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포르마시옹

구직-해직의 사이클(cycle)과 연작소설(short story cycle)

김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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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와 내러티브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사회는 영혼들의 이야기로 들끓었다. 부동산시세와 금리 지수를 밤하늘의 별 삼아 영혼까지 담보 잡은 모험담들. 그것은 우리 시대의 대서사시… 그런 줄 알았다. 그러나 거인이 한 걸음(giant step)을 떼자 별처럼 빛나던 각종 수치들은 도리어 영혼을 옭죄기 시작했다. 이 차트와 저 차트를 오가며 내 집 장만과 결혼과 재생산의 마스터 내러티브(master narrative)를 꿈꾸던 영혼들은 이제 결박된 제 자신을 위해 스스로를 착취해야 하는 덫에 빠져 있다. 차트 위에 오르내리는 그래프는 애초부터 가난한 영혼들을 위한 길잡이별이 아니었다. 차트를 자신의 인생 스토리로 끌어 오려 했던 영혼의 도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차트는 다른 누구의 서사도 아닌, 그 자체로 갱신되는 자본의 자기서사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 즈음 코인 열차를 타고 <달까지 가자>(창비, 2021)라는 신화적 상상력도 횡행했던 듯하다. 그래프의 '떡상'과 '떡락' 구간에 무수한 이야기들이 탄생했다. 한국문학 또한 그 이야기의 대열에 참가했는데, 비공채로 입사한 세 명의 '무난'들 암호 화폐를 통해 미래의 전망을 그는 소설이다. 이들은 '무릎에서 사서 어깨에서 팔라'는 금언을 성실히 수행하여, 인생 역전부터 소소한 반전까지 평범한 회사원으로서는 꿈꿀 수 없는 미래를 움켜쥐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이 연월도사의 점괘에 의지하여 하락세 구간을 초현실적 능력으로 버텨내고 있을 때, '코인 게시판에는 무수한 영혼들이 깨어진 살림살이를 파국의 '인증샷으로 제출하며 암호화폐 시세 그래프 위의 하나의 점으로 소멸해갔다. 기실 <달까지 가자>가 출간되고 유통되던 시점에는 이미 암화폐의 성공신화도 시들해질 무렵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달달하게’ 읽힌 건 차트의 기승전결을 자신의 이야기로 만들 수 있을 거라는 모종의 기대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와 돌이켜 보건대, <달까지 가자>는 인생 역전의 완결된 장편 소설이 아니라, 장대하게 지속되는 차트의 한 구간일 뿐이었다. 오늘도 차트는 끝나지 않는 지옥의 내러티브를 쓰고 있다.

내러티브 경제학은 사람들 사이에 바이러스처럼 확산된 이야기가 경제 사건을 촉발하는 계기가 된다고 말한다. 갭투자 성공기나 부자 아빠의 투자기 같은 경제 내러티브는 다른 사람들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고, 이것이 확산되면서 경제 전반의 어떤 사건이나 흐름을 발생시킨다는 것이다. 경제적 사건으로부터 내러티브가 만들어진다는 통념을 뒤집어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는 내러티브로 인하여 경제적 사건이 촉발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논의의 전환은 임금률과 세율, 금리 등 경제 데이터에 반하여 나타나는 이례적 사건들을 설명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런데 사람들의 행동, 곧 개인의 내러티브로부터 거대한 경제 현상을 설명하는 논리는 왠지 우리 각자의 삶이 경제 차트의 굴곡을 그려내는 무수한 하나의 '점'으로 수렴된다고 돌려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니까 대하장편 서사를 쓰고 있는 것은 차트이고, 우리의 삶은 그래프의 갱신을 위한 숙주가 아니냐는 의심이 생긴다. 과연 이 시대에 평범한 사람들의 장편 서사라는 것은 가능한가

 

비정규직의 시간은 쌓이지 않는다

이기호의 <눈감지 마라>(마음산책, 2022)는 지방대를 졸업하고 각종 아르바이트를 전전하고 있는 박정용과 전진만의 이야기다. 두 청년은 그다지 얻은 것도 없이 대출금만 떠안은 채 대학을 졸업하였다. 그리고 이제 막 기숙사에서 나와 월세 삼십만 원의 반지하 원룸으로 옮긴 참이다. 이 소설은 삼백여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을 할애하여 정용과 진만의 졸업 후 삼 년, 곧 이들이 스물여섯 살에서 스물아홉 살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을 다룬다.

한눈팔지 않고 두 청년의 일상과 노동, 그리고 주변인과의 관계에 집중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이 소설은 왜 '장편소설'이 아니라 마흔아홉 개의 '연작 짧은 소설'을 표방하고 있는 것일까. 이는 일차적으로 일간지에 연재한 소설이라는 태생적인 조건에 기인할 것이다. 그러나 소설에는 그것으로만 환원되지 않는 주제적 차원의 문제 또한 도사리고 있다. 왜 지방 청년 서사 혹은 비정규직 서사는 장편소설이 되지 못하는가.

우선 <눈감지 마라>에는 사건의 연쇄를 통한 이야기의 진행이 나타나지 않는다. 물론 소설의 인물들은 끊임없이 구직을 하고, 새로운 일에 적응하고, 잘리거나 그만두고, 또 구직을 한다. 출장 뷔페 서빙, 택배 상·하차 작업, 고속도로 휴게소 단기 판매원, 편의점 점원, 식당 설거지, 출장판촉 영업 등 이들은 무수한 직업을 거친다. 그러나 이전의 직업은 다음의 직업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직업 활동에 있어 이들의 경험은 계속해서 단절된다. 무수한 알바는 이력서에 단 한 줄의 '경력'으로도 자리 잡지 못하고, 다음 직업의 시급에도 반영되지 못한다. "그의 이력서엔 대학 졸업 외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거기에 삼계탕집 설거지 아르바이트와 택배 상하차 아르바이트를 써넣을 순 없었으니까.…….”(187쪽) 경험은 연쇄되지 않고, 따라서 의미를 발생시키지도 않는다. 그저 하루하루의 일과로 낱낱이 분절되어 있다. 심지어 지난날의 경험은 통장 잔고에도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그러니까 알바의 시간은 흘러갈 뿐, '쌓이지 않는다.

 

정용은 남자가 건넨 캔 커피를 따 한 모금 마셨다. 남자는 정용과 비슷한 또래처럼 보였다. 바이러스가 침투하지 못하는 견고한 직장인, 지금 시간 말고 지금까지 쌓아온 나머지 시간으로 급여가 결정되는 삶이란 무엇일까? 정용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런 일을 해본 적이 없었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캔 커피를 마시고 있었지만, 정용과 남자의 시간의 크기는 엄연히 달라 보였다.

-214쪽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정용은 직장인처럼 보이는 또래 남자를 보고 "지금 시간 말고, 지금까지 쌓아온 나머지 시간으로 급여가 결정되는 삶에 처음 생각해 보게 된다. 그런데 이 장면은 거꾸로 비정규직 혹은 단기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정용의 삶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노동의 가치를 '시급', 다시 말해 '지금 시간'으로만 계측한다는 것은 이전의 경험을 계속해서 무화한다는 뜻이다. 이기호는 ‘작가의 말’에서 “지난 5년 동안 소설 속 두 인물, '전진만'과 '박정용'의 뒤를 부지런히 쫓아다녔는데, 지나고 보니 내가 기록한 것은 그 친구들이 아닌, 그 친구들의 ‘흐르는’ 시간뿐이었던 것 같다. 나는 겨우 그것만 할 수 있었다. (…중략…) 그러니까 내가 놓친 것은 시간이란 ‘흐르는 것’만이 아닌, '쌓이는 것'이라는 사실이었다"(318쪽)라고 다소 자기비판적인 평가를 남겼다. 그러나 이는 작가의 부덕이라기보다, 소설 속 인물들이 처한 삶의 조건에 기인한다. 그들을 둘러싼 노동력 시장 자체가 삶의 시간을 쌓을 수 없도록 한다.

이와 같은 조건 속에서 청년의 삶은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않는다. 진만은 자신의 생일날 어머니에게 다음과 같은 부치지 못할 편지를 쓴다.

 

생일 축하해줘서 고마워요, 엄마. 그리고 제 여자 친구나 결혼 문제는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엄마 아빠 때는 그래도 결혼도 해보고 이혼도 해보고 그랬지만, 우리는… 아마 안 될 거예요. 하지만 그래서 엄마 걱정하는 나쁜 일도 생기지 않을 테니까, 그러면 된 거죠, 뭐.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86쪽

 

'N포세대'라는 말이 회자될 때, 가장 먼저 포기된 것이 '연애, 결혼, 출산'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여기에는 정상성이 강하게 투영되어 있긴 하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이 포기 목록은 삶의 다음 단계로의 진입이 불가능하다는 절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루카치는 소설이 숨겨진 삶의 총체성을 형상화하고, 구축하고, 추구하는 장르라고 했다. 총체성은 자아가 세계 속에 유기적인 통합을 이루는 것을 뜻한다. 밤하늘에 총총히 빛나는 별을 지도 삼아 길을 찾을 수 있는 것. 곧, 세계가 인간의 낯선 외부가 아닌 인간과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는 것. 그것을 찾아내 드러내는 것이 소설의 미학이라고 했다. 그런데 정용과 진만은 세계로부터 계속해서 떨어져 나온다. 주로 세계가 그들을 내치고 가끔 그들이 세계를 거부한다. 그들의 삶은 세계의 흐름과 함께 나아가지 못하고, 구직과 해직 그리고 또다시 구직으로 이어지는 사이클cycle 속에서 뱅글뱅글 돌고 있다. 삶의 연속성은 시간의 물리적인 속성으로만 확인될 뿐이다. 그러니 진만과 정용의 삶은 장편소설이 아니라, 연작 소설(short story cycle)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연속적이되 독립적인 연작 소설은 선후 관계가 크게 상관없으면서도 각 경험이 독립되어 있는 구직-해직의 서클을 드러내기에 적합한 형식이기 때문이다.

더하여 이들이 주위 사람들과 관계 맺는 방식 또한 매우 파편화되어 있다. 우선 노동 조건이 계속 바뀌니 지속적인 관계를 맺기가 어렵다. 방음되지 않는 벽 너머의 중년 남자나 오래된 건물의 비슷한 차림의 세입자들, 일터에서 만난 동료 등 사람들과의 관계가 나타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관계는 지속되지 못한다. 진만과 정용뿐 아니라, 그들이 주위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들 역시 삶의 조건이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소설은 파편화된 관계들을 조각조각 보여주지만, 그 조각을 입는다고 해서 세계의 총체가 드러나지는 않는다. 심지어 정용은 진만과 오래 같이 살았지만, 그것은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것일 뿐이다. 비유하자면, 십 년짜리 우정이라기보다 전셋집 계약 연장하듯 일 년만 살 마음을 열 번 연장한 것인 셈이다. 가령, 정용과 진만이 졸업 후 같이 살기를 결심했을 때에도 특별한 우정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건 순전히 월세 부담 때문이었다."(19쪽) 정용이 아픈 진만을 데리고 종합병원을 찾을 때에도 걱정과 죄책감 이면에는 이런 마음이 있었다. "아이 씨, 이래서 혼자 살아야 하는 건데……."(63쪽) 이는 심성의 문제라기보다 심신을 돌볼 최소한의 여유조차 주어지지 않는 데서 오는 관계 맺기의 어려움이라 해야 할 것이다.

 

죽음, 단 한번의 사건이자 무수히 반복되는 사건

이러한 사이클 속에서 어떤 일이 벌어진다면, 그것은 단 한 번의 사건, 바로 죽음이다. 앞서 지적했듯, 진만과 정용은 계속해서 새로운 직장을 구하고, 그곳에서 몇몇 사람들과 알고 지내다가, 어느덧 직장도 관계도 두절된다. 그렇게 보낸 삼 년은 어디로든 ‘나아가는’ 시간이 아니라, 제자리걸음을 한 시간이었다. 교통사고를 목격하여 증인이 되거나 스토킹 현장을 보고 경찰에 신고하는 등 몇 가지 소소한 일들이 발생하긴 하지만, 이 역시 사건이 되지는 못한다. 그저 여느 날보다 좀 더 고되고 곤란한 하루였을 뿐, 정용과 진만의 삶을 변화시키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사건(event) 이라는 것이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만큼 결정적인 변화를 초래하는 일이라 한다면, 소설을 통해서 사건이라 할 만한 일은 단 한 번 벌어진다. 그것은 바로 진만의 죽음이다.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에서 돌아온 정용은 몇 개월째 놀고 있는 진만을 보고 답답해졌고, 그 답답함은 고작 컵라면이 사라진 데서 폭발하고 말았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농담 같은 욕"(268쪽)을 내뱉고 말았는데, 여러모로 정용에게 빚지고 있던 진만의 입장에선 그것이 그저 웃어넘길 수 있는 게 아니었던 듯하다. 그날로 진만은 원룸을 떠났고, 이후 진만의 소식은 부고로 전해진다. "늦은 밤, 진만이 몰던 오토바이는 국도를 달리다가 중심을 잃고 넘어지면서 중앙선을 침범했다. 그리고 때마침 반대 차선에서 달려오던 1톤 트럭에 2차 사고를 당했다."(289쪽)

진만은 원룸에서 나가 숙식을 제공해주는 치킨집에서 일했다.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했기에 시급이 형편없어도 잡아야 했을 것이다. 또, 원동기 면허가 없었지만, 가불까지 해준 사장이 배달을 가라고 했을 때 거부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진만은 대학 졸업 후 학자금대출만 갚다가 죽었다. 물론 대학 때라고 특별히 즐거웠던 것도 아니다. 취업이다 뭐다 대학 4년 내내 경마장 말처럼 달렸는데, 그러고 나니 빚이 생겼던 것이다. 그나마 경마장의 “‘3번 마’에게는 건초라도 공짜로 주기나했지. 나는 누가 등 한번 두들겨 준 적 없는데...”(19쪽) 주어진 트랙도 없는, 그리하여 '우승'이라는 게 있을 리도 없는 삶은 대학 이후에도 이어졌고, 진만은 아무리 달려도 건초도 마음껏 사지 못하는 삶에 허덕이다가 죽은 것이다. 결국 소설은 어떠한 사건의 전개도 보여주지 않은 채, 하나의 삶을 폭력적으로 종결지어 버렸다. 그런데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이든, 약관-이립-불혹-지천명-이순의 전개이든, 한 인간의 삶에 기대되는 관습적인 환상을 걷어내면, 오늘날 지방-청년-비정규직의 삶이란 정용과 진만에 가까운 게 아닐까. <눈감지 마라>는 총체성이 깨어진 시대 조각난 파편으로 소설을 기워내는 데서 나아가, 그 조각들을 아무리 기워도 결국 제자리걸음일 뿐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 제자리걸음의 끝은 '죽음'이라는 단 하나의 사건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소설 구성을 통해 드러낸다.

그런데 이 소설의 절망은 진만의 죽음에서 끝나지 않는다. 죽음은 진만의 인생에서 단 하나의 사건이었지만, 그것은 다른 무수한 삶을 통해서 반복될 것임이 예기된다.

 

정용은 사장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했다. 그가 사고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죽은 진만에겐 또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직접 들어볼 작정이었다. 하지만 매장에 들어선 순간, 정용의 마음은 바뀌고 말았다. 매장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불과 얼마 전 그곳에서 일하던 아르바이트생이 죽었는데, 면허증도 없이 오토바이 배달을 나갔다가 사고를 당했는데, 매장은 여전히 바빴고, 사람들은 제 할 일을 했고, 닭은 계속 튀겨지고 있었다. 정용은 그 모습이 당황스러웠고, 그래서 마치 우연히 들른 손님처럼 치킨을 주문하고 말았다.

-301~302쪽

 

정용이 진만이 마지막으로 일하던 치킨집을 찾았을 때, 매장에는 죽음의 그림자를 찾을 수 없었다. 죽음의 그림자는커녕 진만의 부재조차 느낄 수 없었다. 진만의 자리는 다른 노동력으로 대체되었다. 원동기 면허가 없는 아르바이트생에게 배달을 시킨 사장은 도로교통법에 따라 삼십만 원의 벌금을 냈을 뿐이다. 진만의 죽음이 이렇게 재빨리 그리고 깨끗하게 삭제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진만의 자리를 대체한 사람들 또한 언제든 진만의 비극에 노출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정용은 진만의 죽음을 수소문하다가 그와 함께 아르바이트했던 "스무 살 지방러"(295쪽) 최종민이라는 청년을 알게 된다. 그는 2002년생으로 올해 2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6월부터 치킨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고 한다. 작은 도시에서는 피시방도 편의점도 아르바이트 잡기가 힘들어 군대 가는 고등학교 선배가 소개해줘서 치킨집에서 일할 수 있었다고 한다. 진만이 죽은 뒤에는 치킨집에서 일하기도 싫어져 조만간 경기도로 올라갈 것이라 한다. “서울은 어려워도 경기도엔 물류 창고 같은 곳에 일자리가 꽤 있다고"(299쪽) 하니 말이다. 그런데 소설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최종민의 미래는 과연 진만이나 정용과 얼마나 다를까.

이 암울한 전망은 한동안 우리가 환호했던 단어들, 예컨대 '직접민주주의'라든가 '촛불혁명'과 같은 말이 얼마나 공허하고 기만적인지 긴 설명 필요 없이 드러낸다. 소설의 도입부에서 정용과 진만은 학교 안 편의점에 앉아 '촛불 집회를 하고 있다. 특별한 정치의식이 있어서라기보다 그저 “촛불잔치든 촛불집회든, 어디든 사람이 많은 곳으로 가고 싶었다.”(12쪽) 그러나 산골짜기 대학교에만 머물러 있는 그들은 인근 광역시로 나가는 데에도 실패했다. “전날 밤부터 내린 폭설로 인해 한 시간에 한 대꼴로 다니던 시외버스가 모두 운행을 중지했기 때문이다. 학기 중엔 스쿨버스가 다니지만 방학 때는 그마저도 다니지 않았다."(13쪽) 그간 사회는 촛불집회를 두고 시민들이 직접 정치적 의사를 드러낼 수 있는 직접민주주의의 한 형태라고 감격해 왔다. 그런데 정용과 진만의 상황은 그 '직접(direct)'이라는 말이 얼마나 모순적인지 단번에 드러낸다. '직접'이라는 말에는 이미 그 안에 중심과 주변의 위계가 내포되어 있어, 누군가는 시외버스를 타고, 환승을 하여야만 '직접'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진만이 편의점에 앉아서 '직접' 촛불을 켰을 때엔, 편의점 알바도 독자도 그를 한심하게 여긴다. 그가 이렇게 외쳤을 때엔 더더욱.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고요!"(14쪽)

소설에서 정용과 진만은 대체로 노동에 지쳐있지만, 가끔 서울 시장선거에 대해서 걱정도 하고, 애견 미용 학원에서 강아지를 함부로 다루는 것에 분노하기도 한다. 그런데 한 사람이 그러고 있으면 다른 사람이 한심하게 여기기 일쑤다. 그 일이 당장의 생계에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들만의 안일한 인식이 아니다. 진만이 편의점에서 촛불을 켜고 있는 장면은 독자에게도 우스꽝스럽게 보인다. 광장에 흘러넘쳤던 감동적인 구호도 진만의 입에서 발화되면 어쩐지 블랙 코미디가 된다. 왜 집회는 이들의 문제가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가. 그렇다면 집회는 누구의 문제인가. 사회 분배 시스템의 바닥에 있을수록 정치에 더 큰 목소리를 내야 하는 게 당연하지만, 그러한 삶의 조건은 정치에 관심을 가질 여유조차 주지 않는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악순환을 사회구조적으로 끊어내야 한다고 생각하기보다, 어떻게든 개인이 그 조건을 ‘극복’해야 한다고 여긴다는 점이다. 직접민주주의라는 가치는 어느새 시민권과 이동권, 그 외 무수한 권력 장치에 의해 걸러지고 걸러진 경계 내부의 사람들을 위한 것이 되어버리고, '직접'까지 닿는 길은 개인 각자의 몫이 되어버린 듯하다. 그러니 광장의 구호는 ‘직접’ 닿지 못한 이들에까지 분배되지 않는다. 무수한 집회에도 불구하고 알바생의 목숨값이 여전히 삼십만원인 것처럼 말이다.

 

차트와 소설의 차이

소설은 정용과 진만의 ‘나아진’ 삶을 보여주지 않는다. 비정규직의 삶도 소설도 폐쇄적인 사이클을 벗어나지 못한 채 끝이 난다. 더하여 이대로라면 진만의 비극이 진만에게만 국한되지 않을 것이라는 암울한 메시지마저 남긴다. 이 글의 도입부에서 나는 우리의 삶이 자본의 끝없는 그래프 위의 한 점으로 환원되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하였다. 자본주의는 우리의 욕망을 동력으로, 우리의 신체를 숙주로 자가발전 해 나가는 것이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눈감지 마라>가 남기는 암울한 전망은 오히려 차트와 소설이 세계를 서사화하는 방식의 결정적인 차이를 시사한다.

소설과 차트가 똑같이 암울한 미래를 예견한다고 해서 그 서사에 내재하는 욕망은 동일하지 않다. 차트는 항상 과거의 궤적만을 그린다. 차트를 읽고 쓰는 일은 과거를 통해 미래를 도출하겠다는 욕망에서 비롯된다. 여기서 과거는 미래를 바꾸기 위한 것이 아니라, 미래를 예측하기 위한 데이터다. 그러나 소설을 읽고 쓰는 욕망은 이와 다르다. 소설은 과거를 그리더라도 오늘의 과거를 그린다. 그리고 오늘의 과거는 좀 더 나은 방향의 미래를 꿈꾸는 일과 맞닿아 있다. 소설이 남기는 메시지가 아무리 암울하더라도, 그것은 미래를 도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미래를 꿈꾸기 위한 것이다. 눈감지 마라의 진만의 삶이 비극으로 끝났다고 해서 더 많은 비극을 예견하고 있다고 해서, 우리는 소설이 비극의 미래를 도출하려는 것이라 읽지 않는다. 소설은 차트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소설을 읽는 일 또한 소설의 꿈을 공유하는 일일 것이다. 소설을 읽는 일은 미래를 도출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개입'하는 일이다. 그리고 바로 그 '개입'을 통해서 소설은 다시 쓰일 수 있을 것이다.

 

이지은, 문학평론가. 서울대학교 국문과 박사수료. 최근에 <역사적 존재의 탄역사화, 그 '불공정함'에 대하여>(2022), <일본군 ‘위안부’ 운동 초기 증언의 교차적 듣기>(2021) 등의 글을 썼고, 동료들과 함께 <난민, 난민화되는 삶>(갈무리, 2020)을 썼다. rararra01@naver.com


이 기사는 공공 데이터와 언론 보도를 바탕으로 재구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