체제가 되어버린 신자유주의의 승리가 아니라 오히려 신자유주의 헤게모니 붕괴이거나 그 시작일 수 있다.3) 하지만 신자유주의 체제의 붕괴를 목도한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많지 않다. 여전히 우리는 그 이후를 상상 하지 못한다. 지구적 차원의 불평등이 위험 수위에 도달해 있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세계는 좀더 경직되어가고 있는 편에 가깝다. 코로나 팬데믹을 계기로 기후 생태 문제를 중심으로 한 지구적 차원의 논의가 시작되고 있으나 그 미래를 낙관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미래에 대한 새로운 상상은 어떻게 가능하고 그것은 누구에 의해 시작될 수 있을까. 그 희박한 가능성의 미약한 흐름을 세심하게 들여다보는 자리에서 청년을 다시 호명해도 좋은 것일까.
임솔아의 소설집 <아무것도 아니라고 잘라 말하기>에 첫 번째로 실린 소설 ‘그만두는 사람들’에는 자신이 속한 곳 을 떠나 다른 곳에 자신의 뿌리를 내리고자 하는 청년들이 등장한다. 자신이 있던 곳을 미련 없이 훌쩍 떠나기도 하고 원치 않지만 떠밀리듯 떠나야 하는 청년들도 있지만, 소설이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것 은 그들이 놓여 있는 '사이 어딘가의 면모이다. 그들이 떠나게 된 불가피한 사연이나 정착을 위한 새로운 시도들이 언급되고 있으며 그 사연은 그것대로 독자의 공감과 동의를 얻어내고 있지만, 독자를 향한 발신은 중간적 위치가 만들어내는 것, '사이 어딘가에 놓인 존재들 이 겪는 복잡한 감정체로 모아져 있다.
그들은 종종 협조적이지 않은 사람으로 분류되지만 그 자신은 늘 배제 되어 있다고 느끼기도 하는 사람들이다. 재능이나 끈기가 있다 해도 자 신이 원하는 소속감을 충분히 얻지 못하며 의도와는 관계없이 그것이 결과적으로 생계유지를 어렵게 하는 원인이 되고, 그리하여 결국 꿈꾸던 일을 그만두고 생계를 위한 다른 일을 찾아야 하는 상황에 내몰리기도 한다. 소위 조직 내 생활에는 쉽게 익숙해지지 않아서 어떤 사람들의 눈에는 비주류 감각의 소유자로 보일 수도 있을 그들이 조직에 대해 갖는 감각은. 따지자면 단단한 자기 확신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불안이나 고립감에 더 가까운 것이었다.
국가나 지역의 경계를 넘어 삶의 기반을 바꿔보려는 탈경계적 상상력 이 이전에 없었던 것이 아니다. 장강명의 장편소설 <한국이 싫어서>(2015)나 최은영의 단편소설 <아디치에서>(내게 무해한 사람, 2018) 등을 통해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기 위한 노마드 청춘의 면모를 이미 엿본 바 있다. 운명을 개척하거나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거창한 포부가 아니더라도 자신의 본래성을 상실한 채 무감각한 일상을 이어가는 삶을 끝내겠다는 의지가 청년들을 이곳 아닌 다른 어딘가로 떠나게 했다. 탈주가 마련한 공간이라고 해야 할,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유동적 상태가 소설 속 인물들 자신의 삶을 포함하여 우리가 사는 세계를 돌아보게 하는 시선을 열어주기도 했다. 지옥 같은 '헬조선'을 견딜 수 없어 '탈조선'을 하(고자 하)든 경계를 넘나드는 노마드의 삶을 꿈꾸든, 떠나기 전의 관계들과 떠난 후에 새롭게 만들어진 관계들이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재편되면서 그간의 세계가 숨기고 있던 다른 면모를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흥미롭게도 <그만두는 사람들>에 등장하는 청년들이 새롭게 시작하는 관계는 다른 곳에서 뿌리 내리려는 노력과는 별다른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가령, 혜리와 나의 관계는 과거로부터 지속된 관계도 새로 운 공간에서 시작된 예상 밖의 관계도 아니다. 스웨덴과 한국에서 그들 은 서로에게 "가까워질 수 없고 개입도 불가능하고 그저 듣기만 하는 사람”4)으로서의 관계를 지속해간다.
스웨덴에서 유학 중인 혜리가 어느 날 메일로 연락을 해온 것은 7년 전의 일이었다. 교양수업에서 조별 과제를 위해 단 한번 메일을 주고받은 나에게 아무런 이유도 없이 안부를 전하던 혜리에게 내가 답장을 하 기 시작한 것은 2년 전의 일이다. 혜리는 인종차별을 겪었으며 도움을 청할 한인 커뮤니티가 있지만 그 사회에 소속되고 싶지 않아, 친분이 있다고는 말하기 어려울 사람한테 혼잣말처럼 메일을 보낸다. 나 역시 문학계 권력 남용 문제를 이슈화하기 위한 포럼에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도구로 사용된다는 느낌에 저항하여, 그 모든 것을 다 발표문으로 작성하여 일종의 ‘내부고발자’가 된 이후로 일기를 쓰듯 일상의 기록을 안부처럼 이국의 혜리에게 전한다.
소설 속 그들은 소속감보다는 고립감이 낫다고 여기면서도, 엄습하는 고립감으로 무너져 내리던 끝에, 서로에게 뭔가를 부탁하게 되고 그 부탁을 들어주면서 외롭고 고독했던 삶에서 조금쯤 벗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고립감을 겪으며 그렇게 공존하는 경험을 한다. 그들의 경험을 두고 소속감에 대한 강렬한 거부로도 열망으로도 이해할 수 있겠지만, 그들의 삶이 이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채로 여전한 고립감 속에 놓여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한 상황이 환기하는 것은 그들이 원하는 관계란 '서로 개입하지도 가까워지지도 않는' 정도의 거리가 유지되는 관계라는 사실이다. 단언컨대,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부대낌 없는 연결감이다. 그 연결감은 한편으로는 권위와 위계로 작동하는 관계방식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가능성을 갖는다. 그러나 대안이 될 수 있다 해도 '부대낌 없는' 연결감이란 철저한 고립감이 불러올 불안이나 공포에 대한 최소한의 방어책 이상의 의미를 갖기 어렵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친밀한 관계라는 이름에는 가 닿기 어려운 것이다.
3
부대낌 없는 연결감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이들은 어디에서 온 존재들인가. 부대낌 없는 연결감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은, 이들이 공동체에 대한 다른 상상에 기반해 있을 것임을 유추하게 한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잘라 말하기>에서 임솔아의 인물들의 관계를 둘러싼 부대낌은 혈연 가족보다는 동반자나 유사 가족 혹은 반려동물과 나눠지는 것에 가깝다. 물론 그것도, 자신을 내던지면서까지 지켜야 할 것들로 여기지는 않는다. 더 나은 주거 환경을 마련하는 일이 서울 도심에서 멀어지는 일이라면 임솔아의 인물들에게 그것은 "서울의 지인들과 맺은 관계를 포기하기만 하면 되"1(42쪽)는 비교적 간단한 일로 인식된다. 그들에게 관계란 나다움을 지키기 위해 취사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5)
<내가 아는 가장 밝은 세계>의 화자는 드물게 자신의 전공을 직업으로 갖게 된 사람으로, 작품을 쓰고 원고료와 인세로 생계를 유지하는 삶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내가 아는 가장 밝은 세계”는 다름 아닌 문학을 가리킨다.
글쓰기를 생업으로 삼는다면 벌이가 시원찮을 것이라는 자명한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었고, 그 사실이 나를 불편하게 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 정도는 자신이 있었다. 내 꿈은 나답게 소박했으므로 나는 그 꿈을 쉽게 이뤘다. 문학은 적어도 인간의 표정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좋아하고 흠모하면서 읽었던 많은 작품은 인간이 품은 진실이라거나 각자의 입장 같은 것을 끈질기게 탐구할 때에 빛을 밝혔다. 나는 이미 그런 빛에 매료되어 있었다. 내가 아는 가장 밝은 세계였다.6)
화자는 조직이나 공동체가 자신에게 강요하는 억지웃음을 거부할 수 있으며 자신의 '무표정'을 지킬 수 있는 힘이 정상성을 향해 부나방처럼 달려드는 삶을 거부한 데서 나온다고 믿는다. 하지만 사회가 강요하는 자아 변형을 단호히 거부하고 있다는 믿음과는 별개로, 화자는 부동산 상승세를 고려하면서 자신의 가치를 주택 청약 가점 점수로 환산해보거나 ‘청약’과 ‘낙태’라는 두 단어를 어렵지 않게 연결시켜 떠올려볼 수 있으며, 발을 다쳐 잘려 나간 발가락을 두고 가점을 고려하면서 장애인 등록증 발급을 시도할 수도 있는 요즘 청년이기도 하다.
그는 빌라를 짓기 위해 회사를 설립하고 분양이 종료되자마자 회사를 부도내는 방식으로 건물에 대한 모든 책임을 회피하는 시공사가 지은 집을 잘 알지 못한 채 계약했고, 누수나 결로에 대한 보수 절차를 제대로 받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음을 알게 되자, 누수로 곰팡이가 핀 보험금을 과잉으로 청구해서 외벽 공사를 한 후 잔액을 주민들에게 배분하는 꼼수를 주민들의 동의서를 받아내고 생활 간지를 덜어내어 모델하우스처럼 꾸며낸 집을 처분하는 데에도 성공한다. 타협하거나 비굴하게 구는 일, 남들을 비웃거나 속여 넘기는 일에 대한 단호한 거부의 제스처로서의 '무표정'을 자신의 대표 얼굴로 소설 전체에 결쳐 강조하고 있지만, 그 자신은 삶에서 필요에 따라 '억지웃음'을 선택하는 일에 영혼을 뒤흔드는 고심을 하지는 않는다.
종종예술가를 화자를 내세우는 임솔아의 소설은 그들을 지금 이곳의 청년들과는 다른 예외적인 존재들처럼 보이게도 한다. 가령, 박서영의 소설 <매달리는 인간>(2022)의 청년들처럼 공무원 준비를 위해 죽었다고 생각하고 버티는 삶 같은 선택은 하지 않으며, 공무원 시험에 연이어 실패한 이후로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그만두었던 회사로 다시 돌아가는 선택도 하지 않는다. 공무원을 준비를 하면서 꼬박 2년 가까운 일상을 공유했지만 "함께 지낸 시간이 무색하게" “연락을 하지 않"는 사이가 아무렇지도 않은 그런 관계들 속에서 이 모든 상황의 문제는 그저 매달리기만 하는 자신이 아닌지, '자신이 틀렸다'는 판단으로 다른 방법을 '스스로 찾아야 하는 것은 아닌지 그런 시간을 통과하면서 신체적으로 병들어가는7) 이 시대 청년과는 다른 존재들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한 착시에도 불구하고 임솔아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관계에 대한 태도는 신자유주의가 강요한 자아모형의 가장 전형적인 사례에서 조금도 벗어나 있지 않다. 그 태도는 한편으로 그들이 세계에 대한 변화에 아무런 관심도 없으며, 혹시 발생하는 문제들을 개인화하거나 사적으로 처리해야 할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말해준다. 느슨하게나마 자신이 속한 조직 혹은 조금 넓은 의미에서의 공동체가 개인에게 (일방적으로) 감정을 부여하거나 처리하게 하며 소속감과 고립감 사이의 균형을 유지 하는 일 또한 사적으로 처리해야 할 문제로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무드 경제라는 개념으로 감정과 심리 치료에 몰두하는 치료 자아의 등장에 주목한 사회학자 실바의 지적처럼, 신자유주의의 영향은 청년의 삶에 더욱 깊숙이 침윤되고 있다. 모두가 기업가의 정신으로 자신의 성공을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요청은 모든 관계를 사적인 것으로 재구성할 뿐 아니라 감정에 대한 책임까지를 떠맡게 한다. 유연 경제가 만들어내는 사회적 불확실성이 사회를 채우게 되면서, 삶을 채운 감정들을 규율하고 조절하는 방식의 치료를 통해 의미와 질서를 회복해나가게 되는 것 이다8) 아니 회복되어간다고 여기게 되는 것인데, 결과적으로 청년들은 치료 서사를 통해 사회가 아니라 개인의 변화에 몰두하게 된다. 청년들 은 연대 없는 세계, 안전망 없는 세계에서 성장하며, 타인과의 관계를 경 계하고 불신하게 되는 것이다.9)
임솔아의 인물들이 그만두고 있지만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말하기는 쉽지 않다. 떠났지만 떠났다고도 어딘가로 옮겨갔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이 머물러 있는 중간지대가 결코 다른 상상으로 이어질 수 있는 통로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때로 경계를 넘는 위반 행위만으로도 전복적 의미가 마련되기도 하지만, 경계를 허물어뜨리려는 노력을 동반하지 않는 경계 넘기는 중간 지대를 경계 지속을 위한 완충지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 중간지대는 역설적으로 경계를 강고하게 만들 수 있거나, 그것이 아니더라도 경계의 존재 근거로서 작동하게 될 수 있는 것이다.
4
공간적 의미에 좀더 집중하자면, 중간지대로 불러도 좋을 임시적인 상태는 청년들의 존재론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소속감이나 불안감의 형태로 등장하기도 하지만, 청년들의 임시적인 상태는 대개 주거 문제로서 가시화된다. 옥탑방, 반지하, 고시원이 청년들의 대표적인 주거 형태로서 등장했던 2000년대 중반 이후로 지금까지 주거 형태에서 그리 큰 변화는 없다. 집이 아니라 방의 형태로 된 임시적 거처는 소설적 주목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당연한 것이 되었다.
'영끌(영혼을 끌어 모아)' 로 내집을 마련하거나 미래에 대한 투자를 주식에 집중한다는 '빚투'나 '동학개미(운동)'에 대한 언급이 적지 않으며, 장류진의 <달까지 가자>(2021)에서도 다루어진 가상화폐 투자 성공기가 루머처럼 떠돌고 있지만, 공정 이슈에 불타오르고 코인에 과몰입한다는 전형적인 청년 세대는 출판계와 미디어가 만들어낸 가상적 존재일 가능성이 더 높다. 이러한 판타지 성격의 루머에 대한 교정 보다 앞서 언급되어야 할 문제는, 이를테면 수도권과의 격차 속에서 지방이 점차 소멸되는 상황,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차이가 지워지는 사정, '지잡대' 출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된 현실에 대한 것이 라고 해야 한다.10)
그보다 더 무겁게 다루어져야 할 것은 ‘전형적인’ 청년의 실제 여부라기보다 그것을 루머로 떠돌게 하는 힘이라고 해야 할, 그러한 담론의 밑바닥을 도도하게 흐르는, 돈의 논리로 압축되는 ‘행복의 약속’일 것이다. 근대적 현상으로서의 '행복'이 가진 약속의 속성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는 정동학자 사라 아메드의 사유를 빌려보자면, 이제 우리 사회에서 돈(자본)은 그것을 획득하기도 전에 이미 그 대상 때문에 행복해지리라 기대되는 ‘행복-원인’이 되었다11). 개별 청년이 신자유주의적 주체 모형을 수용하건 거부하건 돈을 향해서만 달려가든 아니든 '내 집 마련' 과 '주식 투자'에 영혼을 갈아 넣어야 한다는 시대적 명령으로부터 자유로운 청년은 더 이상 없다는 말이다.
신자유주의적 행복과 거리를 둔다는 것은, 말하자면 미래를 꿈꾸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유명 보험회사에서 사무 보조 아르바이트를 하는 중이고, 육 개월씩 두 번 계약을 한 후에는 같은 부서에서 일할 수 없다는 사규 때문에, 휴지기를 갖고 있는 송지현 소설 <삼십 분 속성 플라멩코>의 화자는 유동적 노동 환경과 부족한 자원에도 불안해하지 않는다.
나는 다시 눈에 보이는 것들만 생각하면서 살 수 있었다. 영수증을 붙이고 숫자를 입력하고, 회의실을 치우고, 나보다 연봉이 두세 배는 높은 정규직 직원들과 점심을 먹었다. 그들은 점심을 먹으며 불안에 대해 말했고 미래에 대해 말했다. 결혼 삼 년 차의 어떤 직원은 일 년간 노력했는데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며 울었고, 나보다 한 살 어린 회계팀 직원은 해외 세미나에 가지 못했다는 이유로 회식 때 술잔을 깨고는 상사에게 욕을 했다고 말했다. 다른 부서에서 사무 보조 아르바이트를 하는 아이는 야간대학에 진학했다고 했다.
-보험을 더 들었어.
누군가 식사를 마치며 말했다.12)
불안한 미래에는 아무 것도 걸지 않으며, “모두가 삶의 목표를 가지고 사는 것은 아니”며, “그저 현재의 상태에 만족하며 사는 사람도 있는 것”(153쪽)임을 순순히 인정하는 화자가 미더운 것은 다른 청년들과의 유비 속에서 자신의 삶을 우위에 놓지도 가치절하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 자신의 삶이 앞으로도 계속 과거를 답습할 것이라는 예감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는 고백을 피하지는 않지만, 미래를 꿈꾸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 끊임없이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하므로 미래에 가 닿지 못할까 봐 언제나 불안하고 때문에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늘 고민해야 하는 청년 세대와 달리 그는 미래나 열정이 자신에게 '없다'는 것의 의미를 가치로서 판단하지 않고 차이로서 받아들인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 소설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으며, 그저 그렇게 태어났을지도 모른다고 눙칠 뿐이다. 그럼에도 신자유주의형 주체 모형 바깥이 없는 시대임을 환기하자면, ‘행복의 약속’과의 거리는 그 약속의 말을 듣지 않거나 들리지 않는 것으로 만드는 중지 선언만으로도 마련되기 시작하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음악을 업으로 삼고 앨범을 냈지만 음악을 소개하는 매체를 통해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으며, 그것이 생계유지를 위한 직업이 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앞으로 음악을 계속해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송지현의 소설 <여름에 우리가 먹는 것>의 지방 출신 청년이 보여주듯, 성공을 향해 미래로 나아가야 하며 상처 받은 마음까지도 스스로 치유해야 한다는 요청과 의 절연이란 사실상 불가능한 것에 가깝다. 휴먼고시원에 머무르면서 혼잣말처럼 되물었던 "어떻습니까, 우리 모두 이곳을 임시로 거쳐 가는 것 이 맞겠지요"13)라는 말이 무심결에 노출했듯. '행복의 약속과의 거리두기 역시도 ' 행복의 약속'이라는 거대한 물결 위에서 만들어낸 작은 파도에 불과한 것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송지현의 소설은 성공과 실패로 판정되지 않는 귀향의 새로운 의미를 마련해보고자 한다. 엄밀하게는 소설을 더는 진전시키는 않는다. 새로운 의미의 길을 내기보다는 판단중지의 상태에서 멈춘다. "이미 떠나온 기분"(송지현, 37쪽)을 존중하며, 이후의 삶을 실을 풀어 다시 만들면 몇 번이고 다른 모양이 될 수 있는 뜨개질처럼 생각해보면 어떨지를 넌지시 전한다. 체제에 대한 저항은커녕 성공에 이르지 못한 채 귀환한 삶에 대한 어떤 위로로도 미흡하면서도, 이 모든 것에 가해지는 단하나의 가치척도와 그에 따른 판단을 정지시키려는 시도, 그것을 다른 청년의 기미로서 좀더 소중하게 여겨도 좋지 않을까.
5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2016년 맨부커 국제상을 수상한 이후로, 가깝게는 정보라 작가의 <저주토끼>가 부커상(Booker Prize) 최종 후보에 오른 이후로 전업 작가가 되는 일은 작가에게 들러붙어 있는 오래된 은유인 외롭고 궁핍한 삶과는 거리가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로 전세계에 휘몰아치고 있는 ‘K-’의 열풍을 타고 존재론적 비약을 가능하게 할 성공의 지름길로 떠오르고 있다. 박상영 작가의 <대도시 사랑법>이 올해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후보에 오르면서 그 가능성은 손끝을 저릿하게 하는 실감이 되고 있다.14) 봉준호 감독이 영화 <기생충>(2019)으로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과 미국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을 포함한 4개 부문을 수상하며 한국뿐 아니라 세계 영화사를 새롭게 썼고, 배우 윤여정과 송강호가 아카데미 연기상과 칸 국제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팬데믹을 거치며 급속도로 확장된 OTT 서비스에 기반한 K-드라마의 열풍이 이제 어리둥절하도록 특이한 사건이기만 한 것은 아니게 되었다.
그런데 세계적인 콘텐츠로서의 K-콘텐츠의 위상이 드높아진 저 특별한 사건들이 ‘예술하는’ 청년들을 고무시켰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예술을 업으로 삼고자 하는 청년들이 급격하게 늘어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2011년 고 최고은 작가 사건이 아니더라도, 예술은커녕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워 생을 마감한 청년들의 비극적 사연이 드문 경우가 아니다. 김초희 감독의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2020)나 신수원 감독의 영화 <오마주>(2021)와 같은 영화가 내비치듯, 그것은 생계마저 불가능한 삶을 정신 승리법으로 지속하는 일이거나 (로또 당첨과 같은) 기약 없는 행운을 거머쥐기 위해 현재를 미래에 제물로 바치는 삶에 가깝다. 예술인복지법에 대한 관심이 지속적으로 커지고 있는 것은 한국사회에서 예술가로 살아간다는 것이 개인적인 취향 선택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되었음을 말해준다.
아마도 여기서 예술이란 자본의 논리로는 이해될 수 없는 세계를 통칭하는 말에 가깝다고 해야 한다. 예술에 대한 열망에 꿈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이고자 하는 것은 그래서일 것이다. ‘꿈이라니, 감히 꿈이 있다고?’ 꿈의 실현은 미래를 꿈꾸는 청년들 가운데 아무에게나 허락되는 것이 아니다. 꿈의 실현은 말할 것도 없이 꿈꿀 수 있는 자격조차 정상궤도의 삶을 포기하(려)는 결단 즉 자신의 전부를 건 선택을 통해서나 간신히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꿈을 좇는 삶은 정상성의 트랙과는 거리가 있는 삶인 것이다. 신자유주의와 코로나 팬데믹을 통과한 지금 이곳에서는 생애 주기를 따라 흘러가듯 살아간다 해도 저절로 주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평범한 일상을 사는 것도 노력을 다해야 선취할 수도 있는 멀고 먼 고지가 되었다. 보통의 삶조차 최선을 다한 끝에 얻을 수 있는 ‘성공’이 되는 시대인 것이다.
임솔아의 청년들이 글을 쓰면서 사는 삶을 두고 꿈을 이루었다고 여기는 것도 따지자면 낯설게 여겨지지만, 급사한 유령 청년들이 죽어서도 꿈을 실현하거나 죽은 후에야 비로소 타인을 돌아보는 마음을 회복하게 되는 임선우 소설 속 청년들의 이야기도 마냥 따뜻하게 만은 읽히지 않는다. 데뷔도 못하고 소속사가 강요한 무리한 다이어트로 죽게 된 아이돌 지망생 유렁에게 데뷔 무대를 마련해주는 일을 죽어서도 품고 있는 간절한 마음으로 존중하는 태도에 대해서는 그로테스크하다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죽어서도 매달려야 하는 꿈이란 일면에서 신자유주의 시대의 성공을 위한 자기계발의 극단적 형태와 무관하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쩌면 꿈에 대한 강한 집념은 사회가 나눌 수 있는 여러 재화, 특히 소득을 어떻게 할당해야 하는지에 대한 관심, 말하자면 분배를 둘러싼 갈등을 사회의 지위 질서에 대한 문제인 인정의 문제로 바꿔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해야 한다. 15 한국사회에서 예술을 한다는 것은 꿈 을 선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그것은 소득 분배가 아니라 자 신의 존재를 존중받는 인정에 대한 분배에 질문을 던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지금지금 이 땅에서 예술하는 청년은 누구인가. 그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그들에게는 어떤 삶이 허용되는가.
상업영화 현장에 가야 했지만 가고 싶지 않았다. 현장에 가면 그래도 돈을 벌 수 있었지만, 글을 쓸 수 없었고, 글을 쓰지 못하면 내 작품을 만들 수 없었다. 내 작품을 만들지 못하면 감독이 될 수 없었다. 모순적이게도.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영화를 하면 안 되었다. 그리고, 내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돈과 시간이 필요했는데, 돈과 시간을 확보하는 데에는 과외만한 것이 없었다. 물론, 돈을 벌 수 있는 일이야 많았지만 돈을 버는 일을 하면 시간이 없었다. 돈을 벌 때, 나는 종종 내 노동력을 파는 게 아니라 내 시간을 팔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16)
서이제의 소설 <0%를 향하여>가 다루는 독립영화를 하(려고 하)는 청년들의 상황은 사실 다른 모든 '예술하는' 청년들의 상황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예술이 아니라 예술교육에 종사하면서, 영화감독인지 과외 선생인지, 아르바이트생인지, 그냥 백수인지 모를 상황을 이어가며, "때에 따라 상업 현장에서" 일하기도, "때에 따라 독림영화를 만들기도"(334쪽) 하는 사람들로 살아간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0%를 향하여>는 어쩌면 '그만두는 사람들'에 대한 기록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청년들은 그만두는 중인가. "영화. 아무래도 영화 같은 건 그만두는 게 좋을 것이다. 독립 같은 건 꿈도 꾸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미래가 없고 (•..중략...) 미래가 없고 (...중략...) 미래가 없다."(355쪽) 영화사를 돌아봐도 흥행이 권력인 현실 영화관을 둘러봐도 예술하는 청년들에게 미래는 없다. 그런데 미래는 없는가.
문학평론가 이광호는 <O%를 향하여>를 두고 "독립은 '유령의 시간'을 살아가는 시대착오의 열정이며, 이 기이한 열정 때문에 다른 미래는 지금 시작된”17)다고 단언한다. 이 평가에 매혹되면서도 나는 그'독립이 "내 목소리를 내고 싶어서"(346쪽) 시작된 것이라는 사실을 짚어 언급해두고 싶다. 이름도 모르는 할머니가 만든 영화를 보러 두 시간 가까이 지하철을 타고 가서, 아무런 맥락 없이 영화 속에서 “하고 싶은 말'을 하는 할머니를, 할머니의 영화를 들여다본다. "그저보고 싶은 것을 보고, 하고 싶은 말을"(354쪽) 하는 할머니를. 할머니의 영화를 보면서 화자가 떠올린 것은 ‘하고 싶은 말’ 아니 '영화' 그리고 ‘독립’이 아니었을까. 그 '독립'이 무엇을 대립항으로 두는 '독립'인지는 알수 없어도 '하고 싶은 말'을 포기하기 않으려는 안간힘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그 힘의 크기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말할 수 있는 게 없지만. 그럼에도 그것을 <숲은 생각한다>의 저자인 에두아르도 콘이 인류학자인 가산 하게(Ghassan Hage)가 말한 "또 하나의 정치(ater-politics)”라는 말로 가리켜 언급했던 정치. 현행 시스템에 대한 반대나 비판은 아니지만 또다른 존재 방식에 주목함으로써 생겨나는 정치이자, 다른 부류의 살아있는 존재들을 포함하는 정치18)에 가깝지 않은가에 대해서는 덧붙어서 말해둔다.
1) 한 문화인류학자의 지적처럼 지금 이곳에는 다양한 행위자들이 연결, 단절, 교차하는 청년-어셈블리지(Assemblege)가 있을 뿐으로, 청년에 대해 무언가를 말할 수 있다 해도 그것은 일시적 이고 부분적인 것에 불과한 것이다. 조문영, ‘청년은 없다’, <문학동네> 2022년 여름호.
2) 저술의 형태뿐 아니라 논문이나 비평, 좌담의 형태로도 적지 않은 논의가 지속되고 있다. 이은지, ‘계급갈등이라는 불가능한 재현- 386세대 책임론에 부쳐’, <실천문학> 134, 2019: 이 혜진. ‘‘우울 에세이’의 전성시대-청년 우울의 현상학’, <한국문예비평연구>, 74, 2022: 강양 구•서동욱•전상진•최종렬, ‘청년, 사회를 비추는 무서운 거울’, <철학과현실> 132, 2022: 구 자준, ‘혐오는 어떻게 공정의 언어로 발화되는가-'청년 세대 남성'의 자기 서사와 그 의미’, <문학동네> 2022년 여름호.
3) Nangy Fraser, 김성준 역, <낡은 것은 가고 새것은 아직 오지 않은>, 책세상, 2021
4) 임솔아, ‘그만두는 사람들’, <아무것도 아니라고 잘라 말하기>, 문학과지성사, 2021, 19쪽.
5) 그러나 사실 관계의 상실은 현실에 간신히 매달리듯 사느라 좁아져서 다른 누구도 세울 수 없어진 상태인 불가피한 것이기도 하다. 가렁, 한때는 자신이 스스로에게 자랑이었던 임선우 소설 <커튼콜, 연장전, 라스트 팡>의 화자를 떠올려볼 수 있다. "그러나 지난 2년간 취업에 실패 하면서 내 세계는 점점 좁아졌다. 좁아진 땅에 애인과 친구들이 서 있을 자리는 없었다. 나는 제대로 된 인사조차 없이 그들을 떠나보냈다. 안정된 주거가 사라졌고 균형 잡힌 식단이 사라졌다. 사라지는 것조차도 갈수록 보잘 것 없어져서 나중에는 머리숱과 규칙적인 생기 주기, 주말 아침마다 보던 영화와 응원하던 야구팀이 사라졌다."(<유령의 마음으로>, 민음사, 2022, 242쪽) 급사를 한 후 유렁이 되고 나서 누군가와의 급작스러운 헤어짐에 대한 아쉬움이나 슬픔을 느끼지 않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매달리고 버티는 삶이란 이미 죽어있는 상태와 다를 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6) 임솔아, <내가 아는 가장 밝은 세계>, 앞의 책, 142쪽.
7) 박서영, ‘매달리는 인간’, <웹진비유>, 2022.3.
8) Jennifer Siva, 문현아• 박준구 역. <커밍업쇼트>, 리시올, 2020, 49~55쪽.
9) 박준규, ‘치료적 자아를 통한 성장-'무드경제'와 한국사회’, <릿터? 31, 2021 8•9.
10) 오후. ‘성공 방정식이 사라진 시대의 도시 전설’, <릿터> 31, 2021.8•9, 27~28쪽.
11) Sara Ahmed, 성정혜 이경란 역, <행복의 약속>, 후마니타스, 2021, 1장 참조.
12) 송지현, ‘삼십 분 속성 플라멩코’, <여름에 우리가 먹는 것>, 문학동네, 2021, 171~172쪽.
13) 송지현. ‘여름에 우리가 먹는 것’, <여름에 우리가 먹는 것>, 문학동네. 2021, 9~10쪽.
14) 김은형, ‘“박상영 부커상 지명 후 월드 투어하는 작가 됐어요”’, <한겨레>, 2022.7.25. 부커상 후보로 지정되고 나서 30개국에 판권이 팔렸고 드라마•영화화 제안이 늘고 있으며 해외 북 토크 일정이 늘어나 "월드 투어 하는 작가"가 되었다.
15) Nancy Fraser, 김성준 역, <낡은 것은 가고 새것은 아직 오지 않은>, 책세상, 2021. 17쪽.
16) 서이제, ‘0%를 향하여’, <0%를 향하여>, 문학과지성사, 2021.
17) 이광호 ‘필름의 종말과 ‘0%의 미래’’, 서이제. <0% 향하여> 해설, 문학과지성사. 2021, 367쪽.
18) Eduardo Kohn, 차은정 역, <숲은 생각한다>, 사월의 책, 2018, 34쪽.
소영현, 문학평론가. 한국문학 연구자. 저서로 <올빼미의 숲>, <하위의 시간>, <분열하는 감각들>, <프랑켄슈타인 프로젝트>, <문학청년의 탄생>, <부랑청년 전성시대>, 공저로 <#문학은 위험하다>, <비평 현장과 인문학 편성의 풍경들>, <문학사 이후의 문학사>, <감성사회>, <감정의 인문학> 등이 있다. yhso70@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