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포르마시옹

'나'의 존엄으로부터 시작되는 '우리'의 복원

조성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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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요약
신자유주의 시대의 끝자락에서 개인의 삶과 노동이 점점 더 피폐해지고 있으며, 영화는 거시적 담론을 넘어 개인의 이야기를 통해 사회 구조의 부조리를 드러내고 공감과 연대를 복원하는 역할을 한다는 논의이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끝자락, 노동으로 증명하는 인간의 조건

세상이 빠른 속도로 나빠지고 있다. 2000년대 초 이른바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밀어닥칠 때만 해도 사람들은 연대를 통해 충분히 저항할 수 있을 거라고 낙관했다.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기회를 박탈하고, 이미 벌어진 격차에 대해 개인에게 책임을 묻고, 온갖 선전 선동으로 부조리한 시스템을 정당화할 때도 나아질 수 있을 거라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유’라는 위선의 이름표를 내건 무한 경쟁 시대의 진정한 무서움은 속도에 있다. 세상은 더 이상 올바름를 둘러싼 고민을 하지 않는다. 최소한의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람들도 빠르게 사라져 간다. 무엇이 옳은지,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이 어떤 모습인지 몰라서 그런 게 아니다. 지켜야 할 가치에 대해 고민하고 토론하고 의견을 나눌 시간이 없다.

 

영화가 삶과 노동을 포착하는 방식

신자유주의로 포장된 경쟁 구도는 사람들이 연대하고 고민하고 투쟁할 시간을 앗아간다. 권력과 자본을 가진 이들은 문제가 발생하면 시간을 끈다. 옳고 그름을 따져보자는 논의 자체는 얼핏 정당해 보인다. 문제는 결론이 나기도 전에 빠르게 다음 고난과 불행이 밀어닥친다는 점이다. 노동으로 삶을 증명해야 하는 대다수 평범한 사람들은 오늘의 생계 앞에서 조금이나마 덜 손해 보는 선택을 하기 마련이다. 끝없이 밀어닥치는 파도 앞에서 가라앉지 않기 위해 가장 가까운 것부터 손을 놓는 셈이다. 그렇게 조금씩 불편을 감수하고 부조리에 침묵하는 데 익숙해지는 사이 어느새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나빠져 있는 주변을 발견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때쯤 깨닫는다. 이미 돌이키기 어렵다는 사실을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봐도 모두 함께 허우적거릴 뿐 사람들은 더 이상 안전망의 부재를 문제 삼을 여력조차 없어진다. 그렇게 우리는 구조와 싸울 기회를 박탈당한다.

신자유주의는 교묘하고 은밀하게 약자가 약자와 경쟁하는 구도를 구축했다. 이것은 방향의 문제가 아니다. 사건을 사건으로 덮고 작은 이익에 목매달 수밖에 없도록 유도하는 상황의 문제다. 우리는 속도를 무기로 세상을 더 나쁜 방향으로 이끌어온 신자유주의 시대의 끝자락에 서있다. 구태여 끝자락이라고 말하는 건 눈앞에 종말적인 파국을 앞두고있기 때문이다. 자국중심주의가 첨예해지고 국가간 경쟁으로 전 세계가 블록화돼가는 지금, 신자유주의 체계 자체도 빠르게 붕괴 혹은 변형중이다. 최악은 구조적인 결함을 그대로 남겨두고 고립주의 노선으로 전환된다는 점에 있다. 안전망은 붕괴되고, 개인 책임은 커지는데 각자 알아서 생존해야 한다는 공포가 세상을 집어삼키고 있다. 세계가 급변할 때 종종 사람은 지워진다. 정확히는 미시적인 개인사, 각자의 사정이 희석된다. 여기서 영화는 빛을 발한다.

영화는 힘이 있다. 지워진 것들을 복원하고, 누락된 기억을 재현하고, 거대한 흐름이 미처 보지 못한 것들에 카메라를 비춘다. 카메라는 언제나 거시사보다는 미시사에 호기심을 느낀다. 역사의 흐름이나 사회문제의 경향을 짚어주는 거대한 담론보다 오늘 내 옆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더 사랑한다. <기생충>으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한 봉준호 감독은 수상소감에서 “모든 개인적인 것은 창의적인 것"이라는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말을 인용하며 존경과 헌사를 보냈다. 이 말은 다시 돌아와, '모든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라는 명제와도 공명한다. 모든 개인사, 자잘한 사연들, 뉴스와 역사가 기억해주지 못한 이야기들을 영화는 기억한다. 널리 퍼트리고 공명을 일으켜 그들 각자의 이야기를 우리의 모두의 이야기로 되돌린다. 그리해 우리 시대의 노동이 삶과 어떻게 그물망을 형성하는지를 목격할 수 있도록 넉넉한 공감의 자리를 마련한다. 여기 세 편의 영화가 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일하고 연대하고 끝내 살아남는가. 그들 각자의 이야기 속에 오늘의 진실이 숨 쉬고 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 여기 사람이 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카메라를 든 사나이’, '블루 칼라의 시인'으로 불리는 켄 로치 감독의 2016년 작으로 같은 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이다. 수상이 작품성을 담보하는 건 아니지만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수상은 의미심장한 구석이 있다. 영화의 미학적 완성도보다 메시지, 시대에 공감하는 이야기의 필요성에 손을 들어준 결과이기 때문이다. 부당한 복지제도와 관료주의 앞에 인간의 존엄을 지키고자 하는 한 시민의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는 켄 로치 감독의 목적의식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영화다. 켄 로치 감독은 단호하게 고한다. 세상이 점점 나빠지고 있는데, 당신은 손 놓고 가만히 있을 거냐고. 왜 지금 함께 분노하지 않느냐고. 다니엘 블레이크(데이브 존스)는 심장에 이상이 생겨 잠시 일을 쉬어야 할 처지에 놓인다. 실업급여를 받기 위해 관공서를 찾은 다니엘은 여러 가지 벽에 가로막힌다. 관공서에서는 컴퓨터 사용법도 제대로 모르는 다니엘에게 인터넷을 이용해 신청서를 제출하라 고압적인 태도를 유지한다. 수혜자를 고려하지 않는, 정확히는 사람을 보지 않고 숫자로만 계산하는 관료들 앞에서 다니엘은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조용한 투쟁을 시작한다. 그 와중에 공무원과 말다툼 중인 싱글맘 케이티(헤일리 스콰이어)를 만나고, 아내를 먼저 떠나보내고 혼자 남은 다니엘은 케이티 가족을 도와준다. 그것은 케이티의 연민과 보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스스로를 지키는 방식이기도 했다. 그렇게 평생을 노동을 통해 삶을 증명했던 한 노동자는 시스템 바깥으로 자신을 밀어내고 투명인간 취급 하는 사회에 온몸으로 저항한다.

다니엘 블레이크의 행보는 그 자체로 부조리한 상황를 향한 질문을 던진다. 예컨대 실업급여 관리자가 당신에겐 질병수당과 실업급여를 받는 선택지가 있었다고 말하는 장면은 “지금의 결과가 당신의 선택에 따른 책임" 이라는 정부 측의 변명을 대변한다. 당신이 복지제도에 접근하기 위한 컴퓨터를 못 하는 건 당신 책임이라는 설명이다. 하지만 이에 적극적으로 항변하는 다니엘의 말처럼 우리에겐 사실 선택지가 없는 경우가 훨씬 많다. 평생 목수로 살았던 다니엘이 컴퓨터와 거리가 먼 건 당연한 일이지만 시스템은 그런 사각지대를 배려하지 않는다. 이는 개인의 가난은 구조적인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행동, 즉 게으름에 따른 책임이라는 말로 확장될 수도 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 아닌가. 시스템은, 그리고 시스템을 유지하고 싶어 하는 자들은 늘 당신 책임을 묻는다. 너는 제대로 한 거냐고 이들이 알리바이를 확보하는 방식은 교묘하다. 몇 가지 선택지가 있는 것처럼 꾸미고 실질적으로는 한 가지 길로 갈 수밖에 없도록 갖가지 유리 장벽을 설치해 방향을 유도한다. 그러고는 단언한다. 시스템은 최선을 다했다고. 정말 그런가,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 유리 장벽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포기하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구걸해야 한다. 그게 싫다면 다니엘처럼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 우리에게 선택지는 굴욕을 수하고 개가 되느냐, 인간으로서 굶느냐 둘 중 하나다. 이것이 영화적 과장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시스템의 자기변명과 환상을 하나씩 깨부숴나간다. 대단한 호소를 하는 게 아니다. 그저 고집스럽고 자기 삶에 떳떳한 노인 한 명을 그 상황에 가져다 놓을 뿐이다.

영화 말미 다니엘은 한 통의 편지를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심장질환으로 일을 쉬어야 했던 목수는 정부로부터 정당한 의료수당을 받지 못했고, 당장의 생계를 위해 실업급여를 구걸해야 했으며, 끝내 잘못된 행정을 바로 잡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나는 의뢰인도 고객도 사용자도 아닙니다. 나는 게으름뱅이도 사기꾼도 거지도 도둑도 아닙니다. 나는 보험 번호 숫자도 화면 속의 점도 아닙니다. 나는 묵묵히 책임을 다하며 떳떳하게 살았습니다. 나는 굽실대지 않고 이웃이 어려우면 기꺼이 도왔습니다. 자선을 구걸하거나 기대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다니엘 블레이크 개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이에 나는 나의 권리를 요구합니다. 인간적존 중을 요구합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한 사람의 시민 그 이상도 그이하도 아닙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소개하는 데 이 이상 어떤 설명이 더 필요한지 모르겠다. 이 영화는 이 한 장면을 제대로 공명시키기 위해 90분을 바친다. 다니엘의 죽음은 관객 모두 마음의 빛이 돼, 다시 한번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되묻는다. 인간사회에서 부조리는 항상 존재한다. 그러니 부조리를 고발하는 것을 멈춰서도 안 되고 비단 고발하는 것에 머물러서도 안 된다. 켄 로치의 영화가 동력으로 삼고자 하는 것은 항상 부조리의 자각 그 다음 단계, 그러니까 분노를 매개로한 공유와 연대다. 당신은 이 상황을 용인할 수 있는가.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거니 우리도 어떤 식으로든 화답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이러한 결말은 다소 작위적이고 드라마틱하게 보일 수도 있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래서 효과적이다. 켄 로치의 영화가 현실참여적인 힘을 발휘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미학적인 완성보다 관객을 일깨우는 신파를 선택한다. 시스템을 예리하게 해부하는 이성보다 그 앞에 선 인간의 표정에 좀 더 주목한다. 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공감하는 힘이다. 켄 로치의 비극이 서사로서 소모되지 않는 까닭은 눈물을 목적으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에게 웃음은 인간을 바라보는 근간이고 눈물은 설득의 도구다. 그는 미학보다 인간을 우선한다. 이 지독한 비관론자는 끝끝내 인간에게서 가능성을 발견하고 희망을 품는다. 지쳐버린 다니엘이 더 이상 케이티의 집을 찾지 않을 케이티의 딸 데이지는 다니엘의 집을 찾아와 말한다. “우릴 도와주셨죠? 저도 돕고 싶어요” 이보다 강력한 설득의 언어는 찾기 어렵다. 우리는 이 장면을 통해 연민과 연대가 당위의 영역에 있는 감정임을 확인할 수 있다. 서로를 위로하고 돕는 연대의 증명. 그리해 영화는 한 줌의 낙관에 기대 시스템의 불합리, 제도의 자기변명, '빈곤은 개인 책임'이라는 지배층의 변명에 일갈을 날린다.

켄 로치가 관객을 설득하는 방법은 거창하지 않다. 여기 사람이 있다고 알려주는 게 전부다. 다니엘 블레이크와 의료심사관의 대화로 시작하는 오프닝은 답답하기 이를 데 없다. 의료심사관은 다니엘에게 기계적이고 의미 없는 질문들을 반복한다. 심장에 문제가 있다고 아무리 외쳐 봐도 자동응답기 마냥 매뉴얼을 따를 것을 지시한다. 이 어둠 속의 대화가 모든 문제의 출발이자 본질이다. 사람이 이야기하는데 마주 앉은 자리에 사람은 없다. 의료심사관의 말투가 기계음에 가까운 건 아마도 그가 그렇게 응대하도록 교육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영화의 놀라운 점은 장벽, 장애로 설정된 심사관과 공무원들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열어준다는 거다. 그들은 복지를 바라는 이들을 기계적으로 응대하고 스스로 포기한 채 발걸음을 돌릴 수 있도록 설정된 유리 장벽들이다. 숫자와 효율을 최우선에 둔 시스템은 공무원들에게도 인간성을 포기하길 강요한다. 밥줄을 담보로 잡힌 공무원들은 기계로 학습돼 눈앞에 있는 대상을 인간이 아니라 제거해서 돌려보내야 할 귀찮은 존재로 인식한다. 그렇게 효율을 먼저 생각한 제도는 응당 필요한 복지를 받아야 할 자와 이를 수행하는 자 양쪽을 동시에 멸시한다. 다니엘은 그들을 미워해야 하는가. 그럴 수도 있다. 당장 눈앞에 대고 고함을 치는 편이 후련할 것이다. 하지만 다니엘은 대신 곁에서 또 다른 모욕을 받고 있던 싱글맘 케이티(헤일리 스콰이어)를 도와준다. 함께 괴물이 되는 대신 인간이기에 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다니엘은 우리를 부품 취급하는 시스템에 가장 우아한 방식으로 저항한다. 여기 사람이 있다(혹은 있었다는 외침. 그리해 (케이티의 말을 빌리자면) 다니엘은 우리에게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일깨워준 영웅이 된다.

 

이 기사를 주목해야하는 이유
1
신자유주의 체계 붕괴

단순한 경제 정책의 변화를 넘어 전 세계 블록화와 고립주의로의 전환이 진행 중이며, 이는 개인의 생존 부담을 극대화하는 구조적 위기를 의미한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끝자락, 노동으로 증명하는 인간의 조건

세상이 빠른 속도로 나빠지고 있다. 2000년대 초 이른바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밀어닥칠 때만 해도 사람들은 연대를 통해 충분히 저항할 수 있을 거라고 낙관했다.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기회를 박탈하고, 이미 벌어진 격차에 대해 개인에게 책임을 묻고, 온갖 선전 선동으로 부조리한 시스템을 정당화할 때도 나아질 수 있을 거라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유’라는 위선의 이름표를 내건 무한 경쟁 시대의 진정한 무서움은 속도에 있다. 세상은 더 이상 올바름를 둘러싼 고민을 하지 않는다. 최소한의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람들도 빠르게 사라져 간다. 무엇이 옳은지,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이 어떤 모습인지 몰라서 그런 게 아니다. 지켜야 할 가치에 대해 고민하고 토론하고 의견을 나눌 시간이 없다.

영화가 삶과 노동을 포착하는 방식

신자유주의로 포장된 경쟁 구도는 사람들이 연대하고 고민하고 투쟁할 시간을 앗아간다. 권력과 자본을 가진 이들은 문제가 발생하면 시간을 끈다. 옳고 그름을 따져보자는 논의 자체는 얼핏 정당해 보인다. 문제는 결론이 나기도 전에 빠르게 다음 고난과 불행이 밀어닥친다는 점이다. 노동으로 삶을 증명해야 하는 대다수 평범한 사람들은 오늘의 생계 앞에서 조금이나마 덜 손해 보는 선택을 하기 마련이다. 끝없이 밀어닥치는 파도 앞에서 가라앉지 않기 위해 가장 가까운 것부터 손을 놓는 셈이다. 그렇게 조금씩 불편을 감수하고 부조리에 침묵하는 데 익숙해지는 사이 어느새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나빠져 있는 주변을 발견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때쯤 깨닫는다. 이미 돌이키기 어렵다는 사실을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봐도 모두 함께 허우적거릴 뿐 사람들은 더 이상 안전망의 부재를 문제 삼을 여력조차 없어진다. 그렇게 우리는 구조와 싸울 기회를 박탈당한다.

신자유주의는 교묘하고 은밀하게 약자가 약자와 경쟁하는 구도를 구축했다. 이것은 방향의 문제가 아니다. 사건을 사건으로 덮고 작은 이익에 목매달 수밖에 없도록 유도하는 상황의 문제다. 우리는 속도를 무기로 세상을 더 나쁜 방향으로 이끌어온 신자유주의 시대의 끝자락에 서있다. 구태여 끝자락이라고 말하는 건 눈앞에 종말적인 파국을 앞두고있기 때문이다. 자국중심주의가 첨예해지고 국가간 경쟁으로 전 세계가 블록화돼가는 지금, 신자유주의 체계 자체도 빠르게 붕괴 혹은 변형중이다. 최악은 구조적인 결함을 그대로 남겨두고 고립주의 노선으로 전환된다는 점에 있다. 안전망은 붕괴되고, 개인 책임은 커지는데 각자 알아서 생존해야 한다는 공포가 세상을 집어삼키고 있다. 세계가 급변할 때 종종 사람은 지워진다. 정확히는 미시적인 개인사, 각자의 사정이 희석된다. 여기서 영화는 빛을 발한다.

영화는 힘이 있다. 지워진 것들을 복원하고, 누락된 기억을 재현하고, 거대한 흐름이 미처 보지 못한 것들에 카메라를 비춘다. 카메라는 언제나 거시사보다는 미시사에 호기심을 느낀다. 역사의 흐름이나 사회문제의 경향을 짚어주는 거대한 담론보다 오늘 내 옆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더 사랑한다. <기생충>으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한 봉준호 감독은 수상소감에서 “모든 개인적인 것은 창의적인 것"이라는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말을 인용하며 존경과 헌사를 보냈다. 이 말은 다시 돌아와, '모든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라는 명제와도 공명한다. 모든 개인사, 자잘한 사연들, 뉴스와 역사가 기억해주지 못한 이야기들을 영화는 기억한다. 널리 퍼트리고 공명을 일으켜 그들 각자의 이야기를 우리의 모두의 이야기로 되돌린다. 그리해 우리 시대의 노동이 삶과 어떻게 그물망을 형성하는지를 목격할 수 있도록 넉넉한 공감의 자리를 마련한다. 여기 세 편의 영화가 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일하고 연대하고 끝내 살아남는가. 그들 각자의 이야기 속에 오늘의 진실이 숨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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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켄 로치 감독 '나, 다니엘 블레이크'
작품성보다 시대적 메시지의 필요성을 인정받은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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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상영시간
한 사람의 존엄을 위한 시간
다니엘의 마지막 편지 한 장면을 위해 바친 전체 러닝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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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 물결
무한경쟁 시대의 시작점
연대를 통한 저항 가능성에 대한 낙관이 존재했던 시기

<나, 다니엘 블레이크>, 여기 사람이 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카메라를 든 사나이’, '블루 칼라의 시인'으로 불리는 켄 로치 감독의 2016년 작으로 같은 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이다. 수상이 작품성을 담보하는 건 아니지만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수상은 의미심장한 구석이 있다. 영화의 미학적 완성도보다 메시지, 시대에 공감하는 이야기의 필요성에 손을 들어준 결과이기 때문이다. 부당한 복지제도와 관료주의 앞에 인간의 존엄을 지키고자 하는 한 시민의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는 켄 로치 감독의 목적의식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영화다. 켄 로치 감독은 단호하게 고한다. 세상이 점점 나빠지고 있는데, 당신은 손 놓고 가만히 있을 거냐고. 왜 지금 함께 분노하지 않느냐고. 다니엘 블레이크(데이브 존스)는 심장에 이상이 생겨 잠시 일을 쉬어야 할 처지에 놓인다. 실업급여를 받기 위해 관공서를 찾은 다니엘은 여러 가지 벽에 가로막힌다. 관공서에서는 컴퓨터 사용법도 제대로 모르는 다니엘에게 인터넷을 이용해 신청서를 제출하라 고압적인 태도를 유지한다. 수혜자를 고려하지 않는, 정확히는 사람을 보지 않고 숫자로만 계산하는 관료들 앞에서 다니엘은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조용한 투쟁을 시작한다. 그 와중에 공무원과 말다툼 중인 싱글맘 케이티(헤일리 스콰이어)를 만나고, 아내를 먼저 떠나보내고 혼자 남은 다니엘은 케이티 가족을 도와준다. 그것은 케이티의 연민과 보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스스로를 지키는 방식이기도 했다. 그렇게 평생을 노동을 통해 삶을 증명했던 한 노동자는 시스템 바깥으로 자신을 밀어내고 투명인간 취급 하는 사회에 온몸으로 저항한다.

다니엘 블레이크의 행보는 그 자체로 부조리한 상황를 향한 질문을 던진다. 예컨대 실업급여 관리자가 당신에겐 질병수당과 실업급여를 받는 선택지가 있었다고 말하는 장면은 “지금의 결과가 당신의 선택에 따른 책임" 이라는 정부 측의 변명을 대변한다. 당신이 복지제도에 접근하기 위한 컴퓨터를 못 하는 건 당신 책임이라는 설명이다. 하지만 이에 적극적으로 항변하는 다니엘의 말처럼 우리에겐 사실 선택지가 없는 경우가 훨씬 많다. 평생 목수로 살았던 다니엘이 컴퓨터와 거리가 먼 건 당연한 일이지만 시스템은 그런 사각지대를 배려하지 않는다. 이는 개인의 가난은 구조적인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행동, 즉 게으름에 따른 책임이라는 말로 확장될 수도 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 아닌가. 시스템은, 그리고 시스템을 유지하고 싶어 하는 자들은 늘 당신 책임을 묻는다. 너는 제대로 한 거냐고 이들이 알리바이를 확보하는 방식은 교묘하다. 몇 가지 선택지가 있는 것처럼 꾸미고 실질적으로는 한 가지 길로 갈 수밖에 없도록 갖가지 유리 장벽을 설치해 방향을 유도한다. 그러고는 단언한다. 시스템은 최선을 다했다고. 정말 그런가,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 유리 장벽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포기하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구걸해야 한다. 그게 싫다면 다니엘처럼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 우리에게 선택지는 굴욕을 수하고 개가 되느냐, 인간으로서 굶느냐 둘 중 하나다. 이것이 영화적 과장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시스템의 자기변명과 환상을 하나씩 깨부숴나간다. 대단한 호소를 하는 게 아니다. 그저 고집스럽고 자기 삶에 떳떳한 노인 한 명을 그 상황에 가져다 놓을 뿐이다.

영화 말미 다니엘은 한 통의 편지를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심장질환으로 일을 쉬어야 했던 목수는 정부로부터 정당한 의료수당을 받지 못했고, 당장의 생계를 위해 실업급여를 구걸해야 했으며, 끝내 잘못된 행정을 바로 잡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나는 의뢰인도 고객도 사용자도 아닙니다. 나는 게으름뱅이도 사기꾼도 거지도 도둑도 아닙니다. 나는 보험 번호 숫자도 화면 속의 점도 아닙니다. 나는 묵묵히 책임을 다하며 떳떳하게 살았습니다. 나는 굽실대지 않고 이웃이 어려우면 기꺼이 도왔습니다. 자선을 구걸하거나 기대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다니엘 블레이크 개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이에 나는 나의 권리를 요구합니다. 인간적존 중을 요구합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한 사람의 시민 그 이상도 그이하도 아닙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소개하는 데 이 이상 어떤 설명이 더 필요한지 모르겠다. 이 영화는 이 한 장면을 제대로 공명시키기 위해 90분을 바친다. 다니엘의 죽음은 관객 모두 마음의 빛이 돼, 다시 한번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되묻는다. 인간사회에서 부조리는 항상 존재한다. 그러니 부조리를 고발하는 것을 멈춰서도 안 되고 비단 고발하는 것에 머물러서도 안 된다. 켄 로치의 영화가 동력으로 삼고자 하는 것은 항상 부조리의 자각 그 다음 단계, 그러니까 분노를 매개로한 공유와 연대다. 당신은 이 상황을 용인할 수 있는가.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거니 우리도 어떤 식으로든 화답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이러한 결말은 다소 작위적이고 드라마틱하게 보일 수도 있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래서 효과적이다. 켄 로치의 영화가 현실참여적인 힘을 발휘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미학적인 완성보다 관객을 일깨우는 신파를 선택한다. 시스템을 예리하게 해부하는 이성보다 그 앞에 선 인간의 표정에 좀 더 주목한다. 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공감하는 힘이다. 켄 로치의 비극이 서사로서 소모되지 않는 까닭은 눈물을 목적으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에게 웃음은 인간을 바라보는 근간이고 눈물은 설득의 도구다. 그는 미학보다 인간을 우선한다. 이 지독한 비관론자는 끝끝내 인간에게서 가능성을 발견하고 희망을 품는다. 지쳐버린 다니엘이 더 이상 케이티의 집을 찾지 않을 케이티의 딸 데이지는 다니엘의 집을 찾아와 말한다. “우릴 도와주셨죠? 저도 돕고 싶어요” 이보다 강력한 설득의 언어는 찾기 어렵다. 우리는 이 장면을 통해 연민과 연대가 당위의 영역에 있는 감정임을 확인할 수 있다. 서로를 위로하고 돕는 연대의 증명. 그리해 영화는 한 줌의 낙관에 기대 시스템의 불합리, 제도의 자기변명, '빈곤은 개인 책임'이라는 지배층의 변명에 일갈을 날린다.

켄 로치가 관객을 설득하는 방법은 거창하지 않다. 여기 사람이 있다고 알려주는 게 전부다. 다니엘 블레이크와 의료심사관의 대화로 시작하는 오프닝은 답답하기 이를 데 없다. 의료심사관은 다니엘에게 기계적이고 의미 없는 질문들을 반복한다. 심장에 문제가 있다고 아무리 외쳐 봐도 자동응답기 마냥 매뉴얼을 따를 것을 지시한다. 이 어둠 속의 대화가 모든 문제의 출발이자 본질이다. 사람이 이야기하는데 마주 앉은 자리에 사람은 없다. 의료심사관의 말투가 기계음에 가까운 건 아마도 그가 그렇게 응대하도록 교육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영화의 놀라운 점은 장벽, 장애로 설정된 심사관과 공무원들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열어준다는 거다. 그들은 복지를 바라는 이들을 기계적으로 응대하고 스스로 포기한 채 발걸음을 돌릴 수 있도록 설정된 유리 장벽들이다. 숫자와 효율을 최우선에 둔 시스템은 공무원들에게도 인간성을 포기하길 강요한다. 밥줄을 담보로 잡힌 공무원들은 기계로 학습돼 눈앞에 있는 대상을 인간이 아니라 제거해서 돌려보내야 할 귀찮은 존재로 인식한다. 그렇게 효율을 먼저 생각한 제도는 응당 필요한 복지를 받아야 할 자와 이를 수행하는 자 양쪽을 동시에 멸시한다. 다니엘은 그들을 미워해야 하는가. 그럴 수도 있다. 당장 눈앞에 대고 고함을 치는 편이 후련할 것이다. 하지만 다니엘은 대신 곁에서 또 다른 모욕을 받고 있던 싱글맘 케이티(헤일리 스콰이어)를 도와준다. 함께 괴물이 되는 대신 인간이기에 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다니엘은 우리를 부품 취급하는 시스템에 가장 우아한 방식으로 저항한다. 여기 사람이 있다(혹은 있었다는 외침. 그리해 (케이티의 말을 빌리자면) 다니엘은 우리에게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일깨워준 영웅이 된다.

단순한 경제 정책의 변화를 넘어 전 세계 블록화와 고립주의로의 전환이 진행 중이며, 이는 개인의 생존 부담을 극대화하는 구조적 위기를 의미한다.

개인의 사소한 이야기들이 사회 구조의 진실을 담고 있으며, 영화는 지워진 개인사를 복원함으로써 집단의 연대와 공감을 촉발하는 문화적 무기가 될 수 있다.

현대인은 생계 앞에서 개인적 가치와 사회 부조리를 둘러싼 고민의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으며, 이러한 구조적 폭력이 우리 시대의 핵심 문제이다.

이 기사를 주목해야하는 이유
1
신자유주의 체계 붕괴

단순한 경제 정책의 변화를 넘어 전 세계 블록화와 고립주의로의 전환이 진행 중이며, 이는 개인의 생존 부담을 극대화하는 구조적 위기를 의미한다.

2
영화의 정치성 재발견

개인의 사소한 이야기들이 사회 구조의 진실을 담고 있으며, 영화는 지워진 개인사를 복원함으로써 집단의 연대와 공감을 촉발하는 문화적 무기가 될 수 있다.

3
노동과 삶의 괴리 심화

현대인은 생계 앞에서 개인적 가치와 사회 부조리를 둘러싼 고민의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으며, 이러한 구조적 폭력이 우리 시대의 핵심 문제이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노동자영화 제작자와 감독들사회 복지 시스템
이 기사가 던지는 질문
개인의 존엄과 사회 시스템의 효율성 사이에서 어떤 균형을 찾을 것인가?
영화와 같은 문화적 매체가 사회 변화에 실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이 기사는 공공 데이터와 언론 보도를 바탕으로 재구성했습니다.