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포르마시옹

흔들리고 휘청이며 걷는 청년들

차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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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달라진 청년의 표상

오랫동안 청년은 젊음과 열정과 도전의 상징이었다. 물론 불안과 방황 역시 청년을 수식하는 또 다른 말들이었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과도기에 놓여 있지만 젊음을 소유하고 있는 만큼 많은 이들의 부러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우리의 경우 사회적으로나 문학적으로나 변혁의 시기에 종종 청년이 호명되곤 했다. 근대 초기에는 기독교에서 청년을 호명했고 한국의 현대사에서도 4.19, 5.18, 6.10 등 사회 변혁의 한복판에서 청년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곤 했다.

최근의 청년 담론은 MZ세대로 불리는 세대론에 갇히거나 '청년 정치' 라는 새로운 말의 조합으로 언론에 자주 노출되곤 한다. 지금의 청년 세대는 흔히 부모 세대보다 더 가난한 유일한 세대로 불리는데, 성장이 멈춘 시대의 특징이 오늘날의 청년 담론에도 점차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 대선의 곤혹스러운 결과를 마주하고 많은 이들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청년이 출현했음을 실감했을 것이다. 새로움과 변혁과 열정이 청년 세대를 규정하는 수식어였던 시절을 지나 불안과 우울과 절망과 '하지 않음'이 청년을 대변하는 시절이 시작된 셈이다. 이 사태를 어떻게 해석하고 돌파해야 할지 오늘의 기성세대는 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 과거와 같은 방식의 대안이 더 이상 대안이 되지 못함을 절감할 뿐이다.

이 글은 오늘날 우리를 곤혹스럽게 하는 청년이라는 실체와 그들이 구성하는 담론을 해석하려는 데 목적이 있지는 않다. 오늘날의 청년 세대를 어떻게 바라보고 해석해야 할지에 대해 질문과 고민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섣부른 진단을 시도하기에 앞서 시 작품에 나타난 청년을 살펴보는 방식으로 우회하고자 한다. 시가 여전히 오늘의 시대를 굴절된 방식으로나마 비춘다면 오늘의 시에 나타난 청년의 모습을 통해 우리를 곤혹스럽게 하는 오늘의 청년들과 진솔하게 마주하고 청년 담론의 돌파 가능성을 찾아보고자 한다.

먼저 청년 시인이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붙는 시인들에 대해 생각해 본다. 임화와 윤동주와 기형도. 활동 시기는 다르지만 이들을 청년 시인이라고 부르는 것에 이견은 많지 않을 듯하다. 청년 시기에 가지고 있던 개인적 방황과 시대적 고뇌가 이들의 시에 대표적으로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임화와 윤동주의 시에서는 식민지 청년으로 감내해야 하는 시대적 소명과 번민이, 기형도의 시에서도 1980년대라는 엄혹한 시대를 시인이자 기자로서 살아가야 했던 청년 시인의 절망과 우울이 포착된다. 이들의 시가 시대를 초월해서 여전히 오늘날의 청년 세대에게도 읽히고 그들 의 마음을 올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15~29세 정도의 연령을 청년의 범위에 해당되는 것으로 생각해 왔지만 최근에 와서는 15~34세까지로 기준을 넓히기도 했고 지방자치단체에 따라서는 더 범위를 넓히기도 해서 정해진 특정한 언렁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다. 연령 기준상 청년에 해당되지 않아도 정신적으로는 청년의 특징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어서 사실상 연렁을 기준으로 청년의 범위를 설정하는 것에 선뜻 동의가 되지는 않는다. 더구나 문학 에서 청년이라고 할 때는 연령 기준보다는 청년의 특징에 해당하는 요소를 공유하고 있는지가 더 중요하기도 하고 그마저도 시대에 따라 계속 기준이 변화해 왔으니 말이다. 이렇게 볼 때 청년이라는 말의 함의는 불확정적이고 복잡하다고 할 수 있다.

 

2. 청년에서 배제된 청년의 목소리

우리 문학사에서 청년은 중요한 국면마다 호명되곤 했는데 대개 청년의 열정이 요구되는 변혁 시기의 시대적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새로움에 대한 기대와 젊음에 수반되는 열정이 청년이라는 표상을 통해 발현되기를 희망한 것이겠다. 시인 스스로 청년을 소환하기도 했고 사후적으로 청년 시인으로 명명되기도 했다. 그런데 청년 담론에서도 유독 주목받지 못했던 청년의 목소리가 있었다. 여성 청년의 목소리가 그것이었는데 청년이라는 보편성에 '여성' 청년의 목소리는 묻히거나 배제되곤 했다.

근대 초기에 새로운 주체로 떠오른 신여성 시인들도 따지고 보면 새로 운 청년의 목소리를 담당한 셈이지만 이들은 사적인 스캔들로는 주목받았을지언정 시인으로서의 목소리나 이들이 냈던 발화의 내용은 진지한 주목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여성 시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창조> 동인으로도 활동한 타실 김명순의 경우가 대표적이었는데 근대 초기의 시단에서 충분히 주목받을 만한 목소리를 내 왔지만 요란한 스캔들과 비난의 대상으로 호명되었을 뿐 청년으로서의 김명순의 목소리에는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김명순은 급기야 ‘유언’이나 ‘저주’ 같은 시를 씀으로써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발화하는 여성 청년 시인으로서의 외로움을 드러낸다. 자신을 지독하게 학대한 "조선"을 향해 유언을 남기는 심정으로 "이 사나운 곳아 사나운 곳아"(‘유언’)라고 절규함으로써 말이다.

1980년대 노동시가 한참 주목받던 시절 여성 청년 노동자의 목소리를 낸 정명자와 최명자 시인이 있었지만 이들의 목소리는 노동자 시인의 목소리로도 청년의 목소리로도 주목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1970년대 노동 현실을 핍진하게 그린 정명자와 최명자는 1985년에 각각 <동지여 가슴 맞대고>, <우리들 소원>이라는 시집을 출간하며 동일방직노조 사건의 현장을 생생하게 그려내거나 잊지 못할 1978년 2월 21일, 버스 안내원 노동자로서 체감하는 열악한 노동 현실과 감정 노동을 생생히 그려냈지만(‘코’) 이들의 목소리는 노동시가 가장 시단에서 주목받던 시절에도 제대로 들리지 못했다.

한국 현대 시사에서 독보적인 시인으로 자리 잡은 허수경의 경우도 다르지 않았다. 허수경의 첫 시집 <슬픔만 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1988)는 절절한 진주 방언, '주모적 여성성' 등으로 주목받았을 뿐 1980년대를 온몸으로 살아간 청년 시인으로서의 허수경의 목소리는 당시에 주목받지 못했다. 경상대 국문과를 나온 허수경은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세대가 대체로 그랬듯이 학생운동을 하며 기성세대와 갈등한 당시 청년 시인의 목소리를 첫 시집에서 드러냈고 '대학생' 여성 시인의 목소리를 진솔하게 표출했다는 점에서 당시로서는 충분히 새로운 목소리를 지니고 있었음에도 그런 관점에서는 전혀 주목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허수경의 첫 시집 4부 에서 주로 그려진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의 시인이 전쟁을 겪은 부모 세대 와 갈등하는 상황은 당시 대학생들에게는 매우 보편적인 상황이었다. 허수경의 시는 1980년대 대학생 청년들이 겪은 세대 갈등과 시대적 요구 앞에서 고뇌하는 모습을 솔직하게 보여주었지만, 허수경의 목소리는 ‘토속성’으로 주목받거나 '모성'이나 '주모' 같은 수식어로 해석되곤 했다.

비슷한 시기에 첫 시집을 출간한 김경미 시인의 경우도 다르지 않았다. <쓰다 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1989)는 당시 젊은 여성 독자들에게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켰지만 '청년'을 대변하는 목소리로 해석되지는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젠더 감수성의 차이로 인한 것이기도 했겠으나 서성이고 방황하며 성장하는 청년들은 어쩌면 오랫동안 '청년'의 목소리 에서 배제되어 왔던 것은 아닌가 싶다. 시에서 청년을 호명할 때 기대하는 목소리가 당시에 있었고 그것에 부합하지 않는 목소리는 '청년'의 목소리일지언정 청년의 것으로 호명되지 않았던 셈이다.

2000년대 이후 활발히 활동해 온 신해욱의 목소리는 어떠한가. 사회에서 요구하는 기성세대의 모습에 쉽사리 편입되지 못하고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겉돌며 자기 세계를 구축해 온 신해욱의 목소리는 ‘비성년 주체’의 목소리로 종중 호명되어 왔지만 2000년대 이후를 살아가는 청년 주체를 대 변하는 목소리로도 해석 가능하다. 이른바 '아웃사이더' 청년의 목소리가 신해욱 식 상상의 옷을 입고 '비성년 주체'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겠다.

 

3. 비정규직 청년의 사랑과 슬픔

2010년대 이후 청년 세대의 목소리가 반향을 일으킨 경우로는 2013년 '안녕들하십니까' 릴레이 대자보 사건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이대로는 우리 사회가 결코 안녕하지 못할 것임을 예견한 청년 주체가 안녕하지 못한 사회를 향해 집단 경고등을 켠 사건이기도 했다. 청년들의 성찰의 목소리가 대학가를 중심으로 퍼져 나갔고 이듬해 벌어진 세월호 참사는 우리 사회의 시스템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를 사회 전반으로 확장해 나가는 슬픔의 동력이 되었다.

비록 지금 암담한 현재를 살아가고 있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청년의 살아 있는 목소리가 우리들의 마음에 울려 퍼지고 사회 변혁을 추동하는 일이 일어났었다. 그러면 이들은 모두 청년에서 이탈하거나 사라진 것일까? 청년의 목소리가 보수적이 되었다는 진단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진실의 전부도 아니다. 자본의 힘이 더 거세지거나 실리 추구를 목적으로 움직이는 일은 비단 청년 세대에 한정된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런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한 책임은 권력을 지닌 기성세대에게 있음을 먼저 숙고해야 한다. 그뿐만 아니다. 여전히 매주 수요일이면 수요 시위에 앞장서는 청년들이 있고 고소 고발을 당하면서도 감내하며 '소녀상 지킴이'를 자임하는 청년들도 있다. 미래의 청년들도 그 현장에는 언제나 함께하고 있다. 정치권과 언론의 이슈몰이에 선동되어 청년을 대표하는 자리에서 우리가 그들을 지워버린 것은 아닐까. 정치적으로 청년을 이용한 지난 대선의 프레임 속에서 여전히 청년의 자리를 지키며 목소리를 내고 있는 청년들이 또다시 배제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소수의 목소리일 뿐이라고 누군가는 말할 수도 있지만 역사를 움직여 온 작은 불씨는 사실상 소수의 목소리로부터 시작되곤 했다.

이런 맥락에서 '비정규직 노동자'이자 90년대생 청년 세대의 목소리를 지속적으로 발화해 온 최지인 시에 좀 더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최 지인은 첫 시집 <벽에 붙어 잤다>에서부터 '비정규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청년 세대의 일상에서 유발되는 슬픔과 유전되는 가난, 죽음 가까이 있는 삶에 대해 노래해 왔다. 올해 출간된 두 번째 시집 <일하고 일하고 사랑을 하고>의 세계는 그 연장선에 있으면서도 좀 더 무르익은 목소리로 가난한 비정규직 청년 세대의 일과 사랑을 담담히 그려낸다.

 

회사 생활이 힘들다고 우는 너에게 그만두라는 말은 하지 못하고 이젠 어떻게 살아야 하나 고민했다 까무룩 잠이 들었는데 우리에게 의지가 없다는 게 계속 일할 의지 계속 살아갈 의지가 없다는 게 슬펐다. 그럴 때마다 서로의 등을 쓰다듬으며 먹고살 궁리 같은 건 흘려보냈다

어떤 사랑은 마른 수건으로 머리카락의 물기를 털어내는 늦은 밤이고 아픈 등을 주무르면 거기 말고 하며 뒤척이는 늦은 밤이다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룬 것은 고작 설거지 따위었다 그사이 곰팡이가 슬었고 주말 동안 개수대에 쌓인 컵과 그릇 들을 씻어 정리했다

-최지인, ‘기다리는 사람’(<일하고 일하고 사랑을 하고>, 창비, 2022) 부분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으로 인해 괴로움을 겪는 일은 청년 세대가 흔히 마주하는 현실이다. 공정이라는 가치를 배우고 시민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갈 권리와 의무를 배운 오늘의 청년 세대가 마주한 현실도 막막하기는 매한가지다.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루는 자유라도 있던 시절도 있었지만 가난한 비정규직 청년 세대에게 허락되는 것은 "고작 설거지"를 미룰 자유 정도다. 저성장 시대를 살아가는 가난한 청년 세대는 안다. 열심히 일하면 세상이 나아질 거리는 꿈을 더 이상 꿀 수 없다는 것을. "회사 생활이 힘들다고 우는 너에게" 빈말이라도 "그만두라는 말은 하지 못하고 이젠 어떻게 살아야 하나 고민"하는 것이 가난한 청년들이 놓인 현실이다. 무엇보다도 이들을 절망케 하는 것은 "우리에게 의지가 없다는" 것이다. “계속 일할 의지 계속 살아갈 의지가 없”는 이들은 이미 늙어버린 몸을 가지고 있는 청년들이다. "가만히 누워 손과 발이 따듯해지길 기다"리는 일밖에 의지를 가지고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하기 힘들어진 청년들의 일상과 사유와 감정을 최지인의 시는 핍진하게 그린다.

 

대기 발령 중인 친구는

잠이 오지 않는다며 물류센터에 나가 일했다

거대한 컨베이어 벨트 앞에 서서

물건들을 분류했다

 

나는 곧 잘릴 것이다

해야 할 일을 완수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라질 것이다

더 이상 슬픔은 없다

 

그동안 무얼 했는데?

 

사실 저는 일 말고 다른 것을 좋아했습니다

 

무대에 선 친구가 기타를 치며 노래했다

 

유명해지거나

가난해지거나

우리에겐 선택지가 없네

너희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겠지

하루 열여섯 시간

여섯 명의 몫을 하기에 우리는

벌써 늙어버렸네

 

일하고

일하고

사랑을 하고

끝끝내

살아간다는 것을 들것에 실려 나가기 전에

-최지인, ‘컨베이어’(<일하고 일하고 사랑을 하고>, 창비, 2022) 부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어느새 삼십대가 되었다는 생각에 최지인 시의 주체는 괴로워하는데 사실 누구보다 열심 히“일하고 / 일하고 / 사랑을" 해 왔지만 다만 그 결과와 가치를 충분히 인정받지 못했을 뿐이다. "대기 발렁 중"인데도 "잠이 오지 않는다며 물류 센터에 나가" "거대한 컨베이어 벨트 앞에 / 서서 / 물 건을 분류"하는 일을 할 정도로 이들은 열심히 살고 있다. 그리고 자신들이 거대한 컨베이어벨트에서 돌아가는 물건들과 다를 바 없는 신세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곧 잘릴 것이"고 "사라 질 것"임을 아는 최지인 시의 주체는 "하루 열여섯 시간 / 여섯 명의 몫 을 하기에" 자신들이 “벌써 늙어버”렸다고 고백한다. 여름을 제대로 누 려 보기도 전에 겨울 앞에 선 비정규직 청년들.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반대하는 건 정규직이라는 사실”도 그들은 이미 알고 있다. 사람들이 하고 싶어하지 않는 일은 "보상이 적다는 사실"도 "한번 일자리를 잃은 이는 계속해서 자리를 잃게 될 거리는 사실"도.

그럼에도 오늘의 청년 세대의 목소리를 대표해 최지인 시의 주체는 말한다. "사실 저는 일 말고 다른 것을 좋아했습니다"라고. 그것이 “그동안 무얼 했는데?”라는 다소 무례해 보이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과 구조와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최지인이 그리는 청년 세대는 이미 늙어버린 몸을 하고 있으면서도 기성세대가 청년 시절 저항해 왔던 방식으로 저항하거나 다 포기하고 주저앉아 버리지 않는다. 오히려 당당하게 "사실 저는 일 말고 다른 것을 좋아했"다고 말하며 좋아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우리는 죽지 말자 제발 / 살아 있자"는 전언 또한 청년 세대에게 건네는 말 이자 자기 자신에게 건네는 말이다. 한 수 가르치려 드는 기성세대의 목소리에 맞서 "우리는 장황하게 말할 것이다 계속 / 여러 명의 목소리로 떠드는 걸 / 멈추지 않을 것이다"(‘제대로 살고 있음’)라고 최지인 시의 주체는 선언한다. 제대로 살고 있다고 당당히 말하는 이 새로운 청년의 목소리 는 신뢰를 준다.

 

4. 여름의 청년들

최근 젊은 시인들의 시에 나타난 청년들의 목소리를 듣다 보면 불확실 한 미래에 대한 불안도 느껴지지만 관계에서 오는 소통의 어려움과 슬픔, 사랑의 어긋남에서 오는 불안과 균열의 감정이 종종 발견된다. 숱한 시행착오를 겪으며 타인과 관계 맺는 법을 배우고 자주 실패하고 넘어 지며 때론 폭풍 같은 사랑에 빠지기도 하면서 저마다 존재의 무게를 짊어진 채 오늘의 청년들도 살아간다. 여름의 한복판을 지났거나 통과하고 있는 청년들. 너무 뜨겁거나 습한 여름을 지나며 끓어오르거나 습기를 머금은 채 한 시설을 살아가고 있는 청년들과 마주치게 된다.

 

나를 번역할 수 있다면 뜨거운 여름일 것이다

꽃가지 꺾어 창백한 입술에 수분하면 교실을 뒤덮는 꽃

꺼지라며 뺨 때리고 미안하다며 멀리 계절을 던질 때

외로운 날씨 위로 떨어져 지금껏 펑펑 우는 나무들

천천히 지구가 돌고 오늘은 이곳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단 한 번 사랑한 적 있지만 다시는 없을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일과 너의 종교와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몇 평의 바닷가와 마지막 축제를 되감을 때마다

나는 모든 것에게 거리를 느끼기 시작한다

 

누군가 학교에 불이 났다고 외칠 땐 벤치에 앉아 손을 잡고 있었다

운명이 정말 예뻐서 서로의 벚꽃을 떨어뜨린다

 

저물어가는 여름밤이자 안녕이었다, 울지 않을 것이다

-최백규, ‘네가 울어서 꽃은 진다’(<네가 울어서 꽃은 진다>, 창비, 2022) 전문

 

"나를 번역할 수 있다면 뜨거운 여름일 것"이라고 고백한 시인에게 여름은 "단 한 번 사랑한 적 있지만 다시는 없을 것"이라고 할 만큼 열정적인 사랑 그 자체이다. "사랑이 사랑도 아닐 때까지 사랑을"(‘열대야’). 하는 최백규 시의 주체는 온몸이 다 타서 사라져 버리도록 작열하는 열기를 품고 있다는 점에서 보기 드문 순수함을 지니고 있다.

뜨거운 여름처럼 열정이 넘치는 사랑은 온통 꽃으로 “교실을 뒤덮"기도 하고 싸움과 사과를 반복하기도 하 고 외로움 속에 몸부림치며 펑펑 울기도 한다. 사랑에 빠진 연인들은 "이곳으로부터 멀어지고" "모든 것에게 거리를 느끼기 시작한다". "학교에 불이 났다”는 외침조차 사랑에 빠진 연인을 떼어놓지 못한다. 어쩌면 불은 이들의 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마침내 "운명이 정말 예뻐서 서로의 벚꽃을 떨어뜨"리 는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만다. 여름밤이 저물듯 그들의 사랑도 언젠가는 저물겠지만 "울지 않을 것" 이라는 시적 주체의 다짐은 보기 드물게 순수해서 더욱 낭만적이다. 마치 네가 울어서 꽃은 진다는 시의 제목처럼.

 

문을 열어두고

밖을 향해 앉은 채로

한낮의 빛 가운데에서

그는 무언가 중얼거리고 있었다

바로 알아듣기는 어려웠으나

그는 등을 돌린 채로

나에게 말을

남기고 있었고

나는 그가 또다시 사라질 것이라는 걸

이해하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중략...)

깨어나니 내가 살아 있었다

혼자 남아서

그가 일부러 남겨둔 적 없는 슬픔을 뒤늦게 이해하는 데에 그 모든 빛이 내게

소용될 것이었다

-윤은성, ‘유월의 숨’(<주소를 쥐고>, 문학과지성사, 2021) 부분

 

윤은성의 시에서도 여름은 "우리가 있었"던 사랑의 계절이자 상처의 계절로 등장한다. "열차는 여름내 정차해 있었"고"피차 무의미한 언쟁"이 계속되는 속에서 우리는 "누구도 필요로 하지 않"는 "짐 속에 남아 있던 녹슨 관악기"처럼 "더욱 무심해지고" "오래 함께 멈춘 애인”이 되어 서로를 상처 입혔다. 윤은성 시의 주체에게 여름은 옷에 밴 "습기"와 손에 밴 "쇠냄새"(‘우리가 있었고, 여름’)로 각인 된 상처의 계절이다.

깨어진 관계는 윤은성의 시에서 "등을 돌린 채로" 있거나 바깥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으로 종중 나타난다. 앞선 경험으로 인해 '나'는 "그가 또다시 사라질 것이라는 걸 / 이해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이해할 수 없었다". "조금 더 들으려고" "눈을 뜨고 그의 등을 만지려고" "나의 말을 하려고 / 외치고 속삭이려고 / 집중"하며 관계 개선과 상황 타개를 위한 '나의 눈물겨운 노력이 계속된다. 그러다 "한낮 / 그 빛" 속에서 "깨어나니 내가 살아 있었다". 혼자 남은 '나'는 "그가 일부리 남겨둔 적 없는 슬픔을 / 뒤늦게 이해하는 데에" "그 모든 빛" 을 쓸 것임을 직감한다. 윤은성의 시에서 어긋나고 깨어진 관계는 일방적인 상처만을 남기고 끝나지는 않는다. 비록 뒤늦은 이해일망정 윤은성 시의 주체는, 결국은 모르게 될 것임을 알면서도 조금이라도 더 그를 이해하려고 애쓰고 그 빛과 공기와 숨을 기억하고자 한다. 사랑하는 대상 뿐 아니라 낯선 이들이 이루는 공동체를 향해서도 시인의 다정하고 조심스러운 공들임의 시간은 지속된다. 비록 실패가 예정되어 있다 해도 그것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최선을 다했어요.

 

언제쯤 그런 말을 다 할 수 있을까요

여전히 나는 나 자신을 미워하고 꾸짖고 구박하는 여름 속의 나인데요

 

최선을 다했잖아요.

 

오랫동안 마음에 두었던 사랑을 떠올리면 들렸어요

나를 멈춰 서게 하는 목소리

-최지은, ‘너 홀로 걷는 여름에’(<봄밤이 끝나가요, 때마침 시는 너무 짧고요>, 창비, 2021) 부분

 

최지은에게 여름은 "나 자신을 미워하고 꾸짖고 구박하"게 되는 자책의 시간이 자상처의 계절이면서 동시에 "나를 멈춰 서게 하는 사랑"이 속해 있는 계절이기도 하다. "멍해지는 여름"을 수도 없이 지나며 시의 주체는 "최선을 다했"고, “만지지 않고도 손결을 느끼고 / 말하지 않고도 대화가 이어지던 그 밤”을 지나며 비로소 "최선을 다했잖아요"라고 “처음으로 소리 내어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의 창으로 오늘의 날씨를 맞이하며 / 내일의 시를 위해 오늘은 오늘의 시를 쓰기로 하”면서, 여름을 사랑의 이름으로 다시 쓰는 최지은의 시를 읽으며 독자들 또한 "최선을 다했잖아요"라는 말에서 위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최지은이 건네는 말은 지독한 여름을 홀로 걷고 있는 청년들에게 손을 내밀며 계속 걸어갈 수 있는 용기를 준다.

 

5. 휘청이더라도 살아가기를

최지인, 최백규, 윤은성, 최지은의 시에 나타난 청년들은 여름의 시간을 통과하고 있다. 때로는 폭염이, 때로는 장마와 눅눅한 습기가 침범해 오는 계절이지만 이 여름 청년들은 상처 입으면서도 온 마음을 다해 사랑을 하고, 흔들리고 휘청이면서도 주저앉지 않고 용기 내어 한 발 내디딜 줄 안다. 무엇보다 바깥의 기준에 쉽게 휘둘리지 않고 최선을 다해 귀 기울여 들으려고 하는 사랑의 태도는 이들이 그려갈 청년의 목소리에 우리가 귀 기울여야 할 이유를 제공해 준다.

지면의 제약으로 인해 최근 시에 나타난 청년 표상을 이 글에서 충분히 다루지는 못했다. 청년이라는 표상으로는 포섭되지 않는 바깥의 목소리도 주목해 보고 싶었으나 이 글의 몫은 아닌 것 같다. 마지막으로 다양한 모습과 목소리로 오늘을 살아가는 청년을 향해 오늘의 시가 전하는 전언을 옮겨 본다. 흔들리고 휘청이더라도 죽지 말고 제발 살아 있자고. 살아가자고. 그것은 오늘의 청년을 향한 발화이자 청년들의 발화이다.

 

이경수, 문학평론가. 중앙대 교수, 저서로 <불온한 상상의 축제>, <바벨의 후예들 폐허를 걷다>, <춤추는 그림자>, <이후의 시>, <너는 너를 지나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다시 읽는 백석 시>(공저), <백석 시를 읽는 시간>, <아직 오지 않은 시>(공저) 등. <문학인> 편집위원. philasoo@hanmail.net


이 기사는 공공 데이터와 언론 보도를 바탕으로 재구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